에즈러 파운드(Ezra pound), 수즌 손택 (Susan Sontag)/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의 사진론과 현대영화이론, 즉 카메라의 미장센(mise en scène)과 몽타주(montage) 기법, 그리고 그레마스기호학에 기초한 한국 미니멀리즘 시(詩)의 기원(起源).(footnote-카메라의 분류)

오영진 교수의 서신

앞으로 당분간,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하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시험적인 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개척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해왔었습니다만, 이제사 그 효시를 보는 것 같아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오영진(동국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1989.5.24)

 -특히 시각(視覺)뿐만 아니라 미각(味覺)과 후각에도 포커스를 맞춰 보라.

 
어둠


밤길을 걷다가
숨죽여 들여다보면
움직이는 사람이어라





아지랑이


공장에
보내놓고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는
누이여라





유세장에서

군중 속에서
장미꽃 입에 물고
삽사리도 꼬리쳐





滾馬圖


청둥호박은
숟가락으로 긁지만

난 사십이 넘도록
이룬 게 없으니

흙바닥에 잔등이를
비빌 수밖에





가마솥


친구들이 돼지를 잡는
가마솥에 배꽃이 지네





나비


배추꽃 피니까
보증빚 집 팔아 갚고
박공수는 훨훨 날아가네








성당에서
주는 풀떼기

받아먹으려고
선 줄이

골목을
돌아갑니다.





는개


는개를 맞으며
고무신에 흙묻을까
맨발로 밟는 황톳길





희아리


멍석에 고추 널고
빙빙 밖으로 돌며
골라내는 희아리





어금니


알밤 깨물다가
어금니 쓰레기통에
버리고 뒤돌아보네





新綠


새살 돋는 젖에도
느티나무 신록에도
스치는 구름





제비


방 따로
부엌 따로

이씨 내외
사는 지붕

넘나드네
제비 새끼





잔나비


창경원에
사람들 모이니까

잔나비도
거울을 보네





콩서리


밭고랑에 앉아
구워먹는 콩이런가
마주보며 웃는 이





배추벌레


허리를 펴고
산노을 바라보면

마음은 주발 속에서
고물거리는 배추벌렌가





곶감


곶감을 먹으면
입을 벌리지 않아도
밀려나오는 감씨여라





복숭아


모시 옷 갈아입고
복숭아 입에 문 뒤
밀어내는 벌레런가





새옹


이슬 고인
새옹 속에
손가락을 적십니다
발끝까지 울리는
장박새 소리





살구꽃


사립문 살며시 밀자
너와지붕 짓밟고 서서
살구꽃은 포효하느니





곱삶이


고추 속의 벌레도
물에 깨뜨린 곱삶이도
다 밀어 넣고 씹느니





목물


두레박으로
땅속에서 길어 올려
등에 붓는 하늘인가





빗발


호박잎 따다가
소리나서 보니
비도 흙내 나네





살모사


아침 이슬이여
참외밭에 똬리 친
살모사도 맛드는지





소쿠리


싸락눈 내리면
소쿠리에 담아 둔 감
물렀을까 궁금하여라





새물내


목물하고 마루에 앉아
삼베 옷 갈아입으며
코로 맡는 새물내





박꽃


박꽃 피니까
갈칫도막 따라서
돌아오는 연정이





간장


간장을 달이며
짭짜롬 맛이 드느니
아내의 새끼손가락








전깃줄에 걸린 연
빈손으로 어떻게 딸까
밤새도록 궁리하네





골목길


점점 진눈깨비
저녁쌀 앉히다가

진이 눈에
멍들도록 싸운 아이

집에 쫓아가 퍼붓고
돌아오는 골목길





깨소금


아내가 찧는
깨소금 내음도

밖으로 새 나가면
진달래꽃이런가





진흙


진흙에서 뒹굴다가
돌아온 얼굴이며 몸뚱어리
씻어놓고 보니 내 새끼여라





이슬


매 들자
달아난 아이

분꽃 지고
달맞이꽃 피어도

돌아오지 않아
이슬에 젖느니





산등


가랑비에
젖는 산등

고모네 집에
진이 보내놓고

새우잠 자는
아내여라





돌아서서


미운 아이
맞는 걸 보고

돌아서서
살구꽃이 지도록

속으로
웃는 연정이





자리


버스를 타면
밖은 개나리

여학생이
자리를 양보하는

벌써 마흔 다섯이어라





봄날


새옷으로 갈아입고
사람 속을 거닐면서
혼자 웃는 날씨여라





감을 우리며


설움도
땡감인가

소금물
독에 넣고

누나는
우립니다





징거미


사발 속에서
징거미 뛰어내려
땅바닥도 강물인가





鼻行


돌각담 위에서 똑 떨어져
호박꽃도 코로 흙을 밟네





콩새


오리나무 아랫가지
그 윗가지 다음 끝가지

포르르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콩새인가





문틈


느티나무도
문틈으로 새어드는
쑥개떡 냄새런가





과꽃


마당귀에선
과꽃도 짖나 싶어

자세히 보니
강아질세





송사리


돌돌
여울 위에

한 치쯤 남은
놀 속으로

뛰어오르는
송사리 떼





오디를 따며


는개 걷히니까
산은 뽕밭이더니
꾀꼬리 따 문 오디런가





접시


앵두도 한 개
청개구리도 한 마리
흰 접시 위에








새로 뚫린 창이런가
달력 떼어 낸 자리에
감나무 한 가지





공다리


묵밭 언저리
공다리도 불이 붙으면
툭툭 소리가 나네





개뿔


텃밭에 눈 오면

컹컹 소리
효험 없어

강아지도
뿔이 돋는지





뱁새


푸줏간
저울 위에

뱁새가
앉아 우네





코스모스


길가에
총총 선 코스모스

조금씩 밀리다가
굴러 떨어져

개울물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웅덩이


밤새 봄비 내리더니
시멘트 바닥에 웅덩이
개구리가 알을 낳았네








도마 위에서
목잘린 닭

털을 뽑은 뒤에
느끼는 서늘함





해바라기


기도원에 끼었네
해바라기 꽃대궁
점점 비틀어져





달팽이


꽃창포 속에서
새끼 오리 부리 물고
놓지 않는 달팽이





할미새


아이들이
소꿉놀이 하다가

흘리고 간
비스킷 밟고

아주 눌러 사는
할미새여라





물레방아


전주 시민 공원
여울물은 놀러 나가고
물레방아 혼자 돌지라





가랑잎


마루에도
마당귀에도

가랑잎은
옹송그리고

귓부리 쫑긋거리는
오소리 새낀가





배추


불빛 때문인지
자국눈 내리는 밭머리에
웅크린 배추 한 포기





綠陰


양귀비꽃 한 송이
보릿대와 함께 묶여
녹음 속으로 사라져





뒤안


뒤안에 해 지면
양귀비꽃도 군청빛
이가 빠지네





거미


분꽃 피는 노을 속에
거미가 목을 매지라





명개


명개 위
게 발자욱

놀 속으로
이어지네





멧새


수도관이
새어 솟는 물에

멧새도
가슴을 적셔 보네





浮屠


산그늘 슬슬 얼러대는 물 그늘
부도는 귀를 갸웃거리고 있네





종다리


종다리도 그림자도
보리를 베고 나니
모가지가 껄껄하네





꽃게


섬에 올라
달을 바라보노라
속이 다 비느니





둑길


아지랑이 속에서
둑길도 움죽거려
애벌렌가





풍뎅이


하늘엔 별
모깃불 피워놓자
날아드는 풍뎅이





시루


불빛도 꺼지고
시루 속에 눈 쌓여
태 긋는 소리





석류꽃


돌담 그늘로
석류꽃 지는가
강아지 잠지





오솔길


오솔길이여
왼쪽엔 소나기
오른쪽엔 햇빛





더덕순


더덕순 햇살 위에서
실뱀은 허물을 벗고
그만 노그라지네





붓꽃


서울로 대전으로
출동하여 빈 지서
붓꽃이 앉아 지켜








덜 떨어진 개구리의 입
그 위엔 눈 녹는 소리
그 위엔 별 초롱초롱





벼꽃


논두렁에서
누가 깨를 볶나

구부리고 보니
벼꽃잎 터지는 소리





그늘


쓰르라미 울면
등으로 기느니
미루나무 그늘





염소


염소에게
사람도 끌려가느니

산도 노을도
함께 끌려가느니





누리


잔등이에 노을
아랫도리에 어스름
발등엔 누리





홍시


별도 달도 지고
서리 내린 가지

꼬투리 비틀다가
놓쳐버린 홍시





목련꽃


목련꽃 바라보며
성큼 울안에 들어서자
컹컹 짖는 아랫집 개





히아신스


히아신스
두 뿌리

뜰에 심어
봉오리 나올 무렵

누군가
한 뿌리 캐 가고





찌르레기


종도 치기 전
안개 위로 찌르레기
자지러져 오르네





까치


천둥 번개
소나기 쏟아지자

문지방에 앉아
까치도 깝작거려





卑亞蘭


비아란 향기를 맡노라니
딸이 와서 엄마가 찾아
-그런 사람 모른다





장미


수반의 장미꽃
가지를 자르니까
가시도 손등 찔러





아침에


나팔꽃 피니까
치맛자락 줄어졌느니
여치와 지샌 연정이





나팔꽃


햇살이 쏟아지면
꽃도 연정이 얼굴도
자꾸 오므라져





장독


진달래꽃 피면
말끔히 닦아놓고
물러서서 바라보는
장독이어라





원두막


땡볕을 피해
원두막에 드니
나도 참외인가





참외


서리 가서
도망치다가 빠진
웅덩이런가 참외





앵두꽃


간장 독 옮겨놓고
그 자리 도로 뜨러 가는
새댁인가 앵두꽃





함지박


함지박 속에
얼어붙은 해를
팽개치는 아내





밥내


눋는 밥내
아랫집인가

저녁 안개
헤치며 살피니

대문 열고
들어서는 누렁이





露宿


내외 싸움 끝에
사내는 불을 지르고
풀밭에서 잡니다





소나기


집을 나서며
받든 우산

버스 속에 놓고
멀쩡한 하늘

빈손으로 걷다가
소나기를 맞느니





꽃놀이


머리채 잡고
뒹굴던 윤가 내외

날 새자 관촉사로
꽃놀이가네





기음


밭고랑
김을 매고

비 갠 뒤에
다시 둘러보면

보이지 않는
열무여라





제식훈련


살구꽃 날리는
연병장에서

병사들이
제식훈련을 합니다

손발이 같이 따라간다고
기합 받고도 마찬가지

좌향 우향
땀흘리며 쫓아갑니다





굼벵이


다행이 백인에게
딸을 시집 보내고
이제는 몇 잔 소주에도
길바닥에 쓰러져 자며
최문백은 굼벵이런가
미루나무 끝에 와서
때까치가 우네





봄비


봄비도
학교에 가느니

겨우내 딱지진
손과 발

퉁퉁 불려
문지르네





호박덩굴


해질녘 호박덩굴
문을 두드리다가
담넘어 갑니다





웃비


물꼬 때문에
안고 뒹구는 사이

웃비 쏟아져
논두렁이 터지네





菽麥


얼근한 친구의 얼굴 바라보며
손바닥에 굳은 살 박힌 사연
듣고 또 들어도 끝없는 밤에
버캐처럼 엉겨 붙는 바람소리





돼지감자


어려서 먹고 싶던 돼지감자
마루에 앉아 씹으니
밖으로 되나오네





여울


여울물 소리도
고사리 따러 산에 가더니

머리 밀고
내려오는 사미런가





진달래꽃


진달래꽃도
산에서 내려와
마당을 밟는 순간
아가의 울음소리





아가위꽃


뜰에 심어놓고
물주기 거름주기

벌레도 잡아주며
기다리기 사 오 년

캐어버리니까
활짝 피는 아가위꽃





觀瀑圖


청개구리도
폭포를 바라보며
오금이 저려





옥잠화


울 밖에선
모가지에 벌레가
기는 줄도 모르고
벙그는 옥잠화





조약돌


은하수런가
은하수런가

여울물에 씻겨
하얀 조약돌

 

해설; 작고 아름다운 인정의 세계-이숭원(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