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근옥 시집 「감을 우리며」

 이숭원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주근옥의 두 번째 시집 "감을 우리며"는 3행 내지 4행의 단시들로만 엮어져 있다. 그 시편들은 대체로 시행의 압축을 통하여 상황의 이미지를 제 시하거나 체험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그 작품의 내면 에는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스며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 보이는 압축과 생략의 방식은 감각적 기교의 일환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배면에 숨어있는 진실의 음영을 포착하려는 노력의 소산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모더니즘적 사물시의 테두리 속에서 설명하려 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의 시는 사물의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언제나 정감의 영역과 결부 지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시집 표제가 된 작품만 검토해 보아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설움도

땡감인가

소금물

독에 넣고

누나는

우립니다

-"감을 우리며"

이 시의 일차적 소재는 감을 우리는 장면이다. 감의 떫은맛을 제거하기 위해 소금물에 담가두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누나의 가슴속에 맺혀있는 설움, 혹은 더 나아가서 우리들 모두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의 감정을 연상한다. 그것은 곧 감의 떫은맛을 우려내는 일이 누나의, 혹은 우리들의 슬픔을 거두어내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사상의 전환을 통하여 감을 우리는 일상적 행위가 인간 일반이 슬픔에 대처하는 보편적 방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땡감이 떫은맛을 가지고 있듯 인간들은 누구나 설움의 한 조각씩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감을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내듯 인간 또한 자신의 설움을 조금씩 덜어내고자 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보편적 방식이다. 이 시는 짧은 형식 속에 이러한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담아내려 하였다. 시행과 시행 사이의 여백은 바로 이러한 상상과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이 시는 사물의 이미지보다 그 뒤에 가려진 정감의 영역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시에는 기발한 착상으로 하여 이미지의 신선함을 노린 작품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이미지에 중점을 둔 경우라도 거기에는 인간적 정감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의미의 여운을 통하여 삶의 문제를 제기해보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그만큼 그는 시를 삶과의 연속선상에서 수행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때로는 일상적 생활의 단면이라든가 자신의 체험을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다음의 시편들이 그러한 예이다.

1

공장에

보내놓고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질 때가지

지켜보는

누이여라

-"아지랑이"

2

얼근한 친구의 얼굴 바라보며

손바닥에 굳은 살 박힌 사연

듣고 또 들어도 끝없는 밤에

버캐처럼 엉겨 붙는 바람소리

-"숙맥(菽麥)"

3

간장을 달이며

짭짜롬 맛이 드느니

아내의 새끼손가락

-"간장"

1은 그 제목에서 연상되는 서정적 분위기와는 달리 가난한 삶의 한 단면이 제시되어 있다. 가난과 관련된 시인의 체험이 형상화된 예는 그의 첫 시집 "산노을 등에 지고"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이번 시집에서도 그러한 면모가 엿보인다. 위의 작품은 공장에 나가는 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오빠의 심정을 정황의 제시만으로 드러낸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들길을 걸어 아득히 사라지는 누이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어린 나이에 공장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누이의 처지라든가 그 누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오빠의 무력함 등과 결합됨으로써 비애와 우수의 정서를 포함하게 된다. 요컨대 가난이라는 아픈 현실을 아름다운 정경 속에 배치함으로써 그 둘 사이의 긴장과 대조가 시적 가치를 발현할 것을 노린 것이다. 평범한 듯 보이는 생활의 한 단면이 일정한 상황 내에 포착될 때 그것이 시적 윤기를 머금을 수 있음을 위의 시가 보여준다.

2의 시 역시 시인의 실체험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제목의 설정이 재미있다. 숙맥(菽麥)이란 원래 콩과 보리라는 뜻인데 이것이 전이되어 콩과 보리도 구별할 줄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 시의 제목이 재미있다고 한 것은 그 뜻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 시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즉 이 시의 내용은 고생한 친구와 술을 나누며 그의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된다는 것인데 고생담을 늘어놓는 친구나 그것을 들으며 밤을 지새는 나나 결국은 다 같은 숙맥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민첩히 대처하지 못하고 영악하게 자기 실속을 챙기지 못했으니 손바닥에 굳은살만 박힐 뿐 삶의 고통은 끝이 없다. 끝없이 닥치는 시련을 이 시에서는 "버캐처럼 엉겨 붙는 바람소리"라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고통과 시련이 닥쳐와도 속수무책인 채 술잔이나 기울이며 하소연이나 늘어놓는 자신들의 모습을 숙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시에는 현실의 불합리에 대한 철저한 인식은 없으나 착하고 순박하기만 한 사람은 결구 현실에 패배하여 숙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비인간성을 암시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갔다. 특히 제목이라든가 바람소리의 상징성이 효과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평범한 소재가 삶의 진실을 포용하게 되었고 전체적으로는 단형 시로서의 압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1, 2의 시가 시인의 체험 중에서도 어두운 면을 드러낸 것이라면 3의 시는 훈훈한 인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인정의 따스함이 삶의 궁핍이나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기도 하다. 대개 인정의 세계는 여기서처럼 가족끼리의 관계를 통하여 형상화되는데 다른 시편들에서는 대상을 의인화하여 유머러스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러한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3의 시가 제재로 삼은 것도 위의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간장을 달이는 지극히 일상적인 정경이다. 아내는 장을 달이며 새끼손가락으로 장맛을 본다. 시상의 초점은 바로 이 새끼손가락에 놓여있다. 이 새끼손가락에서 아내의 오묘한 반찬 솜씨가 나오며 알뜰한 살림 솜씨도 나오고 가정의 평화도 창조된다. 아내의 손길이야말로 가정의 화목을 유지시키는 동력이고 삶의 힘겨움을 덜어주는 온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방금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장을 오래 달여야 제 맛을 낼 수 있듯, 짜증스러운 신산의 세월을 거쳐 자신의 본분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이러한 슬기를 얻게 되는 것이며 남편 또한 아내의 진정한 가치를 상당한 시간이 경과해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의 둘째 행 "짭짜롬 맛이 드느니"는 이러한 삶의 진실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또한 장맛을 보는 아내의 손가락을 굳이 새끼손가락이라고 한 것도 자고 예쁜, 그러면서도 소중한 아내의 손길을 돋보이게 하려는 표현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시작품들은 모두 일상적 생활 속에서 소재를 취하여 그것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시적 정취를 보인 예들이다. 생활 속에서 얻어진 소박한 사례들이 오히려 삶의 참모습을 더 잘 나타내며 참모습을 찾아내려는 시인의 눈이 정직하면서도 깊이가 있을 때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성과는 사색과 관찰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사색과 관찰을 시로 전환시키려는 감각의 수련에도 힘을 기울여야 작품으로서의 성취도가 높을 것이다. 물론 주근옥 시인은 감각적 이미지의 조형에도 상당한 정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음 두 편의 작품은 정서의 색채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이미지 위주로 쓰여진 작품인데 이것을 보면 이 시인이 감각의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립문 살며시 열자

너와지붕 짓밟고 서서

살구꽃은 포효하느니

-"살구꽃"

덜 떨어진 개구리의 입

그 위엔 눈 녹는 소리

그 위엔 별 초롱초롱

-"별"

"살구꽃"은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적 전환이 돋보인다. 살구꽃이 선명한 빛깔로 피어있는 것을 포효한다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살구꽃의 양적인 풍성함과 색채의 찬연함을 함께 환기하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너와지붕 너머에 활짝 핀 살구꽃의 풍요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인은 '짓밟고'라는 다소 거친 시어를 선택하였다. 이 시어는 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는 모양을 나타내는데 적절치 못한 감이 들기도 하지만 낡은 너와지붕을 휘덮고 있는 살구꽃의 생동감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 시어는 앞의 '살며시'라는 말과 의미상의 대조적 기능을 수행한다. 즉 꽃이 핀 모양을 보려는 기대감과 가슴 설렘임이 '살며시'로 표현되었다면 기대 이상의 상태로 왕성하게 핀 모양이 '짓밟고'로 제시된 것이다. 이 시어는 '살며시'와 대조를 이루면서 한편으로는 '포효하느니'와 호응을 이루어 이의 짜임새를 튼실하게 한다. "별"의 경우에는 청각과 시각의 접합에 표현의 묘미가 있다. 즉 초봄에 우는 개구리 소리와 눈 녹는 소리와 초롱초롱 별빛이 차례로 제시되어 있는데 개구리 소리는 실제로 청각에 감지되는 소리지만 눈 녹는 서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 상상의 소리이다. 그런데 개구리 소리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눈 녹는 소리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청각 심상의 배치 다음에 돌발적으로 별이 빛나는 시각 심상을 제시함으로써 의미의 압축과 여운의 조성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단선적 추구는 이 시인의 본령이 아니다. 이 시집에 실린 전 작품을 통하여 확인되는 바 이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인정에 바탕을 둔 평화와 화해의 삶이다. 소박한 휴머니즘이 이 시인의 시정신인 것이다. 그 작고 아름다운 인정의 세계는 기발한 착상으로 대상을 의인화한 작품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그런 작품은 대체로 대상에 대한 애정이 유머 감각과 결합되어 표현된다.

햇살 쏟아지면

꽃도 연정이 얼굴도

자꾸 오므라져

-"나팔꽃"

꽃창포 속에서

새끼 오리 부리 물고

놓지 않는 달팽이

-"달팽이"

길가에

총총 선 코스모스

조금씩 밀리다가

굴러 떨어져

개울물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코스모스"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시인은 자연 대상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그 착상은 동화적인 천진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요컨대 어린이의 천진한 시각으로 사물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천진함이야말로 시인이 희구하는 작고 아름다운 인정의 세계의 필수요건이자 그 본질이다. 이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연정이라는 아이는 시인의 딸인 것 같은데 그 아이가 바로 그 천진함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햇살이 쏟아지면 눈이 부셔서 연정이가 얼굴을 찌그리듯 나팔꽃도 얼굴을 오므린다. 연정이와 나팔꽃은 천진함을 지닌 동질적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동화의 세계이다. 이러한 동화적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볼 때 오리가 달팽이를 부리에 물고 있는 상황도 역으로 달팽이가 오리의 부리를 물고 놓지 않는 것으로 수용된다. 살육과 탈취는 동화의 세계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길가의 코스모스가 총총히 솟아 있다가 개울로 기울어진 것도 대상을 의인화하여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자연들은 그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이 시들의 바탕에 갈려 있다.

동화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그이 이러한 기발한 착상은 그의 내면세계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외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도 그의 내면세계에서는 그 척박함이 어느 정도 덜어지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시선으로 그것이 감싸지기도 한다. 슬픔이나 고통이 주는 절박감도 결국에는 화평과 안식의 테두리 안에서 여과되고 용해된다. 이것은 그의 내면세계가 만만치 않은 정신의 넓이와 깊이를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깊이와 넓이가 3행이나 4행의 간략한 형식 속에 은밀히 감추어져 잇는데, 이처럼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많이 생략하고 시행의 여운을 통하여 담담히 드러내고자 한 것도 그의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된다. 또한 독자의 편에서 보면 짧은 시형식을 통하여 넓고 깊은 정신의 영역을 엿보게 되니 시 읽는 재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근옥 시인이 엮어놓은 이 작고 아름다운 인정의 세계가 더욱 충실한 결실을 맺어 모든 사람이 함께 뛰놀 수 있는 평화의 광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체험이나 가족 중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더욱 넓은 세계와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제 단형의 작품을 통하여 압축적 시상을 보여주었으니 조금 시야를 돌려서 현실적 삶의 여러 양상을 폭넓게 조감하는 자세도 가졌으면 좋겠다. 바로 그러할 때 진이도 연정이도, 이웃의 최문백이나 고생살 박힌 친구도 모두 화해롭게 악수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