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 전 홍실 역

 

형상(形相), 평면, 그리고 색채의 배열에 의하여 정서를 받아들이거나, 또는 전하는 것은 사람들이 악보의 배열에 의하여 정서를 받아들이거나 전하는 것이 그렇듯이 우스울 것이 없다. 나는 이 제언이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몇 해 전에 위슬러가 그 정도의 말을 했고, 페이터는 ‘모든 예술가들은 음악의 상태에 접근한다’고 선언했다. 내가 이것을 말할 때는 언제나 나는 빗발치듯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는 인사를 받는다. ‘그러나, 왜 이 예술은 미래파가 아닙니까?’ ‘왜 아닙니까?’ ‘왜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대체 그것은 당신의 이미지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여유 있게 그리고 훌륭한, 정연한, 예스런 산문으로 설명하겠다. 우리 모두가 기욤 아폴리네르와 함께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유해를 도처로 끌고 다닐 수는 없다’는 것을 믿을 정도로 미래파이다. 그러나 ‘미래파’는 예술 속에 들어갈 때, 주로 인상주의의 후예이다. 그것은 일종의 가속화된 인상주의이다. 피카소와 칸단스키에 의한, 입체파와 표현주의에 의한 또 하나의 예술적 가계(家系)가 있다. 누구도 신인상주의나, 또는 가속화된 인상주의와 동시성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에 전적으로 만족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사람은 다른 욕구를 가지는 것일 것이다.

동시에 세 가지 예술에 관하여 개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내가 가장 긴밀히 관련을 가진 소용돌이파 예술, 즉 소용돌이파 시의 역사를 간단히 보여준다면, 나는, 아마도, 보다 명쾌할 것이다. 소용돌이파는 그러한 그림과 조각, 그리고 운동으로 된 ‘이미지즘’을 포함하는 것으로 공포되어 왔다. 나는 ‘이미지즘’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떤 현대 회화와 조각과 가지는 내적 관계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미지즘은 적어도 그것이 알려져 있는 한에 있어서 주로 문체운동, 창조의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평운동으로 알려져 왔다. 이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출판물의 모든 가능한 민첩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예술가들의 실제적 사상에 몇 해 뒤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들이 ‘서정시체’를 시의 한 부문으로 받아들이듯이 거의 누구나 이미지즘을 시의 한 부문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음악, 순수한 멜로디가 마치 언어로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한 종류의 시가 있다. 첫 번째 시의 종류는 오래 동안 ‘서정시’로 불리어 왔다. 누구나 ‘서정시,’ ‘서사시,’ 그리고 ‘교훈시’를 쉽게 구별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누구나 극작품에서 또는 그 밖에 ‘서정시’가 아닌 장시(長詩)에서 ‘서정적’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구별은 문법서와 교과서 속에 나타나 있으며, 누구나 접해온 것이다.

다른 한 종류의 시는 서정시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비쿠스(Ibycus)와 유철(劉徹)은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단테는 이 능력으로 해서 위대한 시인이고 밀턴은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론가이다. ‘이미지’는 수사(修辭)와는 가장 촌수가 멀다.

수사는 당분간 청중을 속이기 위하여 어떤 하찮은 문제를 성장(盛裝)시키는 기술이다. 일반적 범주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해둔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설득술’인 ‘수사’와 진리의 분석적 검토를 구별하고 있다. ‘비평운동으로서의 1912년에서’ 1914년에 걸친 이미지즘은 시를 산문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자 시작했다. 현대시가 수사의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을 정도로 그렇게 공상에 빠진 사람은 없다…. 스탕달은 산문의 필요성을 그의 「연애론」에서 조리 있게 말했다.

‘시는 의무적인 비유법, 시인이 믿지 않는 신화, 루이 14세 때의 품위 있는 문체, 그리고 시적이라 불리는 장식들의 수단을 가지고 마음의 기미(機微)에 대한 명료하고 정확한 관념을 전하려 하거나, 또는 그 장르로 명료성을 본받으려 할 때는 산문에 못 미친다.’

플로베르와 모파상은 산문을 보다 훌륭한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그리고 허술한 운문 속에 자신들을 쏟아 넣음으로써 무한히 어려운 훌륭한 산문예술의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현대 시인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참지 못한다. 이미지즘의 신념조항(信念條項)은 1913년 3월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Ⅰ.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상(事象)의 직접적인 취급.

Ⅱ. 제시에 기여치 않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 것.

Ⅲ. 리듬에 관해서; 박절기의 연속이 아닌, 음악적 구절의 연속으로 구성될 것.

 

초보자에게 주는 일련의 약 사십여 개의 경고들이 뒤따르나, 그것들은 여기서 우리에게 관련될 필요가 없다. 예술들은 정말로 모종의 공통된 인연, 어떤 상호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정서들이나 주제들은 어떤 특수한 예술로 가장 적절히 표현된다. 가장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작품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다른 종류의 백 편의 예술작품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다. 하나의 훌륭한 조각품은 백 편의 시작품의 핵심이다. 훌륭한 한 편의 시는 이십 편의 교향곡이다. 백점의 그림이 있어야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이 있다.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이나 엡스타인씨의 작품들에 대한 유사물은 없다. 그러한 작품들은 우리가 ‘제1강도’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정한 소재나 정서는 예술로 적절히 표현되기 전에 그것을 가장 친밀하게, 가장 강렬하게 알고 있는 그런 예술가, 또는 그런 부류의 예술가에 속한다. 화가는 일몰(日沒)을 화폭에 옮기자면 작가보다 훨씬 더 그것에 관하여 알아야 한다. 그러나 시인이 ‘붉은 망토를 걸친 새벽’을 말할 때, 그는 화가가 제시할 수 없는 무엇을 제시한다. 「귀도 카발칸티(Guido Cavalcanti)」의 서문에서 나는 절대리듬을 신봉한다고 말했다. 모든 정서와 모든 정서의 면이 절대리듬을 나타낼 수 있는 어떤 음조 없는 구절, 어떤 리듬 구절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이러한 신념은 자유시와 음량적 운문의 실험으로 이어진다). 일종의 항구적인 은유에 대해 유사한 신념을 가지는 것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심원한 의미에 있어서의 ‘상징주의’이다. 그것은 반드시 항구적인 세계에 대한 신념은 아니나 그 방향에 대한 신념이다.

이미지즘은 상징주의가 아니다. 상징주의자들은 ‘연상,’ 즉 일종의 언급, 거의 우의(寓意)를 취급한다. 그들은 상징을 언어의 상태로 격하시켰다. 그들은 환유(換喩)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시련’을 뜻하기 위하여 ‘십자가’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구나 조잡하게 ‘상징적’일 수 있다. 상징주의자들의 상징은 1, 2, 7과 같이 산술에 있어 숫자와 같이 고정된 값을 가진다. 이미지스트들의 이미지들은 대수에서 부호 a, b, 그리고 x와 같이 변수적인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상징주의자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상징주의는 보통 감상적인 수법과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 누가 인상주의적 제시방법으로부터 많은 것을 빌리거나, 또는 그럴 수 있을지라도 이미지즘은 인상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 정의에 불과하다. 내가 ‘내면으로부터’ 심리적이거나 철학적인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면, 나는 자주 자전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술은 자신의 경험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자신’을 탐구하는데 있어, ‘성실한 자아표현’을 탐구하는데 있어 사람은 모색을 하고, 어떤 그럴 듯한 진실을 발견한다. ‘나는’ 이것, 저것, 다른 ‘것이다’ 라고 말하고, 그러한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것이기를 그만둔다. 나는 「가면(Personae)」이라는 시집에서, 말하자면, 각 시 속에서 자아의 완전한 가면을 벗어던지면서 실재에 대한 이러한 탐구를 시작했다. 나는 보다 정교한 가면일 따름인 긴 일련의 번역물을 통해서 계속하였다.

두 번째로, 나는 객관적 실재이며 그리고 복잡한 종류의 의미를 지니는 ‘귀환’ 같은, 엡스타인씨의 ‘태양신,’ 또는 부르제스카씨의 ‘토끼를 가진 소년’ 같은 시를 썼다. 세 번째로, 나는 의식 상태를 묘사하는, 또는 그것을 ‘암시하거나’ ‘함축하는’ ‘히이드의 황야’를 썼다. 한 러시아 통신원은, 그것을 상징주의 시라고 불렀다가 상징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난 후, 서서히 말했다. ‘알겠소. 당신은 사람들에게 어떤 새로운 특별한 것을 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싶어 하시는군요.’ 이러한 후자의 두 종류의 비개성적이고, 그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 은유에 관하여 말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그것은 이미지즘이며, 그리고 이미지즘인 한, 그것들은 새로운 그림들과 새로운 조각과 일치한다. 위슬러는 「젊 잖은 예술(Gentle Art)」 어디에선가 말했다. ‘그림은 트로티 베그이기 때문이 아니라, 색체의 배열이기 때문에 재미있다.’ 그것을 인정하자마자, 당신은 정글을 끌어들이고 자연과 진리와 풍요와 입체파와 칸단스키. 그리고 우리들의 운명을 끌어들인다. 위슬러, 칸단스키, 그리고 어떤 입체파 화가들은 예술에서 비본질적인 것을 추방하는데 착수했다. 그들은 문학적 가치를 추방하고 있었다. 플로베르 추정자들은 ‘주장’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90년대’에는 수사(修辭)에 대한 반대운동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물론 보조를 맞추어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함께 움직인다고 나는 생각한다.

화가는 중요한 것은 형상과 색채라는 것을 깨닫는다. 음악가들은 오래전에 표제음악은 궁극적인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거의 누구나 ‘붙여진,’ 또는 ‘의도된 의미가 있는’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보통 아주 나쁜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깨달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왕관들과 십자가들과 무지개들과 그밖에 여러 가지를 지독히 불분명한 색채로 기억하고 있다.

이미지는 시인의 안료(顔料)이다. 화가는 그의 색깔을 보거나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나는 그가 묘사적이든 비묘사적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물론 그의 작품에서 모방적이거나 묘사적인 부분이 아니라 창조적인 부분에 의존해야 한다. 그것은 시를 쓰는데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이미지를 보거나 느끼기 때문에 사용해야지, 어떤 신념이나 어떤 윤리나 경제제도를 지지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뜻하는 이미지는 우리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기 때문에 실재적이다. 이미지가 해묵은 전통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은 상징론의 전문적인 연구자에게는 우리가 불멸의 빛 속에서 있거나, 또는 그의 전통적인 천국의 어떤 특정한 정자(亭子)에서 거닐었다는 증거로 쓰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지각하거나 구상한대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브라우닝의 ‘소르델로(Sordello)’는 이때 가장 경이로운 이미지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내심 있게 이루어진 이미지즘적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항구적인 부분이 이미지이며, 나머지, 성직자들의 달력에 대한 담화와 달의 본질에 관한 토론은 문헌학이다. 천체 위의 천체의 형상, 빛이 이르는 다양한 지역들, 이마 위의 진주들의 세부장식, 이 모든 것이 이미지의 부분들이다. 이미지는 시인의 안료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 칸단스키를 적용할 수 있고, 당신은 형상과 색채의 언어에 관한 그의 한 장(章)을 옮겨다가 그것을 운문을 쓰는데 적용할 수 있다. 나는 당신들이 칸단스키의 「예술의 정신성에 관하여(Ueber das Geistige in der Kunst)」를 읽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아가겠다.

3년 전 파리에서 나는 꽁꼬르드역 전철에서 빠져나오다가 갑작스런 한 아름다운 얼굴, 그 다음에 다른 한, 그리고 한 아이의 얼굴, 그 다음에 다른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 내내 이것이 나에게 뜻한 바를 나타낼 말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가치 있어 보이거나, 또는 갑작스런 정서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어떤 말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날 저녁 레이누아르드 가(街)를 따라 집으로 가면서 여전히 고심하다가 나는 그 표현을 발견하였다. 말들을 찾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등가물이 나타났으니(말로가 아니라 색채로 된 조그만 얼룩점들로… 그것은 바로) 하나의 ‘무늬’라고 할까, 아니 ‘무늬’에 의해 그 속에 ‘반복’되는 어떤 것들을 뜻한다면 거의 무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말, 나에게는 색채로 나타난 언어의 시작이었다. 색채는 음악의 음조와 같다는 유치원의 이야기들에 내가 낯설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런 종류의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악보를 특별한 색채와 항구적으로 상응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상징에 편협한 의미를 결속하는 것과 같다.

그날 저녁, 레이누아르드 가에서 나가 화가라면, 또는 내가 종종 「그런 종류」의 정서를 가진다면, 또는 심지어 내가 물감과 붓을 얻어가지고 그것에 집착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나는 회화의, 단지 색채의 배열에 의해 말하게 되는 그림인 비묘사(非描寫)의 그림이라는 새로운 유파를 창시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형상과 색채의 언어에 관한 칸단스키의 장(章)을 읽게 될 때, 나는 새로운 것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이해한 것을 그밖에 누군가도 이해했고, 그것을 매우 분명하게 글로 써냈다고 나는 느낄 뿐이다. 상징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명한 대로 예술가가 훌륭한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데서, 또는 성모(聖母)를 그리는 데서처럼 평면의 배열이나, 또는 인물의 형태에서도 많은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같이 보인다. 사람들이 새로운 예술을 조소하거나, 또는 우리들이 서로 간에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사용하는 어색한 여러 용어들을 놀려대는 것을 볼 때, 그들이 피카소에게서 ‘얼음덩이의 특성’에 관하여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비웃을 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사고(思考)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고, 그리고 주장과 조롱과 견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그들은 즐겁다고 생각하게끔 교육을 받은 것이나, 또는 어떤 수필가가 감미로운 구절들로 말한 것을 즐길 수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구르몽이 부른바 ‘사고의 껍질들,’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이미 생각된 사고들을 생각할 뿐이다.

마치 화가가 현존하는 색상들의 이름보다 무수히 많은 안료나 색도를 가져야 하듯이, 지성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지성도 현존하는 언어의 범주를 넘어서는 필요한 것들을 가져야 한다. 아마도 다음은 그러한 말들을 나의 소용돌이로 설명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개념, 모든 정서는 어떤 본래의 형태로 선명한 의식에 제시된다. 그것은 형태의 예술에 속한다. 즉 파리에서의 나의 경험은 그림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색채 대신에 소리나, 또는 관계 속의 평면을 지각하였다면 나는 그것을 음악이나 조각으로 나나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 경우에 있어 색채는 ‘본래의 안료’이다. 나는 그것이 의식 속에 떠오른 최초의 적절한 등가물이었음을 뜻한다. 소용돌이파 사람은 ‘본래의 안료’를 사용한다. 소용돌이파는 무기력, 퇴고, 그리고 부차적인 적용물로 퍼져나가기 전의 예술이다.

한 소용돌이파 예술에 관하여 내가 말한 것은 다른 소용돌이파 예술에게로 전치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는 아마도 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내 자신의 소용돌이파 분파에 대해 계속하겠다. 모든 시어는 발굴의 언어이다. 나쁜 글이 시작된 이래로 작가들은 이미지들을 장식으로 사용해 왔다. 이미지즘의 요점은 이미지들을 장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그 자체가 언어이다. 이미지는 조리있게 표현된 언어를 넘어서는 말이다.

나는 한때 조그만 어린아이가 전깃불 스위치로 가서 ‘엄마, 불을 열까요?’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아이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발굴의 언어, 예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은유였다. 그 아이는 그것을 장식으로 사용하고는 있지는 않았다.

누구나 장식에는 넌더리가 나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모두가 하나의 속임수이고, 누구든 명석한 사람은 그것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발굴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인식의 미를 이해하고 있다. 한 중국인은 오래 전에 사람이 말해야 할 것을 열 두 줄로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입 다물고 있는 게 낫다고 말하였다. 일본인들은 하이쿠(俳句)라는 아주 짧은 형식을 발전시켰다.

 

낙화 휘날려 가지로 돌아가네:

한 마리 나비.

落花枝に歸ると見れば胡蝶かな

-荒木田守武(あらきだもりたけ, 1473~1549)

 

이것은 잘 알려진 「하이쿠」의 내용이다. 빅토 플라아는 한때 일본 해군장교와 함께 눈 위를 거닐고 있을 때, 그들은 고양이가 길을 가로질러 간 곳에 이르렀고, 그리고 그 장교는 멈추시오, 나는 시를 만들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나에게 전했다. 그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눈 위에 고양이 발자국들;

자두꽃들(같구나).

 

‘같구나’ 라는 말들은 원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분명하게 하기 위해 나는 그 말들을 첨가한다. ‘하나의 이미지로 된 시’는 중첩의 형식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 위에 포개진 것이다. 나는 지하철 정서에 의해 빠졌던 궁지로부터 빠져나오는데 그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30행의 시를 썼으나, 그것이 ‘제2강도’의 작품으로 불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파기했다. 6개월 뒤에 그 길이의 반이 되는 시를 썼고, 일 년 뒤에 다음의 「하이쿠」 같은 문장을 만들었다.

 

군종 속에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비에 젖은,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In a Station of the Metro

 

이 시에 의해 사람이 어떤 사고의 맥락 속으로 떠돌아 들어가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이런 종류의 시에서는 누구나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변형되거나 돌진해 들어가는 그 정확한 순간을 기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특수한 종류의 의식은 인상주의 예술과는 제휴된 적이 없다. 나는 그것이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상주의 예술의 논리적 귀결은 영화이다. 인상주의자의 정신 상태는 영사기와 같은 것으로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또는 그것을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영사기는 많은 인상주의 예술의 필요성을 제거해 준다.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두 가지 상반된 방법들이 있다. 우선 당신은 그를 지각이 지향하는 존재로, 상황의 노리개로, 인상들을 「받아들이는」 형성력이 있는 물질로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당신은 그를 유동적인 힘을 환경에 대항해 나가게 하거나, 또는 단순히 반사하고 관찰하는 대신에 「구상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어느 한 방법이 다른 한 방법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기질의 다양성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 두 진영은 언제나 존재한다. 1880년대에는 인상주의자들에 상반된 상징주의자들이 있었다. 이제 당신들은 소용돌이파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대체로 말해서 한쪽 진영에 모인 표현주의, 신입체파, 그리고 이미지즘과 다른 한쪽 진영에는 있는 미래파이다. 미래파는 인상주의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것은 예술운동인 일종의 가속화된 인상주의이다. 그것은 집중적인 소용돌이파와 대조되는 것으로 확산, 또는 표면예술이다.

소용돌이파는 과거의 영광을 파괴하기 위한 이러한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탈리아가 마리네티씨를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나를 부화한 달걀들 위에 품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미학원리(美學原理)에 전적으로 반대하므로, 나와 나의 의견을 같이 하는 여러 사람들이 우리들 자신을 미래파로 부를 것으로 기대 받고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과거와의 비교를 피하고 싶지 않다. 비교가 ‘전통’에 대한 개념이 4, 5세기에 걸친 그리고 한 대륙의 인습적 취향에 의하여 제한받지 않는 어떤 지적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원한다. 소용돌이파는 집약적인 예술이다. 이것에 의해 내가 뜻하는 것은 사람이 다양한 종류의 표현이 지니는 상대적 강렬성, 또는 상대적 의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가장 강렬한 표현을 원한다. 왜냐하면 어떤 형태의 표현들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보다 역동적이다. 그것들이 보다 강조적이라든가, 또는 그것들이 보다 큰 소리로 외쳐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Boolean algebra(불 대수) 등 수학의 변수와 비교해 보라.나는 내가 의미하는 것을 수학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평범하게 지적인 대학생들에게 알려진 수학적 표현의 네 가지 다른 강도가 있다. 즉, 산술적인 것, 대수적인 것, 기하학적인 것, 그리고 해석 기하학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들은 3×3+4×4=5×5나, 또는 다르게 라고 쓸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담화나, 또는 ‘평범한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실의 단순한 진술이며 어떤 다른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은 진실이다. 이것들은 모두가 개별적인 사실이다. 그것들의 밑에 깔려있는 간결성을 누구나 언급하고 싶어 할 것이다. 차례로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것은 따분한 일이다. 누구나 그것들의 대수적 관계를 과 같이 표현한다.

그것은 철학의 언어이다. 그것은 「어떠한 그림도 만들지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진술은 많은 사실에 적용되지만, ‘천국’을 움켜쥐지는 못한다.

세 번째로 유클리드를 연구할 때, 사람은 의 관계가 직각삼각형의 양변 위에 있는 사각형들과 그 사변(斜邊) 위에 있는 사각형 사이의 비율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아직도 그것을 으로 쓴다. 그러나 그는 형식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의 또 하나의 특성이나 특질이 그의 문제에 끼어든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숫자만을 다루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도 형태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직각삼각형의 사변 위에 있는 사각형은 두 다른 양변 위에 있는 사각형들의 합과 동등하다는 것에 관한 명제에서 그림이 당신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평면이나 기술기하학에 있어 진술들은 예술에 관한 이야기와도 같다. 그것들은 형태에 대한 비평이며 형태는 그것들에 의하여 창조되지는 않는다.

네 번째로 우리는 데카르트, 또는 ‘해석 기하학’에 다가왔다. 공간은(사람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평면들로 구성된 형태를 다루고 있는지에 따라서) 둘 또는 세 개의 축에 의해 분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은 일련의 좌표에 의하여 점들을 이러한 축에 귀결시킨다. 언어가 주어질 때, 사람은 「실제로 창조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의 방정식이 원을 지배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것은 원이다. 그것은 어느 특수한 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원이며 모든 원이다. 그것은 원이 아닌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벗어난 원이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부터의 해방 속에 완전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수학은 해석학에 이르기 전까지는 시시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해석학에서 우리들은 형태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접하게 된다. 이 방법으로 예술은 인생을 다룬다. 예술과 해석기하학 사이의 차이점은 소재의 차이에 불과하다. 예술은 인생과 인간 의식이 형태들과 숫자보다 더 복잡하고 재미있는 것에 비례해서 보다 재미있게 된다.

이러한 진술은 ‘자발성’과 ‘직관’에, 또는 예술에서의 그것들의 기능에 조금도 방해되지 않는다. 나는 순수 직관에 관한 나의 마지막 수학시험에 합격했다. 내가 언젠가 이미지를 본 것만큼, 또는 「활동 속의 천국같이」 느낀 것만큼 분명하게 나는 선(線)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았다.

‘해석학’의 진술들은 사실에 대한 군주이다. 그것들은 형태와 재발을 지배하는 좌품천사들이며 주천사(主天使)들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위대한 예술품들은 사실에 대한, 인류와 함께 오래 된 재발하는 기분들에 대한, 그리고 내일에 대한 군주들이다. 위대한 예술품들은 네 번째 종류의 방정식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형태가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미지’에 의하여, 나는 그러한 방정식-수학의 방정식이 아니라, a, b, c에 관한, 형태와 관계를 가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분과 관계를 가지는 「바다」, 「절벽」, 「밤」에 관한 그런 방정식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빛나는 매듭이나 송이이다. 그것은 항상 관념들이 돌진해 나오고, 통과하고, 들어가는 「소용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리고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다. 점잖게 사람들은 「소용돌이」라고 부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필요성에서 ‘소용돌이파’라는 명칭이 나온 것이다. 「명칭은 사물의 결과이다」. 그리고 아퀴나스의 그 진술은 소용돌이파의 경우에서보다 더 진실된 것이 된 적이 없다.

그것은 시에 대한 만큼 회화와 조각에도 진실이다. 와즈워드씨와 윈덤 루이스씨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과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브르체르카씨와 엡스타인씨는 ‘관계 속의 평면’을 사용하고 있으며, 기하학에서 다루어지는 종류의 평면관계와는 다른 평면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리하여 조각에서의 유기적 형태의 필요성으로 불리는 것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내가 ‘집약적 예술’에 의해 뜻하는 바를 밝혔다고 믿는다. 소용돌이파 운동은 신비화의 운동이 아니다. 하나 ‘선의의’ 많은 사람들이 심히 당황해 있음을 나는 감히 말해 둔다. 형태의 구성은 건초더미 위의 빛의 모사나 모방보다 훨씬 더 힘 있고 창조적인 행위이다. 틀림없이 형태와 색채의 언어가 있다. 그것은 책에서 어떤 기초와 색채에 부여된 어떤 의미에 의존하는 상징적이거나 우의적인 언어가 아니다.

다른 매체로 작업을 하는 어떤 예술가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간의 작품의 잘 잘못을 알고 있으니 공통의 언어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현대 예술가들의 우수성을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신념을 옹호하는 것이다. 루이스씨는 아주 훌륭한 구도의 대가이고, 그는 우리 예술에 새로운 구도의 단위와 새로운 구성방법을 가져왔다고 나는 믿는다. 그의 연속물 ‘타이먼(Timon)’은 훌륭한 작품이며, 그는 내 자신의 시대의 가장 분명한 표현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의 타이먼이 무엇이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그 옛날 연극이 무슨 뜻인지를 물음으로써 답할 수 있다. 나에게 그의 구도는 같은 주제에 관한 창조이다. 그 주제는 주변의 우둔성에 당황하여 갇혀있는 지성의 분노이다. 그것은 정서적인 주제이다. 루이스의 그림은 거의 언제나 정서적이다.

와즈와드씨의 작품은 때때로 내가 중국과 일본의 인쇄물과 그림에서 느낀 즐거움과 같은 즐거움을 준다. 예를 들면, 나는 그의 ‘카키(Khaki)’로부터 그런 즐거움을 얻는다. 때때로 그의 작품은 내가 음악, 모차르트 시대의 음악에서 누리는 즐거움에 비유될 수 있을 따름인 즐거움을 준다. 문외한이 이 새로운 작품을 재빨리 이해하고 싶어 한다면, 그는 음악에 접근하는 정신으로 하는 이상으로 서툴게 할 수 있다.

‘루이스는 바하이다.’ 아니 ‘루이스가 바하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피카소의 어떤 작품들과 루이스의 어떤 작품들이 바하의 어떤 특성이 음악에 대한 것과 같은 어떤 것을 회화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낭만과 감정과 기술로 빠져들기 전 바하-모차르트 시대의 음악은 소용돌이파적이었다. 새로운 소용돌이파 음악은 익명의 소리 조율사인 무적(霧笛) 속에 죽은 고양이들의 모방적 묘사가 아닌 화음의 새로운 수학적 계산에서 생겨날 것이다.

엡스타인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이 논문에서 소개할 필요가 없다. 브르제스카씨의 조각은 모든 진영에서 아주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어 그것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브르제스카씨는 조각적 감정을 관계 속의 질량의 감상으로 그리고 조각적 능력을 평면에 의한 이러한 질량의 정의로 정의한 바 있다. 풀어진 고리로 공기 돌 사슬을 만들 수 있고, 장군의 모자 위에 있는 깃털을 닮을 때까지 청동을 회전 가공하는 저 인내심과 수법의 결합보다 ‘관계 속의 질량’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형태의 지성에 의하여 사람이 보다 더 깊이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에첼즈시는 여전히 다소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있다. 그는 여행 중이며 여행길에 몇 점의 훌륭한 그림들을 보내왔다. 소용돌이파의 작품과 ‘내면적 욕구의 감정’이 소용돌이파에 대한 일반의 소리가 있기 전에 존재했다는 것은 아무리 분명히 해도 지나칠 수 없다. 우리들은 개별적으로 작업을 했지만 기본적인 합의를 보았다. 우리들은 함께해나가기로 결심했다.

 

(註)

나는 종종 이미지즘이나 소용돌이파의 장시(長詩)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물음을 받는다. 하이쿠(俳句)를 발전시킨 일본인들은 노(能) 극을 발전시켰다. 최상의 ‘노’ 극에서 전작품은 하나의 이미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극이 한 이미지 주위에 모아져 있다는 뜻이다. 그 통일성은 율동과 음악에 의해 보강되어 한 이미지 속에 존재하고 있다. 긴 소용돌이파 시에 반대할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어느 예술가도 그가 하는 모든 시나 그림에 소용돌이를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능력에서 벗어난다. 어떤 것들은 운율적인 표현, 또는 산문에 용납될 수 있는 리듬보다 더 흥분된 리듬 속에 표현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들은 소용돌이를 포함하지 않을지라도 얼마간의 흥미, ‘인생의 비평’ 또는 예술의 것으로서 흥미를 지닐지 모른다.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는 것은 당연하다. 소용돌이파나 이미지즘 작가는 마치 그가 순수하게 교훈적인 산문 글을 인쇄해도 당연할지도 모르듯이 소용돌이파나 이미지즘이 아닌 얼마만큼의 작품량을 내놓아도 당연할지 모른다. 미완성의 소묘와 그림들은 유사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소용돌이를 향한 시험이며 시도이기도 하다.

 

각주

327) 소용돌이파는 영국의 화가이며 소설가인 인덤 루이스(Wyndham Lqwis)가 주장한 예술 혁신운동으로 1914년 잡지 「질풍」(Blast)의 간행과 동시에 발족되었으나 단명했다. 파운드는 1914년 동료 이미지스트들과 결별하고 그 운동에 가담했었다. 이 글은 1916년 출판된 「고디어-브르체스카」(Gaudier-Brzeska)로부터의 발췌이다.

328) Ezra (Loomis) Pound(1885~1972); 미국의 시인·비평가. 20세기 영미시에 끼친 지대한 영향 때문에 ‘시인의 시인’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를 지지하는 방송을 하여 전쟁 후에 체포당해 1958년까지 정신병원에서 억류되었다.

아이다호의 작은 광산촌에서 연방 토지사무국 공무원인 위스콘신 출신의 아버지 호머 루미스 파운드와 뉴욕 시 출신 어머니 이사벨 웨스턴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경 가족은 동부로 이사했고, 1889년 6월 아버지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조폐국에 취직하면서 윈코트 근처에 정착했다. 파운드는 여기서 평범한 중산층 아이로 자랐다. 첼트넘 사관학교에 2년간 다니다가 졸업 전에 그만두고, 지방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2년간(1901~03) 다니면서 평생의 친구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를 만났다. 1905년 뉴욕 주 클린턴의 해밀턴대학에서 철학학사학위를 받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돌아와 대학원과정을 밟았다. 1906년 6월에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1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학교에서 영문학과 영문법은 물론 라틴어·그리스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독일어·스페인어·프로방스어·앵글로색슨어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가을 인디애나 주 크로퍼즈빌에 있는 워버시장로교대학의 로망스어 교수가 되었다. 대체로 그는 장로교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행동했으나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였다. 첫 직장을 곧 그만두고 1908년 2월 가벼운 짐과 적어도 한 미국 출판업자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한 시집 원고를 들고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전에도 유럽에는 3번이나 갔었는데, 1898년에는 대고모와, 1902년에는 부모와, 1906년 여름에는 혼자서 방문했다. 이때 모은 자료를 기초로 르네상스 시기 라틴 시인에 대한 〈라파엘풍 라틴 Raphaelite Latin〉과 음유시인에 대한 〈흥미로운 프랑스 출판물 Interesting French Publications〉(둘 다 필라델피아의 〈북 뉴스 먼슬리 Book News Monthly〉 1906년 9월호에 실림), 〈부르고스, 꿈의 도시 옛 카스티야 Burgos, a Dream City of Old Castile〉(〈북 뉴스 먼슬리〉1906년 10월호에 실림)를 썼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도 별로 없이 떠나 배를 타고 지브롤터와 스페인 남부를 지나 베네치아로 갔다. 1908년 6월 베네치아에서 자비로 첫 시집 〈A lume spento〉를 출판했다. 1908년 9월경에는 런던으로 가서 작가이자 편집자인 포드 매덕스 포드(그가 펴내는 〈잉글리시 리뷰 English Review〉에 파운드의 글을 실어줌)와 사귀었고, 윌리엄 버틀리 예이츠의 문학 서클에 들어갔으며, 철학자 T. E. 흄이 주관하는 현대 그룹 ‘이미지파’에 들어갔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편주)

329) 프랑스, 영국에서 활약한 미국의 화가, 동판화가(James Whistler, 1834~1908).

330) 영국의 비평가, 수필가(Walter Peter, 1839~1849).

331)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332) 러시아의 추상파 화가(Wassily Kandinsky, 1866~1944).

333) 이비코스(Ibykos; 영 Ibycus, BC 6세기에 이오니아 사모스에서 활동한 서정시인):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레기움 출신으로 훗날 그리스 비평가들이 인정한 9명의 서정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비코스는 시칠리아를 떠나 에게 해의 사모스 섬으로 가서 사모스의 참주인 폴리크라테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고대에는 그의 초기 작품이 스테시코로스의 작품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하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비코스의 현존하는 서정시 단편들에서는 뚜렷한 개성의 흔적이 엿보인다. 가장 유명한 단편들은 잘 생긴 젊은이들의 매력을 묘사한 것으로 사랑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는 늙은 시인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키케로는 그를 알카이오스나 아나크레온보다 한층 더 연애시에 몰두한 시인으로 꼽았다. 후세에 의하면 코린트 근처에서 노상 강도들에게 살해당할 때 머리 위를 지나가는 두루미떼에게 자신이 살해당한 것을 증언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나중에 강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코린트 상공에서 두루미떼를 보고 무심코 이비코스의 복수자라고 불렀는데, 이 말 때문에 결국 살인자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실러는 이 전설에서 〈이비코스의 두루미떼 Die Kraniche des Ibykos〉라는 시의 주제를 얻었다. (편주)

334) 유철(劉徹): 무제(武帝); 중국 한(漢) 제국의 권위를 크게 높이고, 중국의 영향력을 해외로 확대한 전제 황제(141/140~87/86 재위). 유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무제는 한의 제6대 통치자인 경제(景帝)의 11번째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맏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는 제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황족들은 7세인 그를 황태자로 책봉해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해주었다. 그는 친척과 스승들로부터 기본적인 사상이 상반되는 두 학파인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영향을 받았다. 도가에서는 법률 만능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편의주의적 통치를 바탕으로 한 독재적 통치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고, 유가에서는 전례(典禮)를 비롯한 여러 가지 통치 수단을 받아들여 점점 커지는 한나라 군주들의 권력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무제는 BC 141(또는 140)년에 제위에 올랐다. 초기에는 친척과 궁정신하들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BC 130년대 말에 이르자 본질적으로 방어에 토대를 둔 전임자들의 외교정책이 자신의 외교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BC 133년에 중국 북부의 국경지방을 끊임없이 침략해 중국을 크게 위협하던 유목민족인 흉노족을 공격했고, 그 후로는 제국의 영토 확장에 전념했다. 그는 병사들의 어려움보다는 전쟁의 승패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BC 101년에 이르자 중국의 지배력은 사방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중국 남부와 베트남 중․북부 지역이 한 제국에 병합되었다. 무제는 또한 흉노족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고비 사막 건너편으로 군대를 보냈지만,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한의 군대가 가장 멀리 원정을 떠난 것은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로 진군했을 때였다. BC 104년의 제1차 원정은 실패했지만, 무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비타협적 태도는 말을 얻고 싶은 욕망과 자존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의 군대는 만성적인 군마(軍馬)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가 페르가나에서 얻고자 한 말은 전쟁 도구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말들은 주로 “한혈마(汗血馬)”로 피부출혈을 일으키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피를 땀처럼 흘리는 말이었는데, 이런 말은 그에게 신비로운 의미가 있었다. 한혈마를 갖는 것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증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BC 101년에 떠난 제2차 원정대는 이 유명한 말 3,000여 필과 페르가나 왕의 목을 갖고 돌아왔다. 또한 중국과 페르가나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들도 중국에 복속되었다. 무제는 이제 중국에서 아주 멀다고 생각하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무제는 오랜 전쟁과 그 밖의 사업으로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에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 했다. 그로 인해 백성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고, 소금·철·술에 대한 국가 전매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는 심한 재정 곤란과 민중봉기에 직면했다. 국가기구에 대한 통치도 그의 경제적 통제와 보조를 맞추어 점점 더 엄격해졌다. 관료들을 철저히 감독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했고, 정상적인 관료체제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복으로 끌어들여 관료들이 그의 뜻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는 대개 자신처럼 가혹하고 엄격하며 무자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측근으로 발탁했다. 무제는 대외적으로 침략적 정책을 취했지만 유교를 정통국교로 채택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교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인물을 이상적 통치자로 여겼는데, 그는 이런 통치자의 모습에는 별로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문학적 아름다움은 높이 샀고, 특히 의례를 강조하는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형식적 의례는 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무제가 실행한 의례는 대개 2가지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의례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한조(漢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불멸을 얻으려는 무제의 끊임없는 노력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비결을 알고 있는 신선들을 소개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사람들을 여러 곳에 보내어 신선들이 살고 있는 섬을 찾게 했고, 혼령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한 궁전과 탑을 지었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그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열망 때문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무제의 마지막 4년은 후퇴와 후회의 기간이었다. 그의 제국은 더 이상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지탱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는 의심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BC 91년 한 측근이 황태자가 그를 죽이려고 마법을 썼다고 모함하자, 궁지에 몰린 황태자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결과 수천 명이 살해되고 황태자는 자살했다. 무제는 죽기 직전에 8세 된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린 황태자의 어머니인 조씨(趙氏)를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옥에 가두었다. 조씨는 “슬픔 때문에 죽은 것”으로 전해졌지만 무제는 어린 황제가 자신처럼 외척들에게 지배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내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두었고 어쩌면 아내의 죽음을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BC 87년에 죽었다. 무제는 군사적 정복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죽은 뒤 ‘무력’을 의미하는 무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행정 개혁은 중국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고 유교만 인정한 정책은 그 후의 동아시아 역사에 끊임없는 영향을 미쳤다. -한무제: 吉川幸次郞, 정연우 역, 태양문화사, 1978. Crisis and Conflict in Han China, 104 BC to AD 9: Michael Loewe, 1974. Trade and Expansion in Han China: A Study in the Structure of Sinobarbarian Relations: Ying-shih Yu, 1967. The History of the Former Han Dynasty, vol. 2: Homer H. Dubs, 1944. (편주)

335) 미국 태생의 영국 조각가이며 소용돌이파(Jacob Epstein, 1880~1959).

336) 「햄릿」에서의 호레이쇼의 말(1막 1장).

337) 1차 대전에 죽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며 소용돌이파(Henri Gaudier-brezeska, 1891~1915).

 

참조; 에즈러 파운드의 이미지스트 시학(현영민)

참조; 사상주의 시론-Ezra Pound를 중심으로(이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