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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맥문학 통권 226호, 2009. 06. 25)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 주 근옥

 

오늘날의 신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먼저 서두에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는 파롤이라고. 이 대답은 어원(語源)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신화는 파롤이다

"Of course, it is not any type."물론 신화는 그저 평범한 형식(랑그)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형식(파롤)이다. 신화가 되기 위해서 랑그는 어떤 특수 조건이 필요하다. 우리는 곧 이러한 조건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확실하게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화는 커뮤니케이션의 체계이며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화가 아마 대상이나 개념이나 관념이 아닐 것이라는 인식을 허용한다. 신화는 의미작용의 한 양식이며 일종의 형식인 것이다. 뒤에 가서, 우리는 역사적 한계와 그 형식(신화)의 사용조건을 할당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형식(신화) 안에 사회를 재투입해야 할 것이다. 물론 신화가 먼저 형식으로써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한 생각들이 신화적 대상들을 질료의 범주 속에 넣고 식별해내려는 취지로 보일 수 있다면 완전히 착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는 일종의 파롤이기 때문이며, 모든 것은 담론에 의해 운반된 공급신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메시지를 운반하는 대상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메시지를 발설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 결국 신화에는 형식적 한계가 있을 뿐이며, 질료적 한계는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신화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우주는 끊임없이 암시 속에서 번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속의 모든 대상들은 폐쇄된 침묵의 실재로부터 사회에 의해 충당되도록 열려있는 구술영역으로 통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연적이거나 아니거나 대상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방해하는 법칙이 없기 때문이다. 한 그루의 나무는 나무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 그루의 나무에 있어서 Minou Drouet란 아이가 말하는 나무는 이제 더 이상 실재의 나무가 아니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소비의 방식으로 장식되고 개조된 나무이다. 문학적 자기만족, 반항, 이미지, 간단히 말해서 순수 물질에 덧붙여진 사회적 관용의 한 방식을 지닌 나무인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동시에 표현되지는 않는다. 어떤 대상들은 한동안 신화적 파롤의 먹이가 되지만, 그때 그 대상은 곧 사라지고 다른 대상들이 그 자리에 나타나 신화의 지위를 획득한다. Baudelaire가 여성에 대해 암시했던 것처럼 암시의 근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이 있는가? 결코 없다. 우리는 아주 옛날의 신화에 대해 상상할 수 있지만, 영원한 신화란 없다. 왜냐하면 신화는 파롤 속으로 실재를 전환시키는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며, 오직 신화만이 신화적 언어의 삶과 죽음을 규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이건 현대이건 오직 신화학만이 역사적 근원을 갖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신화는 역사에 의해 선택된 파롤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결코 대상들이 존재하는 ‘자연’으로부터 솟아날 수 없다.

파롤의 이러한 유형이 곧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파롤은 구어적 파롤만으로 한정된다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파롤은 문자나 다양한 표상의 양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즉 쓰인 담론뿐만 아니라 사진, 영화, 기사, 스포츠, 쇼, 광고 등과 같은 모든 것들이 신화적 파롤의 지지자로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대상이나 유형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유형이든지 자의적으로 의미가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도전한다’는 의미를 위하여 가져온 화살표조차도 일종의 파롤이다. 사실 지각이 관련되는 한, 예를 들어, 문자와 다양한 그림들은 동일한 지각의 형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림일지라도 다양하게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즉 다이어그램은 그림보다, 복사본은 원본보다, 캐리커처는 초상화보다 더 많은 의미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이 포인트이다. 즉 우리는 표상의 이론적 양식을 오래도록 취급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실재 그대로의 표상 가운데 특정 이미지만을 선택하여 취급하고, 이 특정 이미지에는 표상에서 선택한 특정 의미만이 주어진다. 신화적 파롤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적당하게 만드는 식으로 기왕에 완성된 재료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이유는 모든 신화의 재료(그림이거나 문자이거나 어느 것이든지)가 의미를 나타내는 말하자면 표상 중에서 선택하여 지각된 이미지만을 전제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 지각된 이미지의 근원으로서의 질료를 무시해버리는 반면에 지각된 이미지를 이성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 질료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다양한 그림들이 문자보다 더 명령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림들은 분석이나 부연 없이 일격에 의미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이것이 구성적 차이를 가지고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다양한 그림들은 의미가 채워지는 순간 일종의 문자가 된다. 어휘라 불리는 문자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 담론, 파롤 등을 구어적이거나 시각적이거나 어느 것이든지 의미적 단위 또는 종합체로서 이해할 것이다. 즉 사진은 우리에게 신문 기사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파롤이 될 것이다. 만약 대상들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대상들 자체가 파롤이 될 것이다. 사실 언어관의 이러한 포괄적 방법은 바로 문자의 역사에 의해 정당화된다. 서구의 알파벳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잉카 제국의 퀴푸(Inca quipu)라고 하는 결승문자(結繩文字)와 같은 물건들이나 그림들이 상형문자로 용인된 파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신화적 파롤을 랑그처럼 취급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신화는 언어학과 동등한 일반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기호학이다.

 

기호학적 체계로서의 신화

파롤의 형식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화학은 Saussure가 약 40년 전에 기호학이라는 이름 아래 호칭했던 기호의 이 광범한 과학에 있어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신화학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Saussure 자신이, 그리고 어떤 때는 그와 독립적으로 현대적 과학탐구의 전 영역에 걸쳐서 의미의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언급했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직관적 심리학, Bachelard가 첫 번째로 제기한 문학비평의 어떤 새로운 형식은 그들에게 의미가 부여되는 한 제외된 실재로서 더 이상 오래 관련되지 않는다. 이제 의미작용은 기호학에 의지하기를 요청한다. 나는 기호학이 이 모든 연구의 관점들을 동등하게 잘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연구들은 서로 다른 내용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공통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모두 가치를 다루는 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실재를 발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러한 연구들은 실재들을 다른 어떤 것의 징표로 규정하고 탐구한다.

기호학은 형식과학이다. 기호학은 새로운 의미작용(기호)이 기왕에 있었던 기호의 내용(시니피에)을 분리하는 과정의 연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필연성과 이런 형식과학의 한계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필연성은 어떤 정확한 언어의 맥락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Zhdanov는 “우리 지구는 원형구조”라고 말한 철학자 Alexandrov를 비난했다. Zhdanov는 “지금까지 형식만이 원형적일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고 말했다. Zhdanov가 옳았다. 우리는 형식의 관점에서 구조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구조의 관점에서 형식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의 입장에서는 구조와 형식이 분리될 수 없는 종합체만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다. 만약 삶을 변화시키고자 원한다면, 과학은 삶에 대하여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완벽한 돈키호테주의, 게다가 완벽한 플라톤적인 종합에 반하여 모든 비평은 자제와 분석적 기법을 용인해야만 한다. 그리고 비평은 분석논리로 방법과 랑그를 조화시켜야만 한다. 형식주의의 유령에 겁먹지 않는다면, 역사적 비평은 무익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비평은 형식의 명확한 연구가 어느 점에서 종합성과 역사의 필연적 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의 체계는 다양한 형식 속에서 더 명확하게 규정되고 역사적 비평에 더 잘 순종한다. 이미 잘 알려진 어구(語句)에 패러디하면, 적은 수의 형식주의가 역사로부터 분리될 것이고,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형식주의가 역사에게로 귀착될 것이다. Sartre의 “Saint-Genet” 속에는 훌륭한 표현, 즉 형식적과 역사적, 기호학적과 관념학적과 같이 더 훌륭한 종합비평의 예가 존재하는가? 반면에 그 종합의 위험은 형식을 반은 형식이고 반은 내용인, 예를 들면, Zhdanov적인 리얼리즘에 의해 실현되었던 것처럼 애매한 대상들로 간주된다는 데 있다. 일단 기호학의 한계가 고정된다고 해서 형이상학적 함정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호학은 다른 과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하나의 과학이며, 기호학에 있어서의 필연성은 인접 과학의 필연성처럼 반드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과 내용이 화해하여 이룩된 결합이 그중 어느 하나를 배제하거나 형식과 내용과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접근법 위에 기초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Engels가 말한 것처럼 그러한 종합성은 특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변증법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점은 신화학과 같은 입장이다. 신화학은 하나의 형식과학인 한 기호학의 한 분야이며, 역사과학인 한 관념학이다. 즉 신화학은 형식 속의 관념을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부류이든지 기호학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두 항 사이의 관계로 호칭된다는 것을 재 언급하자. 이러한 관계는 서로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 대상들과 연결되고, 이렇게 연관되는 이유는 이러한 관계가 동등(equality)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등가(equivalence)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표현한다고 간단히 말하는 상식적인 말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만 하고, 우리는 어떤 부류이든지 간에 기호학적 체계 안에서 두 항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 항을 다루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파악하려는 것은 곧 하나의 항이 아니라 뒤의 다른 항들과 그 항들을 종합하는 상호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와 첫 번째 2개의 항을 결합한 전체로서의 기호(기호작용)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장미꽃 한 다발이 있다고 하자. 나는 그 장미꽃 다발이 열정을 의미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장미꽃과 열정만으로 동등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현재 정확하게 등가로 열정화된 장미꽃만 놓여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분석적 입장에서는 3개의 항들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열정으로 채워진 이 장미꽃은 완벽하고 정확하게 그 스스로 장미꽃과 열정으로 분해되는 것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꽃과 열정은 기호인 이 세 번째 대상을 결합하고 형성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분석적 입장에서 내가 장미를 기호처럼 [시니피앙+장미]로 혼동할 수 없다고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입장에서 그것들이 운반하는 메시지로부터 장미를 분리해낼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시니피앙은 텅 비어있고 기호는 꽉 차있는 것이다. 기호는 하나의 의미인 것이다. 예를 더 들면, 한 개의 검은 조약돌이 있다고 하자. 나는 몇 가지 방법으로 조약돌이 의미화되도록 만들 수 있다. 조약돌은 단지 하나의 시니피앙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시니피앙을 명확한 시니피에(예를 들어, 무기명투표로 결정하는 사형선고와 같은)로 꽉 채운다면, 그 조약돌은 기호가 될 것이다. 물론,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와 기호 사이의 기능적 함축(전체에 대한 부분으로서)은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분석하는 것은 무익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곧 이러한 특성이 기호학적 도식(schema)으로서 신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3개의 항들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내용이 3개의 항들에 부여될 수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예가 있다. Saussure는 특수하지만 방법론적으로 본보기가 되는 기호학적 체계(language 또는 langue)에 대해서 연구했다. 시니피에는 콘셉트이며, 시니피앙은 청각적 이미지(그것은 정신적이다)이며, 콘셉트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는 기호(예를 들어, 단어)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존재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징표 또는 표상의 성층(成層)이다. 첫 번째 항(나는 어떤 서열의 부여를 자제한다)은 행동의 명백한 의미에 의해, 두 번째 항은 잠재적 또는 실질적 의미(예를 들어, 심층의 꿈)에 의해 구성된다. 세 번째 항은 처음 2개 항의 상호관계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항들의 종합, 타협으로 잉태된, 첫 번째 항의 형식과 두 번째 항의 의식적 기능의 결합에 경제 효과적 사유로 잉태된 착행증(錯行症; 말이나 행동의 실수) 또는 신경증 안에 들어있는 꿈 그 자체이다. 우리는 여기서 필연성이 어떻게 시니피앙으로부터 기호를 식별하는가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꿈은 잠재적 내용보다 명확한 경험소여를 더 적게 소유한다고 한다. 꿈은 두 항들의 기능적 결합인 것이다. Sartre적 비평안에서 마지막으로(나는 이미 잘 알려진 실례를 제시한다), 시니피에는 주체의 원천적인 위기(보들레르에게 있어서는 모친과의 이별, 쥬네에게는 도둑이라는 호칭)에 의해 구성된다. 담론으로서의 문학은 시니피앙을 형성하고, 위기와 담론 사이의 관계는 작품을 규정한다. 그 작품이 곧 의미작용인 것이다. 물론 이 3차원적 모형은 다양한 형식 안에 상주하며, 그러나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호학이 내용이 아닌 형식의 수준에서만 다양한 결합이 이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호학의 영역은 한계가 있고, 오직 한 가지의 작용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읽기 또는 해석이다.

신화 안에서, 우리는 방금 묘사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와 기호의 3차원적 모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신화는 이전에 존재했던 기호학적 고리로부터 시작해 구성된 특수체계, 곧 두 번째 서열의 기호학적 체계이다. 그것은 단지 두 번째로 시니피앙을 만든 그 첫 번째 랑그체계로서의 기호(즉, 콘셉트와 이미지의 조합 총체)인 것이다. 우리는 신화적 파롤의 소재(언어 그 자체, 사진, 회화, 포스터, 종교의식, 대상 등등)를 여기에 다시 불러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각기 다양하지만, 그 소재들은 신화에 의해 포획되는 순간 순수 의미 기능에게 진압된다. 신화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으로서의 동일한 소재로 보일 뿐이다. 소재들의 결합은 소재들 모두가 단지 언어의 지위로 떨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알파벳을 다루든지 상형문자를 다루든지, 신화는 소재들 속에서 오로지 기호의 총계, 일반기호, 첫 번째 기호학적 고리의 마지막 항으로만 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신화는 이 마지막 항이 보다 중요한 체계 그리고 단지 한 부분의 첫 번째 항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모든 것은 마치 신화가 첫 번째 의미작용의 형식적 체계를 샛길로 이동시키는 것처럼 발생한다. 이 측면 이동은 신화분석의 정수(精髓)로서, 나는 다음의 방식 안에 그것을 표현할 것이며, 물론 이 공간모형은 단지 메타포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신화 안에는 2개의 기호학적 체계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며, 전체 3개의 항 가운데 마지막 항인 그 1개는 랑그체계와 신화체계와의 관계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언어체계인 랑그(랑그에 흡수된 표상의 양식)란 신화가 그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점령한 언어이므로 그것을 나는 대상언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 신화 자체를 나는 메타언어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는 첫 번째 랑그체계의 1차 언어에 대하여 언급하는 신화체계의 2차 언어이기 때문이다. 메타언어의 입장에서 성찰할 때, 기호학자는 더 이상 대상언어의 구성에 대해서 스스로 의심할 필요가 없다. 기호학자는 더 이상 언어도식의 세부사항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호학자는 종합항과 일반기호와 이 항이 자신의 육체를 신화에게 오직 빌려주기만 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기호학자에게 문자와 그림을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하도록 권리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기호학자가 첫 번째 랑그체계로부터 받아 계속 존속시키는 것은 문자와 그림이 기호라는 사실이며, 문자와 그림은 모두 동일한 의미 기능이 부여된 신화의 입구에 도착한다. 문자와 그림은 첫 번째 랑그체계에서와 똑같은 대상언어로 구성된다.

이제 신화적 파롤에 대해 한 두 가지의 예를 든다. 첫 번째로, 나는 Valéry의 관찰을 빌릴 것이다. 나는 프랑스의 어느 중학교에 다니는 5학년 학생이다. 나는 라틴어 문법책을 펴서 Aesop이나 Phaedrus로부터 인용된 다음의 문장을 읽는다. quia ego nominor leo(내 이름은 라틴어로 지은 “leo(사자)”이다. My name is lion. Je m'appelle lion). 나는 멈추고 생각한다. 이 진술 속에는 애매한 무엇이 들어있다. 한편, 이 문장 속의 단어들은 “내 이름은 leo(사자)이다”라는 단순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 그 문장은 나에게 분명히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 문장이 5학년 학생인 나에게 진술되는 한, 분명히 나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법적 실례는 속성의 조화에 대한 규칙의 예시를 의미한다고. 나는 이 문장이 나에게 의미하도록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 문장은 나에게 “leo(사자)”에 대해서 그리고 “leo(사자)”가 어떤 종류의 학명(學名)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진실 되고 근본적인 의미작용은 완벽한 속성조화의 실재로서 나 자신에게 떠맡겨진다. 나는 이 속성의 조화가 언어로서 동시에 등가를 이루기 때문에 특별하고 확장된 기호학적 체계로서 확인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거기에는 실재의 시니피앙이 있다. 그러나 이 시니피앙은 기호의 합계에 의해 형성된 그 자체이며, 그 자체 안에는 첫 번째의 기호학적 체계(내 이름은 “leo”)가 들어있다. 그에 따라, 그 형식적 양식은 정확하게 겹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시니피에(나는 문법적 실례이다)와 일반의미작용이 있고,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상호관계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leo(사자)”라고 하는 이름이나 문법적 실례는 따로따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실례를 들어보자. 나는 이발소에 있다. 그리고 한 권의 잡지 Paris-Match가 나에게 주어진다. 그 잡지의 표지 위에, 프랑스 군복을 입은 젊은 흑인이 눈을 치켜 뜬 채 경례하고 있다. 아마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三色旗)의 주름에 고정되었으리라. 이 모든 것이 사진의 의미이다. 그러나 순진하든지 않든지 간에 나는 이 사진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주의”라는 것이며, 자자손손 인종 차별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 성실하게 복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에는 소위 압제자에게 충성하는 흑인에 의해 연출된 열성보다 더 좋은 대답, 강력한 식민지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더 좋은 대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한 번 확장된 기호학적 체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사진에는 시니피앙 그 자체가 이미 이전의 체계(흑인 병사가 프랑스식 경례를 한다)로 형성되었고, 이 사진에는 시니피에(프랑스적 특성과 군국주의의 의도적 혼합)가 들어있고, 마지막으로 이 사진에는 시니피앙을 통해서 나타난 시니피에의 실재가 들어있는 것이다.

신화적 체계에 있어서 각 항의 분석을 마무리하기 전에, 우리는 용어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시니피앙이 신화 안에서 2가지의 관점으로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랑그체계의 최종 항 또는 신화체계의 첫 번째 항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개의 명칭이 필요하다. 첫 번째 체계의 마지막 항으로서 랑그의 차원을 나는 시니피앙이라고 부를 것이며 의미(내 이름은 “leo”이다, 흑인이 프랑스식 경례를 한다)를 가지게 되지만, 신화의 차원에서는 그 시니피앙과 의미를 종합해서 형식이라는 호칭이 사용될 것이다. 시니피에의 경우에 애매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우리는 콘셉트라는 명칭을 존속시킬 것이다. 3번째 항은 첫 번째 항과 두 번째 항과의 상호관계이다. 랑그의 체계 안에서 3번째 항은 기호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 용어를 애매성 없이 확정된 의미로 다시 사용할 수는 없다. 신화(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최고의 특색이 된다)의 안쪽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형식이 되기 이전의 이 시니피앙은 이미 랑그적 기호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나는 신화의 항을 의미작용이라고 호칭할 것이다. 이 용어는 신화가 사실 이중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보다 더 옳게 정당화된다. 이 용어는 지시하고 통고하며,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해하도록 하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한다.

 

형식과 콘셉트

신화의 시니피앙은 애매한 방식으로 현존한다. 신화의 시니피앙은 형식인 동시에 의미이며, 한편으로는 꽉 차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텅 비어있는 것이다. 신화의 시니피앙이 의미를 일으킬 경우, 그 신화의 시니피앙은 이미 독해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며, 나는 이 신화의 시니피앙을 눈으로 파악한다. 신화의 시니피앙은 감각적 실재(랑그적 시니피앙과는 달리 신화의 시니피앙은 순수하게 정신적이다)를 소유하며, 신화의 시니피앙은 풍요로운 것이다. “leo(사자)”라고 하는 이름과 흑인의 경례는 완전히 믿을 수 있다. “leo(사자)”와 흑인은 그들이 자의적으로 시니피에를 만들어내는 처분권에 충분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랑그적 기호의 종합으로서, 신화의 의미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소유하며, 그 신화의 의미는 “leo(사자)” 또는 흑인이라는 형식의 내용으로서의 역사에 귀속하게 된다. 그 의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작용(3번째 항의 기호)은 기왕에 존재했던 그 의미에 의해 구축된 것이며, 그리고 만약 신화가 그 의미작용을 포획 점령해버림으로써 그 의미가 확정되는 것과 같은 절대성이 부여되지 않았거나 신화가 의미작용을 기생적 형식인 텅 빈 공간으로 갑자기 바꿔버리지 않는다면 그 의미작용은 상대적으로 애매성을 존속시키면서 스스로 지극히 충만한 것이 될 것이다. 의미작용(기호) 이전의 그 랑그적 의미는 기왕에 완성되었고 일종의 지식, 과거, 기억, 즉 실재, 관념, 결정 등을 비교 분류하여놓은 목록을 공준(公準)한다.

랑그체계의 기호가 신화체계의 형식으로 변형될 때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는 새로이 조성된 그 상황(contingency)을 떠난다. 랑그체계의 기호는 자신을 비우고 빈털터리가 되며 내용으로서의 역사는 증발하고 오직 문자만 남는다. 신화의 독해과정에서,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로부터 신화체계의 형식으로의 변칙적 퇴행이, 랑그적 기호로부터 신화적 형식(시니피앙)으로의 역설적 치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랑그적 체계 안에 “quia ego nominor leo(내 이름은 라틴어로 지은 “leo(사자)”이다. My name is lion. Je m'appelle lion)”라는 문장을 완전하게 가두어버린다면, 이 문장은 충만함과 풍요로움과 내용으로서의 역사를 다시 발견할 것이다. 즉 나는 “leo(사자)”라는 동물로서 일정한 우리 안에 살고 있는데, 방금 붙잡혔고, 사람들은 싱싱한 암소와 젖소와 염소를 먹이로 내게 나눠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동물보다 훨씬 강하므로 나는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먹이를 독차지한다. 그 구실 중에서 가장 마지막의 구실은 “내 이름은 leo(사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의 형식으로서의 이 문장은 이렇게 긴 이야기 가운데 거의 아무것도 간직하지 못한다.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는 역사, 지리학, 윤리, 동물학, 문학 등과 같은 가치의 모든 체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새로이 습득된 빈곤은 이제 비어있는 형식을 채워줄 의미작용의 작동을 요청한다. 랑그적 입장의 시니피에인 “leo(사자)”의 이야기는 신화적 입장의 콘셉트인 문법적 실례의 영역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완전히 퇴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Paris-March의 표지 사진이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그 표지 사진이 콘셉트(시니피에)를 수용하도록 준비시키려면, 우리는 그 표지의 삽화 안에 백인보다 먼저 흑인의 일대기(一代記)를 집어넣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의 핵심 점은 신화체계의 형식이 랑그체계의 시니피에의 활동을 진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화체계의 형식은 랑그체계의 시니피에의 활동을 단지 빈약하게 만들뿐이며 랑그체계의 시니피에와의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신화체계의 형식은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를 누군가에게 처분한다. 우리는 랑그체계의 시니피에가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유예된 죽음일 뿐이다.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는 자신의 가치를 상실하지만, 목숨만은 부지한다. 신화의 형식은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로부터 자신의 영양분을 얻어낸다.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는 신화의 형식을 위하여 역사의 순간 저장소처럼,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반응하는 풍요로움으로 만들어질 것이며, 신화의 형식은 이러한 것들을 빠른 순환 방식으로 불러오기도 하고 퇴치시키기도 할 수 있다. 신화의 형식은 랑그체계의 시니피에 안에 끊임없이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만 하고 랑그체계의 시니피에 안에서 자연의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신화의 형식은 자연 안에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신화를 규정하는 랑그체계의 시니피에와 신화의 형식 사이의 끊임없이 벌어지는 숨바꼭질 놀이와 같다. 신화의 형식은 상징이 아니다. “경례하는 흑인”은 프랑스 제국의 상징이 아니다. 흑인은 너무도 당당한 인물이며, 그는 윤택하게 보이며, 충분히 노련하며, 자연발생적이고, 순결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모가 잘 길들여지고, 거리를 두면서, 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그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완전하게 껍질로 뒤덮인 프랑스 제국주의라고 하는 신화체계의 콘셉트와 한통속이 된다. 일단 만들어지면, 그는 인위적인 것이 된다.

이제 시니피에에 대하여 살펴보자. 형식 밖으로 배출된 이 내용으로서의 역사는 콘셉트에 의해 모두 흡수될 것이다. 콘셉트는 최후로 결정된 것이며, 역사적이며 동시에 의지적인 것이며, 신화가 발화되는 원인으로서의 동기인 것이다. 문법적 실례, 프랑스 제국주의는 신화의 원동력이다. 콘셉트는 원인과 결과, 의지와 행동의 고리를 재구성한다. 형식과 달리 콘셉트는 추상적 방식이 없다. 콘셉트는 상황으로 꽉 차있다. 콘셉트는 신화 안에 이식된 전적으로 새로운 역사이다. “leo(사자)”의 허명(虛名), 즉 그 상황 속으로 맨 먼저 방출된 문법적 실례는 모든 실재를 유인할 것이다. 라틴어 문법을 가르치던 어느 시대에 탄생되었다는 시간, 그 역사는 전적으로 사회적 차별의 메커니즘을 통하여 라틴어가 가르쳐지지 않은 아이들과 가르쳐진 나를 분리하여 놓는다. 이 교육적 전통은 Aesop과 Phaedrus로부터 선택된 이러한 실례의 근거가 되고, 나 자신의 언어적 습관이 인지와 본보기의 실재적 가치로서의 속성에 동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경례하는 흑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랑그체계의 시니피에는 피상적인 것이 되고, 고립되고, 빈약해진다. 프랑스 제국주의의 콘셉트로서의 의미는 프랑스의 일반 역사, 식민지적 모험, 프랑스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의 세계를 다시 종합하여 묶고 있다. 그러나 사실 콘셉트 안에 보다 더 우수한 지식을 수용하기 위하여 약간의 지식을 덜어낸다. 사실, 신화적 콘셉트 안에 담겨있는 지식은 양보되고 형상 없이 연합된 것으로 혼란스러운 것이다. 콘셉트는 곧 요약적이거나 정제된 본질이 아닌 것이다. 콘셉트는 무형적이며, 불안정하며 성운(星雲)처럼 불투명한 응결 상태인 것이다. 그 결합과 긴밀성은 무엇보다도 콘셉트의 기능에 기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신화적 콘셉트의 근본적 특성을 충당되는 것이라고 언급할 수 있다. 문법적 실례는 학생들의 일정한 집단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프랑스 제국주의는 이러한 문법적 실례를 읽는 독자에게는 호소력이 있지만 또 다른 집단에게는 호소력이 없을 수도 있다. 콘셉트는 기능에 밀접하게 반응한다. 콘셉트는 특정한 성향으로 규정된다. 이 점은 또 다른 기호학적 체계인 프로이트주의를 상기시킨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체계의 2번째 항은 꿈과 착행증과 신경증의 잠재적 의미(내용)이다. 이제 프로이트는 행동에 있어서의 2번째 서열의 의미가 진짜 의미임을 언급한다. 그 2번째 의미는 완벽한 상황에 충당되고, 심층에 내포된다. 그 심층의미는 의지적 행동으로서의 신화적 콘셉트와 똑같다.

시니피에는 몇 개의 시니피앙을 보유할 수 있으며, 언어적 시니피에와 정신분석적 시니피에인 경우엔 더욱 그렇다. 물론 신화적 콘셉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신화적 콘셉트는 무제한적이라고 할만큼 많은 수량의 시니피앙에 대하여 처분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심층구조의 속성이 같은 표층구조의 수많은 라틴어 생성문장을 발견할 수 있고, 심층구조의 프랑스 제국주의를 의미하는 표층구조의 수많은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심층구조의 콘셉트가 표층구조의 시니피앙보다 양적으로 훨씬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콘셉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을 이미지로 나타낼 뿐이다. 빈곤과 풍요는 형식과 콘셉트 안에서 역으로 균형을 이룬다. 형식의 양적 빈곤은 희박한 의미의 저장소가 되며 역사 전체를 향하여 열려있는 콘셉트의 풍요와 서로 상응한다. 형식의 양적 풍요는 콘셉트의 수적 희소와 상응한다. 콘셉트가 여러 가지 형식을 통하여 이렇게 반복되는 것은 신화학자에게는 중요한 것이며, 콘셉트의 반복은 신화학자가 신화를 해독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콘셉트의 반복은 신화의 의도를 밝히는 일종의 행동적 주장인 것이다. 이것은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용적(容積)에 일정한 비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랑그에 있어서는 이러한 비율이 균형적이며 그 단어의 한계를 초과하기 어렵거나 적어도 단단하게 결합된 것이다. 신화에 있어서는 반대로, 콘셉트는 시니피앙의 매우 넓은 공간을 펼칠 수도 있다. 그리고 역으로, 아주 미미한 순간의 형식(단어, 몸짓일지라도 주목될 만한 길이면 충분하다)은 매우 풍부한 내용으로서의 역사로 채워진 콘셉트의 시니피앙으로 이용될 수 있다. 랑그에 있어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만, 신화에 있어서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이러한 불균형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에 있어서, 착행증은 자신이 드러내는 실질적 심층구조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 아주 보잘것없는 시니피앙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화적 콘셉트 속에는 고착성이 없다. 신화적 콘셉트는 만들어지고 변경되고 분해되고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신화적 콘셉트가 역사를, 그리고 역사는 아주 쉽게 신화적 콘셉트를 진압할 수 있기 때문에 명백하다. 이러한 불안정한 성질은 신화학자들이 콘셉트에 적응된 용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한다. 이 용어는 종종 아이러니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나는 한마디 하고자 한다. 즉 신조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콘셉트는 신화의 구성요소이다. 만약 내가 신화를 해독하고자 한다면, 나는 콘셉트의 명명법을 알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사전(辭典)은 선(善)이라든지 자비라든지 온전함이라든지 인간성 등과 같은 콘셉트를 내게 제공한다. 그러나 명확하게 그 콘셉트를 내게 제공하는 것은 사전이므로, 따라서 이 특정한 콘셉트는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은 일정한 상황과 연계된 하루살이와 같이 단명한 콘셉트이다. 그때 신조어는 필연적이다. China라고 하는 단어 속에는 프랑스의 뿌띠부르주아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관념이 있는데 그 관념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관념이 아니고 또 다른 별개의 관념이다. 방울과 인력거와 아편굴의 이렇게 특이한 혼합체가 다른 단어 속에는 없고 오직 China라고 하는 단어 속에만 들어있는 “중국적 특성”인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가? 우리는 적어도 콘셉트적 신조어가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위안을 얻어야만 할 것이다. 신조어는 고감도의 비례규칙에 따라서 구축되는 것이다.

 

의미작용

기호학에 있어서 3번째 항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2개 항의 연합이며, 따라서 그 항은 매우 흡족한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할애되고, 실재적 사실 안에서 소비된다. 나는 이 3번째 항을 ‘의미작용’이라고 불렀다. Saussure의 기호가 단어(더 구체적으로 랑그체계에 있어서의 2개 항의 단단한 결합)였던 것처럼, 우리는 의미작용이 신화 그 자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작용의 특성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의미작용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관해, 다시 말해서, 신화적 콘셉트와 신화적 형식의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는 양식에 관해 잠시 성찰해야만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신화의 안을 주목해야만 한다. 첫 번째의 2개 항은 완벽하도록 명백(다른 기호학적 체계 안에서 일어난 것과는 다르다)하다. 그 중의 하나가 다른 것의 뒤에 숨는 것이 아니고 2개의 항은 양쪽 항을 포함한 바로 여기(2개의 항 가운데 한쪽 또는 다른 한쪽의 ‘여기’가 아니다)에 주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신화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신화의 기능은 왜곡(歪曲)이며,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형식과의 관계에서도 콘셉트는 결코 잠재하지 않는다. 신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무의식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물론 우리는 명료한 2가지 각기 다른 형식을 다룬다. 형식은 융통성이 없으며, 직관적이며, 게다가 광범위하기까지 하다. 형식은 종종 반복되지는 않지만, 기왕에 언어적으로 형성된 신화적 시니피앙의 자연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신화적 시니피앙은 이미 외형이 만들어진 의미에 따라서 구성되기 때문이며, 신화적 시니피앙은 주어진 질료(랑그에서와는 달리, 신화적 시니피앙은 정신적 수준에 머무른다)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구술적 신화의 경우에, 이러한 외연은 1차원적이다. 왜냐하면, “내 이름은 leo(사자)”이기 때문에. 시각적 신화의 경우에, 외연은 다차원적(중앙에는 흑인 병사의 제복이, 위쪽에는 흑인 병사의 검은 얼굴이, 왼쪽에는 군대식 경례 등)이다. 그러므로 신화적 형식의 요소는 장소와 공간적 근접으로 관계된다. 신화적 형식의 존재양식은 공간적이다. 반대로, 콘셉트는 보편적 유형으로 나타나며, 일종의 성운으로, 다소 흐릿하게 응축된 어떤 지식이다. 콘셉트의 요소들은 연합관계에 따라서 연결된다. 이 콘셉트의 요소들은 외연이 아니라 내포(이 메타포는 아직도 너무 공간적이다)에 따라서 유지된다. 콘셉트의 존재양식은 기억과 관련된다.

신화의 콘셉트를 의미에 결부시키는 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형(deformation)의 관계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신분석학의 다양한 양식과 복잡한 기호학적 체계와의 사이에 어떤 형식적 유사성이 있음을 재발견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행동의 명백한 의미는 잠재적 의미에 따라서 왜곡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화 안에서의 의미도 콘셉트에 따라 왜곡된다. 물론 이러한 왜곡은 신화의 형식이 언어적 시니피에 따라 기왕에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가능한 것이다. 랑그와 같이 단순한 하나의 체계 안에서, 결국 시니피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 이유는 텅 비고 자의적인 시니피앙이 퇴각하고 진입하는 시니피에에 대하여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 안에서는 모든 것이 랑그 안에서와 다르다. 시니피앙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충만한 시니피에(“leo”와 흑인 병사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텅 빈 형식(“내 이름은 leo이다”와 흑인-프랑스-병사-경례-프랑스 국기인 삼색기)이다. 콘셉트가 왜곡하는 것은 물론 충만한 시니피에이다. “leo(사자)”와 흑인은 그들의 역사를 빼앗기고 껍데기뿐인 몸짓으로 변한다. 라틴어 문법의 실례가 왜곡한 것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일어난 “leo(사자)”의 지시적 명명법이다. 그리고 프랑스 제국주의가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제복을 입은 흑인의 경례에 대하여 말하는 사실적 담론으로서의 1차언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은 “leo(사자)”와 흑인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leo(사자)”와 흑인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콘셉트는 “leo(사자)”와 흑인을 필요로 한다. “leo(사자)”와 흑인은 반절만 절단되고, 다시 말해서 “leo(사자)”와 흑인의 안에 내장된 메모리는 빼앗기고 실체는 남는다. “leo(사자)”와 흑인의 실체는 완고하게 남고 말없이 거기에서 뿌리를 잡고 콘셉트의 활약에 대해서 자꾸 지껄인다. 콘셉트는 실제로 시니피에를 변형시키지만 시니피에를 없애지는 않는다. 하나의 단어는 이러한 모순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 콘셉트는 시니피에를 소외시킨다.

항상 기억해야 되는 것은 신화란 이중체계라는 것이다. 신화의 이중체계는 일종의 편재성을 생산한다. 신화체계의 출발점은 종결의미에 따라서 구성된다. 공간적 메타포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공간의 근접성이 필요하다고 이미 강조했다. 신화의 의미작용은 시니피에의 시니피앙과 의미의 형식이, 대상언어와 메타언어, 명확히 시니피에를 만들어내는 의식과 명확히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의식이 번갈아 나타내는, 다시 말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일종의 회전문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나는 언급한다. 이러한 교차는 곧 애매한 시니피앙으로서, 지성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처럼 사용되는 콘셉트 안에 모아진다고 언급한다.

나는 증거가 없지만 틀림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암시가 이런 메커니즘에 대해서 미리 판단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내가 신화 안에 편재되어 있는 시니피앙이 실체적 알리바이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될 수 있다면, 나는 객관적 분석의 한계를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그 알리바이 속에는, 부정적 정체성(“나는 당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없고,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 있다”고 하는 현상과 같은)과의 관계에 따라서 연계된, 충만된 장소와 텅 빈 장소가 있다. 그러나 원래의 알리바이(소위 경찰의 알리바이)는 결말을 가지고 있다. 실재의 현실은 회전문처럼 알리바이가 회전하는 것을 어떤 지점에서 멈추도록 한다. 신화는 가치이다. 신화에는 보증할 만한 진리가 없다. 신화는 영속적 알리바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신화의 시니피앙이 항상 어느 경우에도 자기 맘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으로 신화는 충분하게 된다. 의미(콘셉트가 형식 안에 진입, 시니피에와 대립하여 작용할 때-역주)는 항상 형식을 제시하기 위하여 거기에 있고, 형식은 항상 의미로부터 격리되기 위하여 거기에 있다. 그리고 형식과 의미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갈등도 어떠한 분열도 없다. 형식과 의미는 결코 동일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식으로, 만약 내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창문을 통해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면, 나는 나의 의도를 밖의 풍경이나 유리창 틀의 유리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순간, 나는 유리 자체에 표상된 풍경과 실재의 풍경, 즉 그 2개 풍경과의 거리를 포착한다. 반대로, 유리창은 투명하게 비어있고 1개의 실재 풍경에 입체감이 있음을 포착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차의 결과는 일정하다. 유리창은 나에게 풍경을 나타내기도 하고 비우기도 한다. 풍경은 비실재적이기도 하고 실재로 꽉 채우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신화적 시니피앙 안에서도 나타난다. 신화의 형식은 텅 비기도 하고 실상으로 충만하기도 하며, 의미는 부재하기도 하지만 현존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형식과 의미의 회전문을 내가 임의로 정지해야만 할 때, 형식과 의미를 각각 구별해서 초점을 맞춰야만 할 때, 그리고 정적 해독법을 신화에 적용할 때, 한마디로, 내가 신화의 고유한 역동성을 거부할 때만, 요약해서, 내가 신화의 독자적 위치에서 신화학자의 위치로 통과할 때에만, 이러한 모순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다시 말해서 이렇게 시니피앙이 나타내는 표리불일치의 이중성은 의미작용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화가 융통성이 없는 직관(내 이름은 “leo”이다)에 따르기보다 더 많은 의도(나는 문법적 실례이다)에 따라 규정되는 파롤의 양식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의도는 융통성이 없는 직관(프랑스 제국주의? 우리의 백인 프랑스 청년들처럼 경례하고 있는 이 훌륭한 흑인을 보아라,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에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응결되고, 정화되고, 영속화되고, 부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신화적 파롤이 구성해내는 애매성은 의미작용을 위하여 2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제부터 그 결과는 “통고(通告)”와 “사실의 진술”처럼 동시에 나타난다.

신화는 명령적이고, 잡아 가두는 듯한 성격을 띤다. 이러한 성격은 역사적 콘셉트로부터 유래하고, 상황(라틴어 수업, 위기에 처한 제국주의)으로부터 직접 솟아오르는 것이다. 결국 신화는 ‘나’에게 귀착된다. 신화는 ‘나’를 향하여 전환되고, 나는 의도적인 힘에 정복된다. 신화는 확장적 애매성을 수용하도록 나에게 강요한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을 걷고 있다면, 나는 가옥들 속에서 그 바스크식 가옥이 명확한 민족적 산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건축학적 공통성과 공통적 건축 양식을 발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건축 양식에 개인적으로 관련된, 다시 말해서, 이러한 단일 양식에 의해서 나의 인식을 침해당하지 않는다. 즉 나는 나와 무관하게 바로 여기 내 앞에 있는 건축 양식만을 바라본다. 이 건축 양식은 매우 폭넓은 역사적 수준에 따라서 결정된 복합적 산물이다. 만약 내가 시골 냄새가 물씬 나는 자연촌락의 거대한 그림 속에 삽입되지 않는다면, 이 건축 양식은 나를 불러내지도 않고, 내가 이 건축 양식을 명명하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만약 내가 파리 지역에 있고, 내가 음침한 Gambetta(파리의 지하철 역) 또는 음침한 Jean-Jaurés 거리의 끝에서, 붉은 타일을 붙이거나 암갈색 건축용재를 사용하거나 비대칭적 지붕과 정면을 반자틀과 흙으로 바른 깔끔하고 하얀 오두막을 한눈에 포착한다면, 나는 마치 내가 이 대상이 바스크적 오두막이라고 명명하는 강제적 명령을 개인적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느낀다. 게다가 바스크적 특성의 본질도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콘셉트가 빈 형식에 충당된 이 모든 자연성 안에서 나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콘셉트는 동기가 부여된 의도의 실체를 나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개인적인 역사의 신호처럼, 은밀한 속내이야기와 공모자처럼 강제하기 위하여 나를 찾아 헤맨다. 이 부르는 소리는 오두막의 소유자들이 나에게 보내는 진짜 신호이다. 그리고 보다 더 고압적이기 위하여, 이 신호는 가난하게 보일 수 있는 모든 생각에 동의한다. 헛간, 외부 계단, 다락방과 같은 건축기술의 입장에서 바스크적 가옥을 정당화시킨 모든 것들은 떨어져나간다. 거기에는 간단한 지령만 남는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임기응변적이고 위협적인 지령은 매우 솔직 명백하므로 나는 이 오두막이 “나를 위하여” 오두막 자체의 역사를 역사이게 한 역사의 흔적을 모두 없애고 나의 현존 안에 솟아오른 마술적 대상처럼, 이 장소에 방금 창조된 이 오두막을 나는 감지한다.

동시에 이렇게 의회에서 대표 질의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신화로서의 파롤은 응결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 스스로 정지하고, 외면화하며, 보편적 외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신화로서의 파롤은 굳어진다. 신화로서의 파롤은 자신을 중립적이고 순결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기왕에 형식 안에 충당되었던 시니피에는 한 번 더 비융통적 콘셉트(형식 안에 진입하여 직관에 따르고 있는)에 의해 급히 쫓겨난다. 이러한 상황은 신화체계의 항인 형식의 경험적 또는 논리적 직관 안에 파롤을 가두어 놓는 일종의 억류이다. 즉, “프랑스 제국주의”가 “경례하는 흑인”에게 운명 지우는 것은 도구적 시니피앙보다 더 많을 것이 없다. 흑인은 제국주의의 명칭으로 갑자기 나를 환호하며 맞이한다. 그러나 그 순간 흑인의 경례하는 모습은 점점 두꺼워지고 유리처럼 투명해지고, 프랑스 제국주의의 확립을 의미하는 영구적 지시로 응결된다. 랑그의 표면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서 의미작용의 관행은 사실 뒤에 숨는다. 그리고 그 의미작용 위에 ‘통고’와 같은 겉모습을 부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실은 의미(새로운 파롤․콘셉트)를 마비시키고(왜냐하면 콘셉트는 무제약으로서 종잡을 수 없고 불안정하기 때문에-역주) 의미에 고정성을 제공하는 침체성과 같은 것을 부여한다. 사실은 의미를 순결한 것처럼 만들기 위하여 의미를 응결시킨다. 왜냐하면 신화는 도둑맞은 파롤인 동시에 되찾은 파롤이기 때문이다. 물론 되찾은 파롤은 도둑맞았던 파롤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롤이 되돌려질 때, 파롤은 원래의 그 자리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화적 파롤은 순간적 절도행위이며, 은밀한 속임수를 위해 취한 이 절도의 순간은 신화적 파롤 자신의 얼굴을 마비시켜 멍하게 만든다.

이제 마지막으로 검토되어야 할 의미작용의 기본요소가 남아 있다. 즉 의미작용의 동기부여를 말한다. 랑그 안에서 우리는 자의적(恣意的․무제약)임을 인식한다. 청각 이미지 tree는 ‘자연스럽게’ 콘셉트 tree를 의미한다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의 기호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의성은 아직 단어의 결합관계로부터 제한을 받기는 한다. 랑그는 다른 기호와의 유사성에 따라 기호의 한 부분을 생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프랑스어 aime(사랑하는)의 유사성에 따라 amable(무의미철자)이 아니라 aimable(사랑스러운)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 신화적 의미작용은 결코 자의성이 없다(되찾은 파롤은 마비되고 응결이 되고, 제약이 되어있으니까-역주). 신화적 의미작용은 항상 동기가 부여된 부분 속에 있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어떤 유사성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라틴어 “문법의 실례”가 “leo(사자)의 허명(虛名)”을 만나기 위해서는, 속성의 조화가 이루어진 유사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제국주의”가 “경례하는 흑인”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흑인 병사의 경례”와 “프랑스 백인 병사의 경례” 사이에 동일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기부여는 표리가 불일치한 신화의 이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화는 의미(콘셉트)와 형식 사이의 유사성 위에서 연기한다. 동기가 부여된 형식 없이 신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화 안에서 동기부여의 힘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경우에까지 가서 잠시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 내 앞에 대상이 쌓여 있는데, 그것들은 지령이 부족하여서, 나는 대상 안의 의미(콘셉트)를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아무런 사전(事前)의 의미(콘셉트)도 없는 형식은 유사성(바스크 건축 양식의 특성들 같은) 안에서 아무것도 뿌리내릴 수 없다. 신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형식이 항상 우리에게 읽도록 하는 것은 혼란이다. 형식은 모순에 의미작용을 부여하며, 모순 자체가 신화이다. 예를 들면, 이러한 현상은 상식(常識)이 초현실주의를 신화화할 때 발생하는 것과 같다. 동기부여가 없다고 해서 신화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재 자체는 우리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충분히 객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기부여의 부재는 2차의 동기부여가 되고, 신화는 재확립될 것이다.

동기부여는 불가피하다. 동기부여는 매우 단편적이다. 처음에 동기부여는 ‘자연적’이지 않다. 동기부여는 형식에 유사성을 부여하는 역사이다. 그때, 의미(시니피에)와 콘셉트 사이의 유사성은 결코 아무것도 없고 오직 부분적인 것이다. 형식은 유사한 특징들을 떨어버리고 단지 몇 가지만 선택한다. 형식은 바스크 양식으로 만든 오두막의 경사진 지붕과 눈에 잘 띄는 기둥만을 남기고, 계단과 헛간과 고색창연한 모습 등을 떨어버린다. 우리는 이보다 더 나아가 생각할 수도 있다. 대상을 모두 표상하여 완벽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신화를 배제한다. 아무튼, 그 완벽한 이미지는 오로지 완벽성 자체만을 포착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회화(繪畵)의 경우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저 수준의 회화는 전적으로 여백(餘白)을 메우거나 완벽하게 만들어진 신화 위에서 기초된다. 이렇게 완벽한 이미지로 만들어진 신화는 모순으로 만들어진 신화의 경우와 정반대이며 대칭적이다. 여기서, 형식은 “부재(不在)”를 신화화하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그냥 남겨둔다. 그러나 일반적인 신화는 빈약하고 불완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의미(시니피에)는 지방질을 이미 빼고 의미작용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캐리커처와 혼성곡(混聲曲)과 상징처럼. 결국, 동기부여는 다른 가능한 이미지들 가운데서 선택되는 것이다. 나는 경례하는 흑인 이외의 수많은 시니피앙들을 프랑스 제국주의에 아주 쉽게 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한 장군이 외팔이 세네갈 병사에게 훈장을 달아주고, 한 노수녀가 병들어 누워있는 아랍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고, 백인 학교의 교장이 흑인 아이들을 친절히 가르치는 것과 같은 모습 말이다. 신화적 시니피앙의 재고가 무진장하다는 사실은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언론이 증명한다.

신화적 의미작용의 자연성은 사실 하나의 특별한 직유에 따라서 쉽게 시사될 수 있다. 신화는 표의문자만큼 자의적이다. 신화는 순수한 표의문자적 체계로서, 신화의 형식이 아직은 표현된 콘셉트에 따라서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상이 가지고 있는 그 신화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 모두를 선택하여 덮지는 못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표의문자는 콘셉트와 점점 멀어지며 소리와 결부되기 시작하고, 따라서 신화의 마멸(磨滅)은 신화적 의미작용의 자의성에 따라서 인식될 수 있다. 마치 의사의 소매 끝에서 Moliére(1622~1673, 프랑스의 극작가)의 작품 전체가 발견되는 것처럼.

 

각주

1)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1980): 프랑스의 언어학자. 롤랑 바르트는 소르본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한 다음에, 파리에서 고등학교선생을 했다. 이후 그는 부카레스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대학 강사를 하며 보냈고, 1952년 그는 파리의 국립과학센터(프랑스어: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의 연구원이 되었다. 1953년 근대문학의 형성을 다룬 「영도의 글쓰기 Le Degré zéro de l'ériture」가 출판됐고, 1957년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기고문을 모아 엮은「신화론 Mythologies」이 뒤따랐다. 1962년 바르트는 파리고등실업연구원(프랑스어: 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의 연구책임자로 임명됐다. 1960년대 그는 기호학(영어: semiology)과 구조주의(영어: structualism)에 전념했지만(「기호학원론 Éléments de sémiology」(1964), 「유행의 체계 Systéme de la mode」(1967)), 곧이어 구조주의를 폐기했다(「S/Z」(1970), 「텍스트의 쾌락 Le Plasir du texte」;1973). 다재다능하여 연주도 하고 그림도 그렸던 롤랑 바르트는 「오브비와 옵투스 L'Obvie et l'obtus(1982)」에서 슈만(독일어: R. Schumann)과 톰블리(영어: C.Y. Twombly)를,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1982)」 에서 사진을 다루었다. 1976년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프랑스어: Collége de France)의 문학기호학 교수로 초빙됐다. 바르트의 다방면의 작품들은 고유한 발전과 현실적 위치를 끊임없이 성찰한 결과들이다(자서전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1975)」와 대담집 「목소리의 결정 Le Grain le la voix. Entretiens 1962~1980(1981)」 참고). 그는 사후에 출판된 「작은 사건들 Incidents(1987)」에서 동성애를 고백했고, 1980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저서로는 「영도의 글쓰기 Le Degré zéro de l'ériture(1953)」, 「신화론 Mythologies(1957)」,「기호학원론 Éléments de sémiology(1964)」, 「유행의 체계 Systéme de la mode(1967)」, 「기호의 제국 L'Empire des signes(1970)」, 「텍스트의 쾌락 Le Plasir du texte(1973)」,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R. B. par. R. B. Paris(1975)」,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1977)」, 「강의 Leçon(1978)」,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1980)」, 「목소리의 결정 Le Grain le la voix. Entretiens 1962~1980(1981)」, 「Essais critiques III. L'Obvie et l'obtus(1982)」, 「Essais critiques IV. Le Bruissement de la langue(1984)」, 「기호학의 모험 L'Adventure sémilogique(1985)」, 「작은 사건들 Incidents(1987)」,「전집Œuvres complétes(1993~1995)」 등이 있다. (역주)

2) 신화라는 단어의 무수하게 다른 의미가 이것에 반하여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단어가 아닌 실체로 규정하려고 한다.

3) "Of course, it is not any type:," "Naturellement, ce n'est pas n'importe quelle parole." 이 문장을, “롤랑 바르트,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연구소 역, 「현대의 신화」, 바르트 전집 3, (서울: 동문선, 1997), p. 264. “물론 어떤 파롤이건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와 롤랑 바르트, 정현 역,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 (서울: 현대미학사, 1995), p. 15. “물론 신화를 이루는 빠롤이 어떤 종류의 빠롤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번역한 것과 비교해 보라.” (역주)

4) quipu: quipo라고도 씀. 잉카 제국에서 계산할 때 사용한 도구. 하나의 긴 끈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48개의 제2의 끈을 묶어 늘어뜨리고, 제2의 끈에 다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된 제3의 끈을 매단 것이다. 끈을 매듭지어 단단위·10단위·100단위를 나타냈으며, 왕실용은 노끈의 색깔을 달리하여 공물·토지·생산물·의식 및 전쟁과 평화 등 다양한 국가 업무를 나타냈다. 퀴푸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보전되었으며 판사, 사령관, 대가족의 수장 등과 같은 수도 쿠스코의 고위 관리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지휘관과 마을의 수령들도 퀴푸를 사용했다. (역주)

5) Andrei Alexadrovitch Zhdanov(1896~1948): 1939년이래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로서, 문화·이데올로기의 여러 문제에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여, 알렉산드로프의 철학사,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 등의 음악, 발가의 경제학 등에 대한 조직적 비판의 중심이 되어 활약하였다. (역주)

6) Georgii Fyodorovich Alekxandrov(1908~1961): 러시아의 철학자. 1928년부터 공산당원이 되어 1955년 당중앙위원후보가 되었다. 1947년 그의 저서 「서유럽 철학사」가 즈다노프를 중심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로부터 서유럽 편중적이라 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저서를 발표하였는데 「변증법적 유물론(1954)」이 대표작이다. 1947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장이 되었으며, 1954~1955 말렌코프 치하에서 문화상을 지냈다 (역주)

7) “생 주네(Saint Genet; 1952)”는 “도둑 일기”의 작가 주네의 평전(評傳)이다. (역주)

8) 사회적 현상을 규제하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무수한 의례(儀禮)의 실체는 고사하고, 광고와 국가 홍보와 라디오와 일러스트레션의 발전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빠르게 기호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어느 하루를 가정하자. 실제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분야가 얼마나 많이 스쳐지나갈까? 거의 없을 것이며, 어떤 때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여기 내 앞에 바다가 있다고 가정하자. 물론 바다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변에는 얼마나 많은 기호학적 소재들이 널려있는가? 깃발, 슬로건, 간판, 의복, 그을린 피부, 등등은 나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9) 단어라는 개념은 언어학에서 가장 많이 전개되고 있는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단어라는 개념을 순수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10) Tel Quel, Ⅱ, p. 191.

11) Sininess는, 아마 Sinity가 아닐까? 마치 Latain/Latinity=Basque/x, x=Basquity의 의미가 되는 것처럼.

12) 나는 스페인을 예로 들었는데, 프랑스에서 뿌띠부르주아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바스크적 오두막의 신화적 건축양식이 번성했기 때문이다.

13) 바스크 지방(바스크어: Euskal Herria, 프랑스어: Pays Basque, 스페인어: País Vasco)은 피레네 산맥 서부에 있는 지방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 걸쳐 있다. 바스크어를 쓰는 바스크인이 산다. 인구는 2006년 기준으로 약 300만 명이고, 중심 도시는 빌바오(Bilbao)다. 바스크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으며, 역사적으로 824년 세워진 나바라 왕국만이 피레네 북부의 양쪽을 다스리는 나라였다. 나바라는 산초 3세 때 영토가 가장 컸으나, 1035년 그가 암살당한 뒤 분열되었으며, 1234년 이후 왕위를 잇지 못하여 외국의 가문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18세기부터 주민 일부가 바스크어를 사용하고 독자적 문화를 고수하는 등 민족주의 성향을 띄기 시작했다. 1933년 바스크 자치주가 탄생하지만, 1960년대 프랑코 독재 정권이 이를 탄압하여 망명 정부가 되고, ETA(Euskadi Ta Askatasuna, 바스크 조국과 자유)가 등장해 분리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시작한다. 1979년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나 독립을 요구하며 투쟁을 계속 하고 있다. 2006년 스페인 정부와 영구 휴전을 선언했으나 2007년 이를 파기했다. (역주)

14) 아래 도표를 참고하기 바람. (역주)

15)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신화를 교란시키는 것은 분명히 형식에 동기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만약 랑그로서의 ‘health'라는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의 존재는 사실에 입각한 자의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를 넌더리나게 하는 것은 의사자연(擬似自然)에 의지하여 의미화 되고 생산된 신화가 자연스럽게 보이는 외관의 유용성으로 치장된 대상들처럼 형성되기 때문이다. 자연을 통해 의미작용을 보증하려는 의도는 일종의 혐오감을 야기한다. 신화는 너무 풍부하다. 그리고 신화가 초과시키는 것은 신화의 동기부여이다. 이러한 혐오감은 ‘자연’과 ‘반자연’ 중에서 선택하기를 거부하는 예술 앞에서 느끼는 기분과 같다. ‘자연’을 이상적인 것으로 ‘반자연’을 실리적인 것으로 볼 때 말이다. 도덕적으로 볼 때,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일종의 비열한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