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현대문학에서의 미니멀리즘(Minimalism in Contemporary French Literature)

 

워런 모트(Warren Motte)

주근옥 역

 

(게시일: 2011. 11. 11. http://www.poemspace.net/)

(두레문학 통권 제13호, 2012 후반기, 2012. 12. 01, 통권 제14호, 2013 후반기, 2013. 12. 01)

(조선문학 통권 제307호, 2016. 11.01, 보정본) (조선문학 통권 제308호, 2016. 12.01, 보정본)

(조선문학 통권 제309호, 2017. 01.01, 보정본) (조선문학 통권 제310호, 2017. 02.01, 보정본)

(조선문학 통권 제311호, 2017. 03.01, 보정본)

 

우리는 이 "Small Worlds"를 금가기 쉬우며 변덕스럽고 ‘유약한’ 그리고 지각의 또 다른 저항자를 추종하고 있는 사물(things)이라고 지시한다. 우리는 이 사물의 물리적 크기에, 다시 말해서 그것의 총체지속성(duration), 그 향기의 강도 또는 그 한계에, 그 망상에, 그 의미작용에,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의 자질 또는 그 구조의 단순-천진난만함에 초점을 맞출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해석적 변동의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것은 다소 단순-천진난만한 노르마(norm)와의 관계 안에서 환원(reduction)의 변덕으로 존재한다. 그 환원을 강력히 요구하는 예술은 구성적 소인(素因, principle)으로서의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처음에 조형예술의 경향과 동정(同定)되었다. 원래 뉴욕의 맨해튼에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그 운동은 칼 앙드레(Carl Andre), 댄 플래빈(Dan Flavin), 도널드 쥬드(Donald Jude), 솔 르윗(Sol LeWitt),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멜 보히너(Mel Bochner), 토니 스미스(Tony Smith),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 그리고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와 같은 인물이 포함되었다. 얼마 후에, 존 케이지(John Cage), 그리고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실험에, 라 몽트 영(La Monte Young), 테리 릴리(Terry Riley),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와 같은 젊은 작곡가에, 그리고 조형예술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유사한 환원과 후소(後素)적 반복(repetition)의 기교를 개척하고 있었던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에 의해 고무된 음악비평가들이 출현했다. 따라서 용어 미니멀리스트의 음악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문학에서, 우리는 표현의 경제적-유기적 방향의 충격이 이른바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로부터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에 이르는 회귀현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글쓰기의 ‘학파’로서의 미니멀리즘은 미국 소설에서 극히 최근에 이르러서야 동정(同定)되었을 뿐이다. 킴 헤르친저(Kim Herzinger)에 의하면, 그 핵심 그룹은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 앤 비티(Ann Beatti), 프레드릭 바슬미(Frederick Barthelme),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 토비아스 울프(Tobias Wolff), 그리고 보비 앤 메이슨(Ann Mason)이다. 때때로 미니멀리스트로서 인용된 또 다른 작가는 엘리자베스 탤런트(Elizabeth Tallent), 데이비드 레빗(David Leavitt), 에이미 헴펠(Amy Hempel), 리처드 포드(Richard Ford), 그리고 제인 앤 필립스(Jayne Ann Phillips)이다(Herzinger, “minimalism as Postmodernism” 73). 보다 더 최근의 니콜슨 베이커(Nicholson Baker)의 작품은 미니멀리스트의 아이스테시스(aesthetic)의 분명한 예를 제공한다.

다음 작가들의 경향으로 미루어 볼 때, 나로서는 미니멀리즘이 미국의 예술에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가 다른 문화의 지평도 흔들어댄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유렉 베커(Jurek Becker), 나탈리아 긴츠부르크(Natalia Ginzburg),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알프 맥라후린(Alf MacLochlainn),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막스 프리슈(Max Frisch), 그리고 리아 루프트(Lya Luft)와 같은 여러 국적의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 안에서 유약함(the small)을 불러일으키는 그 간원(懇願)을 가지고 있음을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현대(contemporary) 문학에서의 미니멀리즘은 현저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사실, 우리가 만약 파스칼(Pascal),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 라 퐁텐(La Fontaine), 그리고 라 브뤼예르(La Bruyère)와 같은 신고전주의적 작가의 간결함 상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 사뮈엘 베케트 같은 최근의 선각자의 문체론적 간결함 상에 반영한다면, 오늘날 프랑스에서의 미니멀리스트들의 글쓰기는 미국적 등가물의 그것보다 더 존경할 만한 혈통이라고 공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작가는 아주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다 그런 건 아니다) 출판사 미뉘에서 출간했다. ―이를테면, 마리 르도네(Marie Redonnet), 장 필립 투생(Jean-Philippe Toussaint), 장 에슈노즈(Jean Echenoz), 에르베 기베르(Hervé Guibert), 에드몽 자베(Edmond Jabès),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파트릭 로지에(Patrick Roegiers), 자크 쥐웨(Jacques Jouet), 알리나 레예스(Alina Reyes), 크리스티앙 오스테르(Christian Oster), 마리 은디아예(Marie NDiaye), 자크 세레나(Jacques Serena), 엠마뉘엘 카레르(Emmanuel Carrère), 올리비아 타흐괄라(Olivia Targowla), 베르나르-마리 콜테스(Bernard-Marie Koltès), 아니 자덱(Annie Zadek), 유진 사비츠카야(Eugène Savitzkaya), 마르셀 코엔(Marcel Cohen), 크리스티앙 가이이(Christian Gailly), 엠마뉴엘 베른하임(Emmanuèle Bernheim), 프랑수와 봉(François Bon), 레슬리 카플란(Leslie Kaplan), 피에르 미숑(Pierre Michon), 이자벨 레베스크(Isabelle Lévesque), 앙투안느 볼로딘느(Antoine Volodine), 파트릭 드비유(Patrick Deville), 장-미셀 베퀴예(Jean-Michel Béquié), 다니엘 메뫄르(Danielle Mémoire), 엠마누엘 아들리(Emmanuel Adely), 알렌느 르느와르(Hélène Lenoir), 에릭 쉬비야르(Eric Chevillard), 그리고 마크 르 보(Marc le Bot)와 같은 작가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그 저자들이 그들 글쓰기 안에서 형식적 경제적-유기적으로 개척한 모든 소인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소유한 바로 그러한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저하게 다른 방식과 다른 단계를 개척했던 것이다. 작품의 실체에서 보면, 미니멀리스트들의 충격은 다른 일반작품에서 보다 명백하게 드러난다. 더 나아가, 어떤 작가(예를 들면, Echenoz)의 작품 안에서의 어떤 텍스트는 다른 작품보다 경제적-유기적인 것의 소인을 보다 강렬하게 불어넣는다. 그는 미니멀리스트 저자들 중에서도 그러한 정도가 더욱 우세하지만, 사실 기본적인 형식적인 면에서 그들과의 유사성이 매우 강력하게 존재한다. 이 연구에서, 나는 그들 작품에 접근하며 그들의 다양성을 개찬(改竄)함 없이 그들의 형식적인 유사성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시도로써, 나는 미니멀리즘이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된 그 방식을 고려하겠으며, 발견된 그 방식에서의 그 고찰을 일부 동정(同定)하려고 시도하겠다. 그때 나는 예술 비평과 음악학에서의 속성적인 레벨로 형식화되었던 그 안에서의 방식을 보고하겠으며, 이러한 소인 안에서 학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약간의 이론적인 모델에 중점을 두고 고찰하겠다. 결국, 나는 최근의 미국 소설에서의 미니멀리즘의 임계상태의(critical) 작품으로 돌아올 것이며, 그때 그 예가 현대(contemporary) 미니멀리즘의 배경 작품이라는 것을 보증하는데 조력하는 프랑스 문학에서의 약간의 열쇠가 되는 텍스트를 간략하게 고찰할 것이다. 이러한 도입을 통하여, 그것은 문학을 위해 생산될는지도 모르는 일종의 실제적인 의미라는 것을 애써서 결정하는 그 미니멀리즘의 비화(秘話)와 부적절함을 훌훌 벗겨내려고 하는, 나의 의도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저서의 주요 부분에서 고찰할 것인 축어성(逐語性)의 형식적인 유사점을 고찰할 충분히 명확하고 정밀한 임계상태의 구성을 정련하고 싶다. 더불어 그들의 편차에 순응하는 데에도 충분히 유연하게 대처해 나갈 생각이다.

케네스 베이커(Kenneth Baker)가 언급한 것처럼, “이 'minimal'이란 말은 예술에서 어느 문체론적 간소함을 지시함으로써 오늘날 엉성하게 사용되고 있다(9).” 범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다음의 경우와 같다. 즉,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보다 덜 생산적인 것으로 표현된 그래서 매우 느슨한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변덕은 무언가 의미하기 위하여 어떤 단계에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매우 의미심장한 한계를 소유함으로써, 제약의 바로 그 착상이 미니멀리스트의 충격의 중심에 있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게 됨으로써, 특히 그것이 즉각적으로 표현됨으로써, 어쨌든 그 이유로 인하여 미니멀리즘을 마치 잉태한 것처럼 마음속에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원래 제약된 인간의 지식과 힘이 잠재적이라고 하는 그 자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많은 현대(contemporary)의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 안에서 발견하고 있는 그 소인 그 자체로서의 제약을 이끌어내고 있는, 그 변덕을 임의적이면서도 사실인 것처럼 연기하도록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미니멀리즘에 대한 검토는 그 용어의 기본적인 각각의 구성 원소에 귀속시키고 있는 그 제한된 숙려의 보편적인 용어로, 제약하는 것이 유용하다.

이러한 원소의 최초의 지각 그리고 가장 명확한 지각은 관입(貫入)으로 인하여 유약함(the small)의 변덕으로 존재하게 된다. 내가 앞에서 제안했던 것처럼, 'small'은 불안정한, 변덕스러운 말이며 항상 관계적이고, 화맥(context)에 크게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에워싸고 있는 것과 함께 대비하여 대상을 대당(對當)적으로 측정하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나아가, 이것의 용법은 접근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특별한 방식으로, 불확실한 양식(fashion)으로 그리고 어떤 말더듬으로, 이 유약한 사물에 접근한다. 그러나 이와 동일한 특징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 유약한 사물에 접근하는 것은 아마 보다 더 큰 사물을 선택하는 그 접근보다 더 밀접할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조각가이자 행위예술가이며, 비평가인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보다 더 밀접한 접근의 그 숙려가 교리(敎理, faith)의 일종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그는 지각의 개성적인 성질에 대한 보증을 이 유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그는 “친밀성의 성질은 사물 자체의 관계 안에서 그 크기가 축소됨으로써 충분히 언외지언으로 순행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대상에 부착된다. 보편성으로 공준된 그 성질은 사물 그 자체의 관계 안에서 증식된 크기로 일치함으로써 부착된다(230).”고 언급한다.

미니멀리즘의 또 다른 소인은 단순-천진난만함(simplicity)의 착상이다. 여기서 다시 그 용어를 불러내 보면, 우리는 다른 노르마의 다양성과 대조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순-천진난만한 사물은 복잡성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복잡함 또는 계략이 전혀 없는, 윤색이 없는, 영향을 받지 않는, 명료함으로 존재한다. 또한 우리는 사물이 실제 그 자체로 보이는 것보다 더 “자연적인 것”으로 존재한다고 느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단순-천진난만한 사물은 겉보기에는 속임수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며, 한편 이 예술적 공허(vacuity)에 대해 비난이 있는 것도 숨길 수 없지만, 그 공허를 떠맡고 있는 어느 미니멀리스트를 기다리고 있는 그 공허의 위험성이 서스펜션의 일종으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망상으로 존재하지만, 그 미니멀리스트의 아이스테시스는 공허 그 자체를 에피스테메의 가치로 안정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 공허는 에피스테메를 회피하고 공허를 회피하는 숙려과정의 그보다 상위의 표층효과로, 그리고 본질적인 것에 접근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서 관습적인 수사학을 일소하려고 하는 것으로 의도된 그래서 인식론적으로 폐포(閉包)된 그 제한으로 존재한다.

유약함과 단순-천진난만함은 어느 미니멀리스트의 그 떠맡음을 위한 열쇠와 같은 말투를 분명히 하고 있는 감소의 변덕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 확장의 착상은 망상과 동등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서 미니멀리즘의 기초적이며 이론적인 패러독스가 출현하게 된다. 중명사(中名辭)의 환원을 통하여, 미니멀리스트들의 희망은 확장의 효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패러독스와 같이, 이러한 착상은 아마도 크레도(credo)처럼 보다 좋게 형식화된 것일 것이다. 이 운동가로 잘 알려진 사람 존 바스(John Barth)의 언급에 의하면(즉, 잘 알려진 미니멀리스트로서), 경구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는 미니멀리스트의 아이스테스를 캡슐에 넣은 것처럼 선택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는 오늘날의 아이스테시스적인 담화 안에서 그러한 고찰이 깜짝 놀랄 만한 대중성을 즐겼다고 지적한다. 먼저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에 의하면, 그 경악의 대중성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라슬로 모호이너지(Laszlo Moholy-Nagy), 앙리 고디에 브르제스카(Henri Gaudier-Brzeska),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르 코르뷔제(Le Corbusier), 그리고 미스 반 데어 로에(Luswig Mies van der Rohe)와 같은 여러 사람의 덕분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광범하게 이루어진 그 분포는 그 자체가 그 고찰의 힘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로 존재한다. 따라서 존 바스의 고찰, 그가 명확히, “예술가적인 효과는 예술가적인 중명사의 본래부터 타고난 경제적-유기적인 것에 의해 강화되었는지도, 더 나아가 그러한 극도의 절약이 다른 가치, 예를 들어 완벽함, 풍부함 또는 진술의 정밀함과 같은 가치를 포괄하였는지도 모른다.”고 한, 그 고찰은 미니멀리즘의 기본적인 독트린의 핵심을 오려내어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A Few Words" 1).

환원과 제한의 기교는 방식의 다양성으로 미니멀리스트들의 투기에 광채를 더한다. 앨런 리퍼(Allen Leepa)는 미니멀리스트들이 주장하는, 그들이 성취하기를 기원하는, 효과의 성질을 보다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것으로(언외지의적인 것으로) 그들에게 투자하고 있는, 이들 원소에 농축되는 것을 허용하는 예술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정수(整數, 완전체, integers)로 환원(약분)하고 있는, 그것을 제안한다(202). 구센(E. C. Goosen)은 표현에 있어서 타성적인(mannerist) 모드에 반작용하고 있는, 은유와 같이 수사학적인 것을 파괴하려고 하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없애려고 하고 있는 의도를, 미니멀리즘으로 보고 있다(168). 그러나 분명히, 수사학적인 것의 그 공을 들이는 제한은 수사학적인 제스처, 새로운 매너리즘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을 묘사하고 있는 숙려, 그 자체로 다시 말해서 그 안의 언외지언으로 존재한다. 환원시키고 있는 그 의도가 여러 가지 다른 언외지언의 형식을 선택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해럴드 로젠베르크(Harold Rosenberg)는 그것이 동일함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그 자체로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것은 언외지언의 효과 그 자체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고찰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만약 환원에 대한 미니멀리스트의 제스처가 조정(措定)적 판단으로 보인다면, 그것을 동기화하고 있는 그 숙려는 보다 쉽사리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 자체로 연기해내는 표상적 본질에 접근하는 그 욕망을 통하여 증류와 농축의 조심스런 변화과정으로 그것을 추론할 것이다. 그때 명백히 미니멀리즘의 철학적 태도는 그에 걸맞게 본질주의자가 된다. 니힐리즘으로 미친 듯이 날뛰는 것보다, 환원적인 경향은 일종의 결정(結晶)된 충만으로 농축된 하나의 기원으로서의 본질주의자가 된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필연적으로 휴지를 제공하는 현저하게 반직관적인 변덕으로서의 교리(less is more)의 그 미니멀리스트의 말하자면 갑작스럽게 목격하게 된 흘레와 같은 그 급변(leap)과 직면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그 갑작스런 흘레를 목격하게 될 수만 있다면, 그 유약한 사물은 풍부하게 의미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의 문학에 대해 언급하면, 아서 샐츠먼(Arthur Saltzman)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환원의 문제에 시선을 향하고 있다. 즉, “이러한 각각의 소설은 감소라기보다 오히려 농축을 강조하는 미니멀리즘의 정의에 공헌한다(431).” 더 나아가 구센은, 환원주의는 예술가적인 복잡함을 말하자면 공공적인 면에서 전진적으로 보다 더 좋게 마법을 푼 것으로 발산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 요구의 내용은 점점 더 정직한, 언외지언적인, 예술의 순수한 경험, 어느 예술의 음(陰, minus 또는 negative)의 상징, 음의 메시지, 음의 개성적 표출이었다(169).”

2개의 차원과 관련된 사건, 그 직접성과 단순명쾌함은 여기서 망상으로 존재한다. 또는 오히려 그들은 표현된 최초의 경우로서의, 관자놀이-시간적인(temporal) 텀으로서의, 제2의 관자놀이-공간적인(spatial) 텀으로로서의, 동일 사건으로 고찰될는지도 모른다. 미니멀리스트의 제스처는 생산과 수용의 변화과정 안에서 찰나의 아이스테시스적인 양의연동(兩儀連動, engagement)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칼 앙드레(Carl Andre)의 연재 조소(彫塑)필립 글래스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작품은 질의응답 중에서 질의 차원과 형식으로, 그리고 은유와 그 밖의 다른 전통적․수사학적 비유 없이 연주되는 그런 톤(tone)으로 상정(想定)된다. 그들은 그렇게 중재되지 않은 것처럼 존재하는 경험의 소인 안에서 그냥 구경꾼이 되기를 제안한다. 사물의 심장에 직접적으로(언외지의적으로) 다가가는 그 의도는 오늘날의 많은 예술가들과는 달리, 다시 한 번 미니멀리즘의 본질주의자적인 정향(定向, position)을 증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미니멀리스트들은 사물이 심장을, 핵을, 중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의 위험은 잉태와 같은 이원성(twofold)으로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미니멀리스트들이 표상하는 것 그 자체가 의미심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순명쾌한 것으로 표현된 그 작품이 인위적이지 않고 그저 평범한 것으로, 간단히 처리되어 외관만 보이는 것으로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니멀리스트들이 그 물체의 심장으로 보는 그 진술이 어떤 관측자에 의해 자명한 것으로 고찰되어 그 물체의 외관을 거부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명백함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그 질문은 현대(contemporary) 미국소설에서 미니멀리스트의 전통으로 빠르게 확립되었으며, 사실 비방자의 작품에서도,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그 명백함이, 즉 미니멀리즘의 소인적인 주체뿐만 아니라 소인적인 제한이 존재한다(Saltzman 423).”

단순-천진난만함의 변덕은 본래부터 내재한다. 만약 채택된 주체와 채택된 접근이 단순-천진난만하다고 한다면, 그것이 미니멀리스트의 진취적 정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니콜라스 세로타(Nicholas Serota)와 리처드 프랜시스(Richard Francis)에 의하면, 그 대답은 이렇다. 미니멀리즘은 예사로운 일로서의 망상을 재투자하고, 우리가 매일 겪는 그 시시콜콜한 경험으로 나타나는 그 진부함 또한 중재될 만하고, 언외지의적인 것으로 음미될 만하다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한다는 그 사실 안에 존재한다고. 즉, “언외지의적인 경험을 단호히 강조하는 바꿔치기의 술책에 의하여, 미니멀리즘의 예술은 리얼리티의 성질(nature)에 대해 명료한 진술을 하게 된다.” 그렇게 출현된 천진난만함은 엄밀한 초점 맞추기의 결과로, 착란의 제거로 존재한다. 그것은 단순-천진난만하거나 그러한 것도 공허한 것도 아니고, 에누리 없거나 우직하거나 불명료한 것도 아니다. 미니멀리즘은 가치의 목류를 재분류한다. 그것은 일상의 경험을 심연의 경험으로 위치를 정하게 한다(7).

“명료한 진술”의 변덕은 망상을 십자형의 변천(crucial passage)으로 또는 피신탁의 교차점(fiduciary)으로 존재케 한다. 미니멀리즘은 물자체 그 자신을 위하여 명료함의 가치를 안정시킨다. 그리고 그레고리 바토크(Gregory Battock)가 지적한 것처럼, 그 명료함은 미니멀리스트 예술의 열쇠가 되는 지수가 된다("introduction" 32). 사실, 명료함은 중명사의 미니멀리스트적 환원이 확장으로 의도된 것이다. 명료함의 약동성은 3가지 레벨에서 연출된다. 첫째, 그 주체는 어쨌든 폐포된 초점으로서의 물자체를 끌어당긴 그 변화과정 안에서, 동정되고, 일화와 사건의 내용이 발가벗겨진다. 둘째, 그 표상적인 담화는 극소점으로 환원된다. 격상(格象, figure)의 잘라냄과 생략, 그것의 통사론은 명석하게 확장되고, 문제가 없게 확장되고, 따라서 투명한 의미가 된다. 끝으로, 반영의 뚜렷한 제스처 안에서, 미니멀리스트의 예술은 예술 그 자체의 성질에 대하여, 그것의 사용과 가능성에 대하여, 명료한 진술을 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표현적 명료함을 위한 탐색은 프랑세스 콜피트(Frances Colpitt)가 미니멀리즘의 “축어(逐語)적임의 성벽”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렇게 설명했던 그쪽이 크게 도움이 된다(36). 거기에는 미니멀리스트의 작품(artifacts)에 대해 깜짝 놀라게 하는 본질(quiddity)이 존재한다. 야훼(Yahweh)와 포파이(Popeye)처럼 그들에게는 무언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 로버트 모리스, 바바라 로즈(Barbara Rose)가 언급한 것을 옮기면, “사물은 아마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다른 “중명사(mean)”로 상정(想定)되지 않을 것이다. 즉, 그것은 그 자체보다 다른 어떤 것의 암시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A B C Art" 291).” 또한 그 주객치환응집(the quest)은 많은 미니멀리스트 예술의 작가 익명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조력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포기했던 것(장식, 윤색, 사칭)은 개성적 스타일의 보다 명백한 효과를 평소대로 자연스럽게 선택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익명은 결국 미니멀리즘의 분별적 성질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특징 때문에 그것은 또한 미니멀리즘이 헤매게 되는 위험의 하나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술이 개성적 진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개성적 관련성과 예술가의 특이한 상상력을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것과 동정될 만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미니멀리스트의 작품(artifacts)은 순간마다 쳐부수고 있는 이 변덕에 뻔뻔스럽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니멀리즘이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폐포하는 그 자체를 그 스스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라고 제안하며 유인하는 프랑세스 콜피트의 숙려의 일종이 될는지도 모른다(127). 그러나 나는 미니멀리스트들이 예술에 대한 착상을 불안정하게 수용한 어떤 효과 안 예기의 우리의 지평에서 아찔하게 연기하고 있는, 술이 깬 것처럼 침착한 것과 함께 위태로운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폭 넓히기와 우리의 정의적인 노르마의 기운회복을 성취하게 하는 것을, 그리고 예술의 술책을 위한 신 공간을 그러한 방식으로 갖추게 하는 것을 의도한다.

비록 우리가 미니멀리즘의 예술적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위험이 잔존한다. 전통적 스타일리스트의 효과와 환원주의자들의 책략(tactic)이라고 하는 그 전개의 회피는 장르의 간벌(間伐)을 내함(內含)한다. 즉, 미니멀리즘의 대상이 인지할 수 있는 외형적 스타일로 해체되면(은유와 같은 수사학의 방식으로 만들어지면), 그것은 소정의 장르 안에 그것을 자리 잡게 하기가 보다 더 어렵게 된다. 따라서 아무 색채나 장식이 없어 삭막한 미니멀리즘의 작품은 외형의 변화가 전혀 없으면서도 어느 한 장르에서 다른 장르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실제적인 위험이 수반됨에도 불구하고, 그 환원주의자의 자세는 미니멀리즘을 그것의 어려움이 형상(shape)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르는 추론의 화맥 안에서, 가치와 신앙의 견고한 체계로 산출한다.

이제 나는 조형예술과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스트들의 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고찰하고, 그들의 보다 더 두드러진 특징을 동정(同定)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암시될는지 모르는 이들 모델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에 의해 제안된 이론적인 모델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겠다. 그 모델은 이 운동이 이론으로, 다시 말해서 해석의 어느 효과를 필연적으로 길들인 숙려로, 가득 채워진 그들의 시발(inception, ab quo)로부터 기인되는 한에 있어서는, 보다 좋은 망상의 모든 것으로 존재한다.

프랑세스 콜피트는 조형예술을 다음과 같이 미니멀리스트의 학파라고 정의한다.

 

미니멀리즘의 예술은 1960년대 미국에서 실현된 추상적인, 기하학적인 회화와 조소라고 기술한다. 소인(素因)을 조직하고 있는 그 우월성은 사건의 최소량 또는 복합적 묘책을 써서 만들고 있는 직각, 사각형, 정육면체를 포함한다.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검은색의 회화는 1959년대에 개관된 미술관에서 모던 아트의 16명의 미국인이 이미 보여주었던 것이며, 반면에 로버트 모리스의 변화과정-지향적(process-oriented) 작품과 마이클 하이처(Michael Heizer)의, 사물의 고정의미의 종말을 표시하는 최근 60대에 만든 토공(土工)-작품은 그 이후의 1960년대에 추상적, 반-복합적, 물질적 대상에 철학적 실행(commitment)을 공유했던 이 예술가들에 포함되는 것으로 한정된다(1).

 

이 미니멀리스트의 운동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에 의해 맨해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조각은 선택의 중재자(medium, 영매)가 되었다. 기묘하게도 미니멀리스트의 조각의 경향은 원래 이전의 화가(Craig-Martin 10)의 작품에 있었던 것이었다. 예술가들의 대부분은 비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동료 칼 앙드레, 로버트 모리스, 댄 플래빈, 멜 보히너, 로버트 스미드슨 그리고 마르샬 레스(Martial Raysse)와 같은 인물들의 작품에 대한 호의의 글쓰기와 약동적으로 연동된 그 운동 안에 포함되었다.

기교와 영감의 기본적인 공통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의 작품은 만연한 예술의 노르마, 특히 그것의 중명사(중재자, means)에 대해 드러내놓고 힘차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니콜라스 세로타와 리처드 프랜시스의 언급에 의하면, “그들은 'minimal'이라고 별명을 붙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예술가들은 그들이 제작한 작품과 함께 중명사와 물체를 최소(minimum)로 환원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5).” 수용의 변화과정을 거침으로써, 미니멀리스트들은 작품과 구경꾼 사이의 조우에 극적으로 특권을 부여하고 있는, 조망(眺望) 경험의 망상(the importance)을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즉, “미니멀리즘의 예술은 인간의 지각이 그들을(사실과 망상을) 함께 불러들이고 있는 그 관점에서―경험하고 있는 것 그 자체 현상의 마술의 관점에서, 관찰했던 그 사물에 대한 관찰자와 관계하고 있는 하나의 효과로 존재한다(Leepa 201).” 다른 많은 아방가르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미니멀리즘은 급진주의(radicalism)를 예술가적 진술로 안정시켰다. 이러한 급진주의는 전통적 노르마를 임계상태(critique)의 단계에 올려놓았던 그런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스테시스의 변경으로 밀고 나갔다.

발단부터, 이 운동은 금욕주의에 깊이 감화되어 있었다. 칼 앙드레에 의하면, 미니멀리즘은 예술가적 본질에 보다 더 밀접하게 농축시키기 위하여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을 제거하여 명료히 하는 것의 물질의 사태로 단순-천진난만하게 존재한다. 즉, “예술은 필연적이지 않은 것을 제거한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미니멀리즘의 오로지 진실한 의미로만 존재한다.” 미니멀리즘이 흔히 떠올리는 다른 이론적 논쟁은 본질의 변덕으로부터 발생한다(그리고 불확실한 것으로 존재한다). 물질성의 문제와 물질에 대한 확고한 전념은 다음 관점의 경우로 존재한다. 즉, 미니멀리스트들은 사물의 “객관적 실재성(thingness)” 안에서 거의 신화적인 교리로 그 느낌을 드러낸다. 특이한 방식으로 묘사한 환상(illusion)의 어느 형식보다 오히려 직설법의 축어(逐語)적인 것, 객관(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의 조건(objecthood) 상의 그들의 강한 의지는 유사 본질주의자들의 입장을 간증처럼 증명한다(Colpitt 101).

뉴욕 미니멀리즘의 기원에 대해 쓴 그녀의 논문에서, 바바라 로즈는 두 명의 선각 인물, 카시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을 동속으로 인정한다.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흰색 바탕의 검은 사각형(흔히 1910년대 러시아 최초의 절대주의 예술운동의 작품과 동일시하는, 흰색 바탕의 단순하고 검은 사각형)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병 걸이(bottle-rack ready-made)”는, 오늘날 예술의 양극성, 즉, “한편으로는 확실히 내재하는 것, 보편적인 것, 절대적인 것의 탐색,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가치에 대해 전반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그녀가 제안했던 것을 대표하게 될는지 모른다("ABC Art" 275).

그들의 투기의 기본적인 유사성이 별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미니멀리즘 안의 그 방식이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유사하면서도 서로 모순된 그들의 아이스테시스를, 성공적으로 통합하고 화해시키면서 그들의 양극단을 회복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이러한 투시도 안에, 유사성의 관점이 나타나게 된다. 카시미르 말레비치마르셀 뒤샹 두 사람은 예술의 핵심에 대한 진술을 공리로 간주하는 노력으로 그것의 인습을 거절하고 벗겨내는, 서구 예술의 전통의 과격하고 진취적인 태도를 채택했다. 바바라 로즈의 견해에 의하면, 위 두 사람에 의해 사용된 환원주의적인 책략은 미니멀리즘의 운동에 매우 중요하게 활기를 불어 넣는다. 만약 다른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의 결정이 포기했던 마음 안에 존재하는 망상으로 존재할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부분은 예술 대상과 일반 대상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서 아주 독특한 변덕의 망상일 것이며,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부분은 복합되지 않으면 안 되어 포기했던 망상의 변덕일 것이다("ABC Art" 277).”

케네스 베이커의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의 이중영향의 자취는 그가 미니멀리스트 탐구의 두 도정(道程)으로 보고 있음을 지시한다. 한편으로는, 도널드 쥬드, 론 블래이든(Ron Bladen), 그리고 토니 스미스(Tony Smith)의 불모의 조각이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표지(Piet Mondrain의 조각과 마찬가지로)를 분명하게 증언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칼 앙드레, 도널드 쥬드, 댄 플래빈, 그리고 로버트 모리스에 의해 제안된 그 “주조(鑄造, found)” 대상이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병 걸이(bottle-rack ready-made)”로부터 영감을 많이 얻어냈음을 증언해준다(9~10).

바바라 해스켈(Barbara Haskell)은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와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를 보다 최근의 선각자로 동정하였는데, 두 사람은 1958년의 전시회에서 일상의 대상(everyday objects)을 포함시켰다. 프랑세스 콜피트와 같이, 바바라 해스켈 또한 이들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초기 뉴욕의 미니멀리스트들에게 망상으로 존재했던 바로 그러한 것을 포함했던 추상적 표현주의(expressionism) 그 임계상태를 제안하고 있는,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검은 회화에 대해 언급한다(12, 92). 보다 범박하게 말해서, 프랭크 스텔라 그 자신의 미니멀리즘의 이러한 충격은 예술에서 후소(後素)적 반복(repetition)을 행하며 이전의 것을 수정하는 일종의 변화과정이다. 즉, “그 작품들은 항상 보다 단순-천진난만한 회화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망상이 발생되어 한데 묶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 회화가 추상적 표현주의 같이, 또는 초현실주의적인 것 같이 복잡하게 되었거나, 하여간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복잡한 회화를 그려내는 것이 아닌 어떤 무엇, 다시 말해서 단순-천진난만한 것이 되려고 하는 어떤 무엇, 바로 그러한 것이 되려고 한다(Glaser 148). 케네스 베이커는 미니멀리즘의 반응적인 개성의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면서, 뉴욕의 미니멀리즘을 고전주의와 로맨티시즘의 공경할 만한 경쟁 그 안에 위치시킨다. 즉, “모던 서구 예술의 개요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미니멀리즘은 로맨티시즘의 풍만함과 1950년대 추상적 표현주의자의 회화의 자화자찬에 반대하는 고전주의적인 반응처럼 보인다(13).” 프랑세스 콜피트와는 다르게, 케네스 베이커는 이 운동의 뿌리가 미국인에게 있다고 믿는다.

 

뉴욕의 미니멀리즘은, 셰이커교도(Shakers)의 가구(家具)와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실용주의 철학의 특징으로 나타난, 명백한 사실과 명백한 언급을 준수하는 그 미국인의 명백한 전통 안에서, 찰스 실러(Charles Sheeler)의 정밀주의 회화 안에서, 토머스 에이킨스 (Thomas Eakins)의 ‘과학적’ 사실주의 안에서, 그리고 폴 스트랜드(Paul Strand)워커 에번스(Walker Evans)의 사진 안에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메리엔 무어(Marianne Moore)의 시 안에서, 보다 더 통절하게 정곡을 찔러 그 기원을 명시했다.

 

용어 미니멀리즘의 기원은 어떤 논쟁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프랑세스 콜피트에 의하면, 지시어 "minimal art"는 어느 독단적인 것으로도 보증될 수 없다. 다비트 부를리우크(David Burliuk, 1882~1967)에 의하면, 1920년대 후반, 작용 중명사의 최소량으로부터 그것의 명칭을 이끌어낸 존 그레이엄(John Graham)이, 이러한 예술 운동을 미니멀리즘 운동이라고 호칭했다고 한다. 60대에 진술한 대부분의 다비트 부를리우크의 그 언급은 1965년 1월에 출간된 미학자(aesthetician) 리처드 월하임(Richard Wollheim)의 저서 「Minimal Art」안에 있다(3). 보다 더 확실한 것은 니콜슨 베이커가 다음과 같이 진술한 것이다.

 

단어 "Minimalism"은 개성이 강한 러시아 태생의 미국인 예술가 존 그레이엄에 의해, 지금 사용되고 있는 사물의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할 목적으로, 1937년에 처음 제안된 하나의 예술 용어이다. 그 다변의 핵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정의의 폭발을 제공했던, 파리에서 출간된, 도발적인 그래서 새로이 생긴 그 저서의 궤도를, “예술의 체계와 변증법(System and Dialectics)”이라고 호칭했다. 즉, 이렇게 언급했다. “미니멀리즘은 근본원리를, 추상적인 변화과정의 회화의 논리적인 의도를, 발견하려고 하는 그 목적을 위한 최소량의 구성요소로 환원하는 것이다. 회화는 미수정(未受精)의 변하지 않는 표층을 가지고 출발하며, 만약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초고감도의 무한대를 다시 명백한 불변의 표층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작동시키만 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통해 잉태처럼 생생하게 만들어진 그 변화과정과 경험에 의해 매우 풍성하게 만들어질 것이다(17~18).”

 

그러나 그 용어의 기원에 대한 혼란은 다비트 부를리우크가 1929년 논문 목록에서 존 그레이엄의 저서에 대해 언급했을 때, 미니멀리즘을 사용하는 효시(嚆矢)였는지도 모른다고 했던 각주의 진술처럼, 니콜슨 베이커의 고찰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은 다비트 부를리우크가 존 그레이엄으로부터 차용한 것인지 또는 그 반대인지 니콜슨 베이커가 결론을 내리고,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최초의 단어 'minimalism'에 대해 누가 발언했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것이 기술하는 그 충격은 일반적인 것임이 분명하고, 예술사에서 까다로운 것으로 상기되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환원주의자의 경향과는 달리, 오늘날 미니멀리즘의 실재적 특정성은 예술 그 자체의 엄격한, 완고한 임계상태로 존재할는지 모른다. 그것은 뉴욕의 미니멀리즘이 아방가르드의 현상이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망상으로 존재한다. 다른 아방가르드 운동처럼, 미니멀리즘은 그 자신을 전통예술과 대당(對當)으로, 시종일관 다루기 어려운 임계상태의 담화의 흐름을 언외로 지시하는 쪽으로, 정의했다. 페터 뷔르거(Peter Bürger)는, 그것은 사실 체계적 양상 안에서 그것의 역사와 그것의 기본공리에 신호(응답지령)를 보내기 시작하는 아방가르드의 강림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예술의 자율(autonomy; 비논리적 표현)을 신중하게 부정하면서 그 자신을 옹호한다. 그리고 아방가르드의 예술작품은 진짜 문제가 된 “예술의 결합작용(work of art)”의 변덕으로 나아가게 한다(47, 55). 페터 뷔르거에 의하면, 그 예술작품은 그것의 임계상태적인 차원을 통하여 그것의 중명사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그것은 마르셀 뒤샹의 "Ready-Mades"가 의미를 만들고 있는 범주 “예술의 결합작용(work of art)”을 지시하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마르셀 뒤샹이 그의 특징을 다량생산으로 나아가게 했을 때, 임의로 대상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그들을 전시회에 출품하였을 때, 이러한 예술의 도발은 예술이 존재하는 것의 신개념(concept)을 전제로 한다. 그가 "Ready-Mades"라고 지시하는 그 사실은 카테고리 “결합작용(work)”에 대한 명료한 암시를 담고 있다. 그 결합작용을 입증하는 그 특징은 보편적 개체, 그리고 다량 생산된 대상에 첨부된 진기함(신개념) 양쪽으로 존재한다(56).

 

이러한 투시도법의 관점에서 보면, 미니멀리스트 예술의 특징인 거절의 행위는 최초에 보았던 것보다 분명히 광대한 것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광대함에도 불구하고 미니멀리스트들은 문체를 수사적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의 명백한 효과를 회피할 뿐만 아니라, 망상의 단계, 다시 말해서, 그 위에 부가된 특권과 명예처럼 그것이 전통적으로 진술되는 것으로서의 ‘예술’의 바로 그 환상적 착상마저도 회피한다.

일종의 포기인 이러한 제스처는 뉴욕 미니멀리즘 안 어디에서든지 나타난다. 바바라 로즈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내가 언급했던 그 예술은 분명히 거절과 포기의 부정적인(negative) 예술로 존재한다(ABC Art 296).” 미니멀리스트 작품의 바로 그 문체론적 적나라함과 표출 형식의 빈곤(poverty)은 관찰자에게 충격으로 해석되고, 관찰자가 그 구성적 변화과정을 반성하도록 만든다. 소정의 예기에 대한 관찰자의 평범한 지평에서 보면, 이러한 종류의 작품과 직면했을 때 관찰자의 반응은 처음에 복합적인 것이 간섭했던, 환원의 가혹한 약동을 통하여 그것에 얽히고설킴의 네거티브 필름 막을 붙였던, 어떤 무엇의 모습으로 반드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미니멀리스트 예술의 임계상태적인 성분의 대당적인 성격은 명료해진다. 미니멀리스트들은 예술의 여백으로부터 방사되어 상처를 입히는 임계상태에, 십자형의 변천적인 책략이 거절과 환원으로 존재하는 임계상태에, 동화하고 있는, 반증의 수사적인 힘에 시종일관 의지한다.

 

세계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꾀했던,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엄숙한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꾀했던, 그 선험의 우주론체계에 기초된 예술을 거절함으로써, 도널드 저드와 다른 미니멀리스트들, 케네스 놀런드(Kenneth Noland)프랭크 스텔라 같은 사람들은, 기하학에 의해 주어진 그리고 그것을 구조에 투자하는 관계적 ‘구성’을 요구하지 않는, 대칭 형식의 아종적인 대상 안의 의미심장한 표현을 발견하려고 하는, 다시 말해서 애초부터 배척했던 그 큰 요구로부터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탐색했다. 도널드 저드의 부분의 환원은, 목류의 관계적 망상(importance)을 환원하는 것으로, 그리고 전체 안으로 망상을 삽입하여 증가시키고 있는 것으로, 하여간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을 배치시키는데 필요했던 목류의 총량을 환원했던 것이다(Campbell 30).

 

미니멀리스트의 임계상태의 강한 추세는 표상과는 대립적으로 지시된다. 미니멀리즘은 대상이 기술하는 것보다 오히려 대상 그 자체 안에 가치를 재배치시킨다. 사실 바바라 로즈가 지적한 것처럼, 미니멀리스트의 조형예술의 영광(靈光), 색, 선, 공간, 그리고 축척(縮尺)은 말로 기술한 것보다 더 사실적이다(New Aesthetic 11~13). 이러한 개념의 틀 안에서, 미니멀리스트들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간극에 다리를 놓고 있는, 기호현상(semiosis)의 독단적인(arbitrary) 성질을 반드시 회복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예술가들은 전통적 표상이 도산(倒産) 되었다는 것을, 인습과 노르마가 쉽게 조장하고 있는 것이, 즉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에 흘레붙는 것이, 의미의 적당하거나 결과적인 것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절히 느낀다. “그들의 소원은,” 바바라 로즈에 의하면, “그렇게 이미지에 이동된 관계로 지탱되지 않는 대상을, 투기된 것보다 오히려 직접 언외로 실현된 대상을, 말로 기술하거나 묘사한 것 보다 오히려 더 많이 생성된 대상을, 만드는 것이다.” 라고 한다(New Aesthetic 18). 따라서 그들은 사물의 본질(quiddity)을, 대상 그 자체의 “객관적 실재성(thingness)”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미니멀리즘은 형식을 위해 깊이 연동된 주객치환응집(quest)으로, 조망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미니멀리스트 조각의 경우, 이것은 특히 명백하다. 왜냐하면,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가 언급한 것처럼, 대상의 형상은 대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119). 이것은 다음처럼 보다 더 공고한, 보다 구성적인 의미로서의 진리인 것이다. 즉, “대상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그 물체는 표현하지 않고, 외관으로 의미하지 않고(signify), 또는 어느 것에 비추어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것 그대로 ,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존재한다(Fried 143).” 조각은 중재(또는 유성 파열자음으로서의 中音, media)의 관점에서, 미니멀리스트들이 기원하는, 그리고 예술가적 독자사성을 역시 성취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의 동정(同定)을 연상하는 것을 기원하는 예술가에게 많은 가능성을 의심 없이 제공한다. 매우 과격한 미니멀리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 그 자체에 맞춘 초점은 열린, 중재되지 않은 경험과 함께 관찰자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수용된 화술(narrative), 은유, 그리고 비유의 흔적을 모두 깨끗하게 지운 예술가에 의해 고의로 앞으로 나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칼 앙드레의 작품을 위한 그의 요구가 독해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러한 투시도법 안에 존재한다. 즉, “나의 작품은 아이스테시스적이며, 물질적이며, 상생주의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스테시스적인 것은 초절적(超絶的)인 형식 없이, 정신적인 또는 지식적인 성질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그것은 다른 물질로의 진위가 애매한 가식 없이 그 자체의 물질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생주의적인 그 형식은 모든 인류에게 동등하게 그리고 쉽게 접근하는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Bourdon 107).”

후소(後素)적 반복은 많은 미니멀리스트 조형예술의 특색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그 반복상적 소인이 그 자체를 어떻게 표출시키든지 간에(순열 배치적인 구조로든지, 또는 연속 효과로든지, 하여간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확장의 소인과 신중히 대당이 되게 만들어지며, 그리고 그것은 항상 체계적으로 전개된다. 멜 보히너는, 사실상 12음(serialist)으로 존재하는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예술작품을 지배하는 논리로서의 체계의 그 변덕에 대해 지적한다.

 

체계적인 사유는 일반적으로 예술가적 사유의 안티테제로 존재한다. 체계는 조직화, 면밀함, 그리고 제작과정에서의 반복에 의해 성격이 만들어진다. 그들은 꼼꼼하다. 그것은 일관성(또는 조화, consistency)과 그들의 성격을 만들고 있는 선형사상(線形寫像; application)의 연속으로 존재한다. 체계의 개성적인 부분은 원래 망상이 아니지만, 오직 그러한 방식으로만 관련되어, 전체 안에 동봉된 논리로 사용된다(94, 99).

 

병치(parallels)의 탐색에서, 그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푸가의 기법(Art of the Fugue)”을, 그리고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에 의해 이루어진 작곡법을 환기시키고 있는, 음악에 의지한다. 그는 12음적인 조형예술과 같은 보편성으로서의 이러한 작품은, 사전에 매우 엄격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논리의 선형사상(線形寫像; application)과 제작기법에 기초된 예술의 편애로서의 개인적 결정의 착상(은유와 같은 수사적 기법과 환상적 기법)을 거절한다고 주장한다(100). 이러한 종류의 기교는 작품의 객관주의적 경향을, 특징(개성)이 없는 성질을, 다시 말해서 그들이 조각 형상의 체계적 순열(permutation)을 포함하든지, 또는 파르타인 발렌(Fartein Valen)의 12음조, 즉 개성적 예술가의 말이 돌리는 자아틀과 같이 틀에 박힌 그 생각(whim)보다 오히려 더 좋게 발견된 작품의 그 체계로 추정될 수 있는 작곡법의 효과의 수학적 수열(progression)을 포함하든지, 하여간 어떤 것이든지 간에, 보다 상위의 인식론적 위치로 앙양시켜 고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다 적게 표출될는지 모르는 그것은 잉태처럼 마음속에 떠올리는 편린의 생각 안에, 애초부터 엄밀한 테제 안에서 작업이 이루어진 그 결정 안에 포함된, 조직의 넓은 범위에 미치는 그 기발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생각(whimsy)으로 존재한다.

다비드 부흐동(David Bourdon)은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뉴어크의 펜실베이니아철도회사에서 화물운송자로 근무했던 칼 앙드레의 경험이 그의 작품을 서로 동치(同値, equivalent)될 수 있는, 교체될 수 있는, 완전체(integer)로 만들었다는 것을 넌지시 언급한다. 칼 앙드레는 그의 조각에서, 구성적 완전체의 조직화 상에, 그리고 전체의 지상권(至上權), 전체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형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예술가적 계층의 착상에 대해 탐구한다. 칼 앙드레는 특히 객관적인 것의 희생으로 주관적인 것의 가치를 안정시키는 그 계층을 공격한다. 다비드 부흐동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규범화된 단위”는 그것이 표층을 내부의 주관으로 숨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외부의, 즉 객관적인 것의 표층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칼 앙드레의 구조는 엄밀히 말해서 객관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표층이 동정(同定)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분류법적인 것(clastic)”으로 존재한다고.

예술세계 안에서 파문(破門)임에도 불구하고 인습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반복상의 소인은 미니멀리스트 조형예술가들에 의해 따뜻하게 포용되었다. 가장 과격한 그들의 반대자들과는 역으로, 이들 예술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변이의 가능성을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대한 아이스테시스와 함께 조화롭게 행동하고 있는, 그들은 그것을 일정한 척도에 따라 환원했다. 변이는 미니멀리스트의 예술 안에서 한결 더 미묘한 것이 되었으며, 그것의 빈도와 진폭이 빈틈없이 제한되었다.

미니멀리스트의 구성적 체계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대칭의 성질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임계상태적인 것으로 범박하게 말해서, 이러한 현상은 예술가적 목류를 위해 보다 넉넉한 주객치환응집의 일부로 해석될는지도 모른다. 신랄하고 분쇄적인 그 삽화(揷話)는 미니멀리스트 조형예술 안에 엄격하게 환원된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나는 곳에서, 그들은 언외지언으로든지 유비(類比)로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체계의 또 다른 부분 안에 형식적으로 환원되고, 따라서 전체의 레벨에 회복된다. 기초가 되는 그 변덕은 유비적인 예술작품이 아이스테시스적으로 보다 더 강하게, 보다 더 내구력 있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리고 후소(後素)적 반복의 변화과정 안에 예기되어 있는 임계상태에 보다 더 강하게 저항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많은 미니멀리스트 조각과 회화의 유비적 성격은 격자(格子)의 구조 안에 물질적으로 표현된다. 프랑세스 콜피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범주적으로 “비조직적 체제(format)는 격자, 즉 그 구조로서의 현대(modern) 회화 안에서 딸림음(dominant)으로 존재하며, 동정적인 그리고 연속적, 전성(轉成)적 경제성의 표상을 전제로 하는 의미작용에 의해 연결된 필요조건, 기호현상-화술, 담화의 그 모듈(module)의 네트워크의 창조에 의해 그저 단순-천진난만한 사진 측면(plan)을 생생하게 통합한다(60).” 그 격자는 아마 체계화하는 미니멀리스트의 편애의 가장 분명한 실례일 것이다. 그것은 정밀한 것, 서로 화해된 것, 그리고 가장 망상적인 것으로 균형이 잡힌 것, 예상된 속마음(design)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자리가 잡힐는지 모르는 성분으로서의 구성 지도를 제공한다. 첨언하면, 다단식으로 만들어진 그 안의 명백한 그 방식의 가치에 의해, 그 격자는 또한 미니멀리스트의 접근법의 철저하고 과격한 성격에 다시 한 번 반영되어 그(또는 그녀)를 고무시키고 있는, 변화과정의 논쟁에 구경꾼의 주의력에 초점을 맞추는데 기여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니멀리스트 예술 안 격자의 바로 그 명백함은 겉으로 나타난 것과 또 다른 그것의 특별한 생김새, 그것의 농조(弄調) 정신임을 입증한다. 이러한 성질은 충분히 언급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미니멀리즘의 핵심 양상이라고 믿는다(그리고 사실,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의 폭넓은 투시도법 안에서). 왜냐하면, 미니멀리스트의 제스처는 과도한 것,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농조 상의, 그리고 1930년대 문화의 배아(胚芽)적 독창성이 풍부한 그 저서이후, 농담(play)과 밀접하게 동정되었던 개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과도는 반드시 도발로 의도되지만, 또한 사실상 화성(和聲)의 아티큘레이션으로 존재하는 그리고 농조로 존재하는 그 구경꾼과 함께 아종(亞種)적인 연루(連累)를 확립하는 것으로 의도된다. “농담은 새로운 창작에 기대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들을 함께 덧붙여 표현하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월터 아이얼(Walter Isle)은 주장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러한 충격으로, 그 위의 언어도단에 기대어 난폭한 행위와 무질서상태로 밀어붙이고 있는 그것은, 경악뿐만 아니라 새로운 어떤 무엇을 폭로한다(63).” 분명히, 예술가적 경향의 미니멀리즘은 사실상 경험주의자로 존재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난폭과 무질서 양쪽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질은 그들의 표현이 그 완성된 작품 위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것과 동반된 그리고 그것이 전형적인 예로 동정된, 임계상태의 담화 그 심연(深淵)에 존재한다. 또한 월터 아이얼은 그 농담이 그것에 대한 “그 자체의 화려한 행사(self-pageantry)”의 영광(靈光, aura)이라고 말한다(70). 이러한 의미에서, 미니멀리스트의 제스처는 이중의 농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이 조우하는 그 방법으로 궁리하는, 그리고 그 자신의 인습, 그것을 정의하는 제약, 그것의 역사와 함께 하나의 텀(term)이 되는, 그 술책의 농담으로서의 예술 작품을 숙고하여 다단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미니멀리스트 조형예술의 최후의 생김새는, 내가 방금 환기시켰던 숙고와 관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담하고 무관심한 표층을 출현시키고 있는, 미니멀리스트들은 관찰자의 경험에 끊임없이 그리고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어느 예술가가 그의(또는 그녀의) 작품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는 어떤 단계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정위(定位, orient)의 단계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 반응에 조건반사를 일으켜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미니멀리스트 예술에서의 그 현상은 세목에 걸쳐 낱낱이 언명된다. 미니멀리스트들은 사실 그들의 작품의 조심스럽게 구성된 그 직접성에 의지하고 있는, 그리고 현존재(現存在, 또는 개시존재, presence))의 변덕에 대담하게 돈을 걸고 있는(wagering), 그 조우에 매우 느릿느릿 힘들게 투자한다. 이렇게 예외적인 것은 관찰자와 작품 사이의 조우의 외연적(actual, 반virtual) 상황을, 마이클 프리드가 미니멀리스트들의 “연극조(theatricality)”라고 언급하며 일격을 가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과 관련된다(125). 그는 미니멀리스트의 예술작품은 일종의 다단계적 현존재인데, 그 이유는 그것의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 그것의 호전적인 것, 특히 그것의 연루(連累)가 관찰자로부터 요구된 것이기 때문이다(127).

프랑세스 콜피트는 또한 미니멀리스트 예술을 위한 현존재의 착상의 그 망상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미니멀리스트의 의미작용이 전통적 성서해석학으로 추구되어서는 안 되며, 그 대신에 그것은 조우의 외연적 경험으로 본래부터 타고난 것처럼 내재한다고 제안한다. “예술의 이러한 작품의 의미는 내재관계의 형식적 분석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에 의해 그들의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다(67).” 보다 단순-천진난만하게 만들어진 작품의 형식적 양상(대칭적 모듈의 패턴 안에서 제한된, 그리고 균형이 이루어진, 그것의 약간의 원소)으로서의 그 작품은 구경꾼의 명백한 지각적 요구를 보다 적게 정돈케 하고, 최초의 레벨에서의 음미가 보다 쉽게 이루어지도록 한다. 형식적 환원에 언외지의적인 것으로 조화가 됨으로써, 프랑세스 콜피트에 의하면, 그 관찰자의 역할은 “보다 극적이고 갈등적인(복합적인) 것이 된다(66).”

조우 상의 그 초점은 미니멀리즘의 이론적 논쟁의 열쇠가 되는 차원으로 존재한다. 그 논쟁은 사실 십자형의 바로 그 변천으로 존재하는 데, 그 이유는 예술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또는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의 그 의문이 마음속에 맴돌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스트의 투기의 그 결과는 약간의 인자(因子)에 의존한다. 만약 관찰하고 있는 그 경험이 망상으로 재투자된다고 한다면, 작품 그 자체는 폭넓은 청중에게 접근 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기에 대한 청중의 지평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관찰자는 그 작품과의 조우 안에서의 그 약동적 역할을 선택하는 것으로 고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우의 환경은 예술이 수용한 것으로서의 그 방식을 민주화하는 효과로 실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숙려는 분명히 예술적 창조와 멸실(滅失)의 모든 레벨, 모든 단계에 영향을 끼치는 혁신의 변화과정을 포함한다. 간단히 말해서, 미니멀리스트 조형예술의 힘은 그 작품의 진기함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선험성의 극적 재조직이라고 불리는 그들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이론적 명제로 존재한다.

 

철저하고 과격한 예술은 어느 것도 전적으로 새롭게 창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하게 강세 법으로 전위(轉位)될 뿐이다. 원래 중요하지 않았던, 처음부터 부여되었던, 미미했던 것은 중심적인 것이 된다. 미니멀리즘은 아종적인 작품의 현존재 안에서 즉각적으로 그리고 관찰자의 개인적 경험으로, 예술의 의미를 탐색한다. 거기에는 또 다르게 명백한 경험이 없고(표상이 없고), 경험의 상위 레벨의 암시도, 은유도 없다. 그 대신에 미니멀리즘은 변화된 중립상태의 대상, 즉 한 개 또는 두 개의 물체, 일반적으로 하나 또는 두 개의 색깔을 채용하고 있는, 동일 단위로 반복된 다시 말해서 공장에서 만든 또는 상점에서 구매한, 실직(實直)으로서의 대상과 함께 관찰자로 나타난다. 나머지로서의 계층 없이 존재하는 그 대상은 그들이 점령한 그 특별한 공간과 함께 언외지의적인 것으로 연동하고 상호작용한다. 그 대상은 그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폭로하지만, 화려하게 기교를 부리는 그 예술가에 대한 것은 거의 없다. 주체로서의 대상은 오로지 관찰자일 뿐이다(Serota and Francis 7).

 

미니멀리스트 음악에 대한 나의 토론은 보다 더 간략하게 언급될 것이다. 먼저,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스트의 경향은 조형예술에서 보다 풍부하지 못하다. 둘째, 미니멀리스트의 음악은 조형예술의 진척에 의해 분명히 영향을 받았으며, 조형예술의 기초 텀, 이미 반복되었던 그 텀을 많이 채택했다. 미국 미니멀리스트 음악의 연구에서, 윔 멀텐스(Wim Mertens)는 4명의 작곡가, 라 몽트 영(La Monte Young), 테리 릴리(Terry Riley),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그리고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들은 모두 1935에서 1937년에 출생한 동일 세대의 인물들이다. 1960년대 후반에, 윔 멀텐스는, 이들 4명은 “그들의 작품 안에서 후소(後素)적 반복과 미니멀리즘의 기교를 조리 있게 적용한 최초의 인물들이었다(11).” 윔 멀텐스는 미니멀리즘의 음악에서의 기교에 관해 매우 조심스럽게 정의하고, 그는 작곡된 작품의 길이가 확정적인 숙려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빠르게 지적한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용어 'minimal'은 오로지 제한된 최초의 물질과 작곡가가 채택하는 제한된 변형의 기교만이 적용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것은 스티브 라이히필립 글래스의 초기 작품의 경우에만 존재한다. 분명히 우리는 이 음악에서 일반적으로 음색과 제한된 고저음조의 딸림음(제5음)으로서의 동치를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길이의 텀으로만 보면, 이러한 작곡은 분명히 'minimal'이 아니다. 예를 들어, 테리 릴리의 "All-Night Concert"와 필립 글래스의 "Music in Twelve Parts"는 4시간을 훨씬 넘어가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12).

 

에로 타라스티(Eero Tarasti)는 미니멀리스트 음악을 성숙시켰던 충돌의 분류법에 주목하고 있다. 정위(orientation), 기교(technique), 그리고 젠체하는 태도(posture)에 의지하여, 그 충돌의 분류법은 “12음(serialist),” “포스트-12음(post-serialist),” “무작위음(aleatoric),” “후소(後素)적 반복(repetition),” 또는 “포브르 음악(musique pauvre)”으로 지시될는지 모른다(i2). 윔 멀텐스처럼, 에로 타라스티는 라 몽트 영, 스티브 라이히, 그리고 필립 글래스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또한 그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과 피에르 불레(Pierre Boulez)와 같은 “12음 학파”라고 부르는 것의 표상과 마찬가지로 아보우 푀흐(Arvo Pärt)와 볼프강 림(Wolfgang Rihm)과 같은 유럽의 미니멀리스트에 대해 언급한다(i5~i7). 그 운동의 기원과 관련하여, 에로 타라스티는 아이스테시스 안의 순환현상으로서의 미니멀리즘에 관한 프랭크 스텔라의 관점을 공유한다. 서구 음악에 박식한 그는 복잡함과 단순-천진난만함 사이의 교체를, 그리고 미니멀리즘이 이러한 교체의 효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윔 멀텐스는 이러한 관점에 오히려 보다 더 명백하다. 그는 선각자로서의 아놀드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그리고 존 케이지를 동일시하고, 미국에서 그 경향의 최초의 운동으로 널리 행해졌던 그 유래에 대해 넌지시 언급한다.

 

미국의 후소(後素)적 반복(repetition)의 두 양상은, 특히 변화과정으로서의 작용(work-as-process)에 의해 대상으로서의 작용(work-as-object)으로 대치되는, 그리고 형식과 내용이 단일성으로 융합하는, 의미작용을 한다. 그것이 추종하는 그 분석은 이러한 개성이 어떻게 그 세기의 초기에 음악적 진화의, 다시 말해서 변증법적 소인(素因)의 망상으로 조락(凋落)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 진화의 싹이 되는지, 입증하려고 꾀한다. 패러독스적으로, 대상으로서의 작용의 그 신개념에서의 그 사라짐은 그 작용의 절대적 자율성(autonomy)에서 오는 결과인 것 같이 보인다. 아놀드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과 포스트-12음 작곡가들에 의해 옹호를 받고 있는 그 자율성은 주체의 거부의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그 자율적 작용은 형식과 내용의 확장적인 이중성으로 명시되고, 그것은 음성요소의 총체적 제어의 중명사에 의해 직접적으로 객관적 음악을 생산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세분화되고, 제어구조로부터 자유로워진 음성은 자율성이 되고, 이러한 자율성은 더 나아가 존 케이지와 후소(後素)적 반복(repetition)의 음악 작곡가들에 의해 진보하게 되었다. 포기하고 있는 그 제어에 의해, 제한적 우연성(aleatoricism)은 12음주의가 형식과 내용의 이중성으로 그것의 연속적 강요로 인하여 실패했던 그 음성의 객관성을 성취하는데 성공했다(95).

 

에로 타라스티는, 새로운 유럽의 미니멀리스트들은 그들의 운동이 미국에서 기원되었다고 하는 그 착상을 거부하는 것에 만족하고, 그것의 기원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는데, 예를 들어, 에릭 사티(Erik Satie)의 피아노 곡 모욕(vexation; vεksɑsjɔ̃)은 동일 프레이즈(phrase; articulation→phrase→period)를 840이나 반복한다(repeat; repetition이 아니다). 그는 미니멀리즘이 그것을 선행하는, 그리고 12음 학파의 구성적 복합성을 향하여 논쟁적으로 반작용하는, 음악에서의 모더니스트의 성향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존 케이지의 망상에 대한 논쟁에서 윔 멀텐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어 미니멀리스트 음악의 아이스테시스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존 케이지의 우연적 철학은 인도의 힌두 철학, 중세의 신비주의, 그리고 미국의 랠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등의 초절주의(transcendentalism)와 같이 날카롭게 정의된 그래서 널리 알려진 철학의 영향력에 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에 기본적으로 비교되는 것이었다(i6~i8).

윔 멀텐스가 그들에 대해 기술한 것처럼, 미니멀리스트 음악의 기초구조의 생김새는 미니멀리스트 조형예술의 이런 것들과 매우 유사하다. 미니멀리스트 작곡가는 그들의 작품 안에 익명성과 객관성 대신에 발기하고 있는, 개성적인 것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화술(narrative)을, 보다 더 범박하게 말해서, 목적론적(teleological) 효과를 거부한다. 이러한 화술과 목적론의 전통적 작곡의 기교 대신에, 미니멀리스트들은 후소(後素)적 반복의 소인(素因)에 의지한다. 미니멀리스트의 조형예술에서처럼, 그 소인은 12음적인 것으로든지 또는 치환적인 것으로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간에 연주될는지 모른다. 테리 릴리와 같은 작곡가는 이러한 2가지 접근법을 융합한다. “테리 릴리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반복된 그리고 에버뉴의 코펠 같은 조합을 생산하는 소자(素子, cell)로 조성된다(Mertens 40).” 예를 들어, 테리 릴리의 작품 안에서, 기초 프레이즈는 조합적인 패턴 안 강조의 변화와 함께 그것을 반복하는 다단계로 이루어진다. 미니멀리스트 음악에서의 후소(後素)적 반복의 용법은 선형(線形)적인 전개와 모티프, 톤, 그리고 무드의 변화 같은 인습적 기교가 회피될 때, 그 작곡법에 구조와 응집을 제공한다. 윔 멀텐스는 또한 후소(後素)적 반복이 구성적 변화과정의 연속성에 기운을 불어넣는데 사용된다고 제안한다(16).

에로 타라스티는 후소(後素)적 반복을 미니멀리스트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자원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작곡가들이 그것을 관자놀이-시간적인 것(temporality)에서의 대담한 공격으로 전개시킨다고 주장한다. “미니멀리스트의 음악은 음악의 낭중분절(囊中分節, segmentation)과 관자놀이-시간(temporal)적 함수(기능)를, 즉 전개, 도입, 또는 관자놀이-시간적인 것과 연결된 또 다른 음악적 함수(기능)를 거부한다. 우리는 발단과 종말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다. 음악은 명확하게 시간을 정지시킨 기계가 되었다(i15).” 미니멀리스트의 작곡은 화술의 어느 가능성을 극적으로 거부하는 그 확장된 지금(now), 행동(ongoing, 부적당한 진행), 이 순간의 12음을 제공한다. 에로 타라스티는 그것을 아이스테시스적 초기 포스트모더니즘 안 반-화술(antinarrative)의 반란과 함께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서의 현상이라고 독해한다(i16).

이와 같이 숙려함으로써, 음악의 많은 전통적 자원은 포기되었고, 그것은 미니멀리스트 조형예술 같은 미니멀리스트 작곡가가 중심 망상으로 만들어진 작품과 함께 만나 청중을 껴안는다. 그들은 수동적(귀납적) 수용의 그것으로부터 내포적(virtual, 허상적-연역적) 협력의 그것으로 활발하게 청중의 역할을 촉진시킨다. “후소(後素)적 반복 음악의 지각은 음악적 변화과정의 통합적 그리고 창조적 약수(約數, part)로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더 이상 종결된 의미작용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의 구성 안에서 능동적(연역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Mertens 90).” 에로 타라스티는 미니멀리스트 음악의 형식적 단순-천진난만함이 그것의 효과 안에서만, 특히 청중을 감동시킨 그것의 효과 안에서만 어떤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음악적 자극의 소량을, 그는 구성작품 그 자체 그대로 반영하는 청중에게 떠맡기고, 만족하도록 만든다(i5). 그 청중은 망상의 그 편린이 유도하는 소인에, 기교에, 변화과정의 소산에 초점을 맞춰, 그리고 재구성에 초점을 맞춰, 고무되는데, 말하자면, 그 안의 그 방식은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때 미니멀리스트 작품의 주체는 작품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과 청중이 조우하는 것과 함께 존재한다.

 

미니멀리스트의 충격이 문학 안에서 그 자체를 표출하는 그 방식은 조형예술과 음악 안의 그것들과 다른 어떤 무엇을 필연적으로 표출한다. 왜냐하면, 표상적인 가능성을 개척하거나 개척하지 못하거나 할는지 모르는 이들의 표현 모드와 달리, 문학은 표상과 필연적으로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어도 2개의 레벨 상의 진리로 존재한다. 첫째, 대부분의 문학은 함수가 존재할는지 모르는 내포적인 또는 언외적인 화술을 수반한다. 반-화술(anarrative)을 의미하는 장르일지라도(예를 들어, 구체적 사실의 시일지라도 결국 마음속에 닻을 내린다), 심연의 기호학적 결핍(semiotic need)에 의해 동기화된 독자는, 제공된 단어를 재조직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되며, 따라서 그들은 의미를 재구성하는 효과 안에서 교대로 책략을 다양하게 읽는 그 실험에 의해 일종의 스토리로 재결합한다. 많은 텍스트 안에서, 그 스토리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텍스트 그 자체 안의 그 방식을 다른 것으로 언급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미니멀리즘의 스토리로 존재한다. 텍스트 안에 “어떤 무엇이 발생한다.”는 것을 고찰하도록 우리에게 허락하고 있는 그 스토리는 화술적인 문학이 의지하는 그 배경으로 존재한다. 두 번째 레벨, 문학의 기초 질료인 언어는 원래 표상적인 것이다. 인습적으로, 단어는 음성과 톤, 음색과 양상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언외지의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의미론적인 것(semantic)보다 더 심오하게, 기호학적 함수(semiotic function)와 함께 보다 더 신중하게 존재한다. 이것은 문학적 기호현상(semiosis)이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분명히, 언어학적 기호(sign)는 개성 안에서 독단적(arbitrary)이고 약간의 소자(素子)의 우발적인 것이 되고 사건이 사건으로 변할는지 모르는 필요조건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관점은 다음과 같이 잔존한다. 언어는 상징적인 것으로 존재하고, 시각적 이미지와 음성과 달리 그 언외지언의 단어는 표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그렇다 치더라도, 미니멀리스트의 조형예술과 음악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그 대부분의 막연한 그것들(the concerns)은 미니멀리스트 문학 안에서도, 그리고 대부분 그것들과 동일한 생김새의 그 형식적 레벨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음악에서처럼, 문학의 미니멀리즘은 길이의 문제에 배타적이지 아니하다. 많은 미니멀리스트의 문학이 비교적 짧다고 할지라도, 그 간결(brevity)은 폭넓게 변하며, 따라서 미니멀리스트 화술(narratine)을 “롱가(longa, 또는 long)”로 상상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물리적 간결은 미니멀리스트의 문학이 펼쳐 보일는지 모르는 것 중에서 특히 한 가지의 성격 대신에 여러 가지 성격으로 고찰 될 수 있는 것이다. 표현적 모드와 같이, 문학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넓이 뛰기 등의 조주로(助走路)와 같이 발생하는, 다시 말해서 목표지점에 도착하기 이전의 여러 번의 보폭처럼 발생하는, 음악에서의 질의응답의 그 질의처럼 발생하는 접근수단의 바로 그 질의처럼, 다산적적인 것으로 구성될 수 있다.

미국에서 단편소설의 최근의 흐름에 대해 언급하면, 존 바스(John Barth)는 문학의 미니멀리즘에 대해 폭 넓은 요구를 한다. “미니멀리즘(여러 가지의)은 최근의(북미, 특히 미국) 문학광경(남미의 El Boom과 동치인 영미문학) 상의 가장 인상적인 현상의 근원이 되고 있는 소인으로(어쨌든, 소인 중의 하나로) 존재한다(A Few Words 1).” 프레더릭 바슬미(Frederick Barthelme), 앤 비티(Ann Beattie),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 보비 앤 메이슨(Bobbie Ann Mason), 제임스 로비슨(Jamse Robison),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 토비아스 울프(Tobias Wolff)의 작품에 대한 언급에서, 존 바스는 선각자로서의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와 도널드 바슬미(Donald Bathelme)를 지적하고, “K-Mart(할인 소매점) 리얼리즘,” “힉쉭(hick chic, 패션 상품명-촌뜨기의 멋),” “다이어트펩시(Diet-Pepsi, 펩시콜라 중의 한 종류) 미니멀리즘”과 같은 신 미니멀리스트의 글쓰기의 범주를 정하는데 사용되었던 텀의 어떤 것에 대해 연습한다.

문학의 미니멀리즘의 기원에 대해서, 우리는 사뮈엘 베케트와 도널드 바슬미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하기를 바라는 고대철학의 요지에 의지하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와 이솝(Aesop)을 환기시킬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문학은 또한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 안의 미니멀리스트의 경향을 과장하여 말한다. 어떤 시대나 어떤 장소에서도, 그 경향은 다소간 언급되고, 언급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제공하는 그 가능성은 다소간 매력 있게 보일 수 있다. 도널드 바슬미는 그의 견해가 미국문학에 현재 유포되고 있는 미니멀리스트의 운동을 발생시키고 지원한, 약간의 그 소자를, 즉 베트남 전쟁과 그것이 원인이 된 문화적 부작용의, 에너지 위기와 미국인의 잔학한 행위에 저항하여 발생하는 반작용의, 독해와 글쓰기의 교묘함 안의 국가적 타락의, 우화․지성 그리고 이전 세대의 아방가르드의 아둔함(그 중에서도 특히, Donald Bathelme, Robert Coover, Stanley Elkin, William Gaddis, William Gass, John Hawkes, Joseph Heller, Thomas Pynchon, Kurt Vonnegut, 그리고 그 자신)에 저항하는 반작용의, 그리고 끝으로, 상업적․정치적 선전의 과장법의 거부반응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을 인용한다(2). 존 바스의 관점에서 보면, 미니멀리즘은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찬가지로 발생된 그 효과 안의 그 불가피성과 상쾌함 두 가지가 공존한다. “그들의 개인적인 그리고 역사적으로 지역적 충격을 초월하여, 그때 새로운 미국 단편소설의 몇몇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역사(개인․지역 등의 소규모 역사) 안에서 순환적 보정을 재규정하고 있다(25).”

오늘날의 미국소설에 대해 존 바스가 언급한 것에 의하면, 킴 헤르친저(Kim Herzinger)는 미니멀리즘의 두드러진 특징의 유용한 목록을 제안한다. 그녀는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형식적으로 무언가 부족하고, 간결하게 삭감한다.

ⓑ 음조 상 냉엄하고, 본래의 의미에서 이탈하고, 언질을 주지 않고, ‘반음 내리고(flat),’ 감동이 없고, 어기대고(recalcitrant), 무표정하고, 말수가 적다.

ⓒ 에두르고, 은하(ellíptical gálaxy)와 같다.

ⓓ 비교적 플롯이 없다.

ⓔ 표층의 세부묘사와, 특히 쉽게 알 수 있는 브랜드 명칭과 관련된다.

ⓕ 심층이 없다.

ⓖ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역사에 대해 다소라도 에두른다.

ⓗ 글이 종종 당면한 긴장 안에서 쓰인다.

ⓘ 글이 종종 1인칭 시점에서 쓰인다.

ⓙ 어떤 때는 2인칭 시점에서 쓰인다(“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의 미니멀리즘” 73).

 

미니멀리즘의 개성적 모드에 대해, 그녀는 리얼리스트(정확히 말해서, 하이퍼리얼리스트)적인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것의 개성적․주체적 질료(명제의 본질)는 그 효력이 약하고, 지엽적이고, 흔해빠진 것이고, 진부한 것이다.

영미문학의 미니멀리즘에 가장 철저하게 영향을 끼친 실례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뮈엘 베케트의 숨소리(Breath)이다. 그것은 오직 35초만으로 이루어진 최근의 연극이다. 거기에는 등장인물이 없고, 무대에는 오로지 “갖가지 잡동사니”만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조명과 아기 울음소리의 간결한 효과가 그의 극적 경험의 가장 인색한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무대, 그 극적인 시간과 공간을 면밀하게 실험한다. 조도가 높아질 때, 녹음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암시에 의해 추적된다. 5초 후에 처음과 동일한 임종의 숨소리와 아기 울음소리는 천천히 떨어지는 조도와 동반되고, 처음의 숨소리와 아기 울음소리는 동일한 소리가 된다. 무대는 안정되지 못한, “트라이앵글의 정점임에도 불구하고 반-정점(noverticals)의, 뿔뿔이 흩어진 그 모든 것의” 동류체(isotopy)로 조정된다(211).

보다 더 강력한 실례의 부재 안에서, 숨소리는 미니멀리즘의 제로 단계와 동정될 수 있다. 리너(leaner) 텍스트(매우 광대한, 그러나 “텍스트성-원문, textuality-”을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는 거의 상상력이 없다. 숨소리는 발음된 경제적․ 기적인 것이 사실 예술작품의 효과를 광대하게 만들는지 모르는 그 변덕, 그 미니멀리즘의 기본적인 패러독스를 세련되게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숨소리는 삶에 대한, 특히 그것의 짧음, 그것의 허약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허친스(William Hutchins)는 그 제목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로부터(86), 듀크 빈센티오(Duke Vincentio)가 삶의 덧없음(하루밖에 못 가는, ephemeral)의 성질에 대해 언급한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의 일부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삶을 이렇게 설득하게:

내가 그대를 잃는다면, 어릿광대일 수밖에 없는

한 녀석을 잃는 것이네. 그대의 간교한 숨소리는,

전적으로 하늘의 영향에 달려 있고,

그대가 머무는 이 육체-식민지는,

끊임없이 괴로워한다네. (3. 1. 6~11)

 

윌리엄 허친스는 숨소리에서 본질적인 것의 주객응집치환의 기여를 전개했던 완고한 포기의 변화과정을, ―사실, 미니멀리스트의 조형예술과 음악의 성격을 만들고 있는 것과 동일한 변화과정을 찾아낸다.

 

숨소리(사뮈엘 베케트의 “소드라마-dramaticule-”가운데 가장 간결한 것)는 그의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는 세계관의 마지막 정수(精粹)를 제공한다. 그것은 압축하고 전통 장르를 깨끗이 씻어내는 그 전진행위의 효과를 최고점에 이르게 한다. …확실히, 여기서 모든 미니멀리스트의 드라마는 그것의 정상에 이르고 있다. 그 “희곡(play)”은 숨소리와 조도의 공시태(그 숨소리가 허파까지 들이마셔지고 조금씩 줄어드는 것으로 증진하는 조도의 무대)로, 빈 공간 안에서 관측된 “사건(event)”으로 존재한다. 그와 같이, 그것은 사뮈엘 베케트의 효과가 드라마의 모든 “필요하지 않은(inessential)” 성분의 태깔을 벗겨내는 최고점에 이르게 하면서, 의미(meaning)를 운반하는, 그리고 “삶의 모조품”을제공하는 그 능력을 실행한다. ―“자에는 자로”에서 듀크 빈센티오(Duke Vincentio)의 소견이 밝힌 것처럼, 그 숨소리는 사실로 존재한다(86~87).

 

그것이 허약을 강요하기는 하지만, 숨소리 그 자체는 매우 강한 텍스트로 존재한다. 그것의 형식적 간명(concision), 그것의 농축된 간결언어(laconism), 그것의 단순-천진난만함 안에서, 그것이 연극의 전통적인 주제(thematic; 또는 어간형성모음)와 관례를 연기하는 그 방식 안에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그리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의 의미(sense)로 존재한다.

 

이 장의 모두에서, 나는 현대(contemporary) 프랑스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이 파스칼, 라 로슈푸코, 라 퐁텐, 그리고 라 브뤼예르와 같은 신고전주의 인물에게서 존엄한 기원을 요구할는지 모른다고 언급했다. 보다 더 최근의 선각자로서, 그들에게 끼친 영향의 열쇠(영국과 프랑스의 현대 미니멀리스트 문학에 올차게 활기를 불어넣은 사뮈엘 베케트와 다른)는 알베르 카뮈, 모리스 블랑쇼,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그리고 나탈리 사로트에게서 발견된다.

카뮈의 이방인(L'Etranger)은 충격적인 책이다. 이 충격은 특히 그것이 역사적 화맥으로 고찰될 때 더욱 잘 나타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전개했던 많은 혁신적 효과가 과거 50년 동안, 먼저 새로운 소설가들에 의해 폭 넓게 회복되었고, 후에(그리고 아직도 두드러지게) 미니멀리스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전신문체, 탁월함(수사적으로 화려함)이 결핍된, 화술의 깎아지른 듯이 매우 단순-천진난만함은,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에서 앙드레 지드(André Gide, 1869~1951)에 이르는 저명한 전통 소설가들에게 폭 넓게 공공연히 사용되었던 독해를, 마치 교회의 본당을 동향(東向)이 아니게 지어 방향을 잃고 어리둥절케 하는 것처럼 크게 혼란시킨다. 카뮈는 구조와 주제의 전통적 계층을 거부한다. 사뮈엘 베케트의 무대처럼, 이방인의 사물은 동류체적으로 조정된다. 그 소설은 1인칭으로 쓰였지만, 대개 1인칭 화술과 연합된 그 효과가 박탈되었다. 그것은 개인적이지도 않고 고백적이지도 않다. 주체성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그는 그것이 카뮈 그 자신이든지 그의 내레이터 뫼르소이든지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활기가 주어진 그 소설은 공고한 것, 물질적인 것으로 대체되었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본래의 성질보다 오히려 그 사물의 차원에 어떤 특권을 부여한다. 카뮈의 결정은 단순시제가 문학적 관례상에서 신중히 전면적으로 가정할 수 있는 것보다 오히려 소인적․화술적 시제로서의 그 시제를 사용한 것이다. 사회집단의 놀이를 거부한 뫼르소처럼, 카뮈 또한 전통적 문학의 놀이를 거부한다. ―또는 오히려 그 자신의 텀 상에서 보다 미묘하게 놀이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소설은 몹시 이상한 것으로 존재한다.

1943년에 출간된 이방인의 개설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그 텍스트가 장르를 비옥케 한 “새로운 기교”라고 언급한다. 그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언급한 것처럼, 카뮈가 침묵은 파롤의 진정한 모드가 될 수 있다고 인지하고, 나중에 그 시지프스 신화(Le Mythe de Sisypthe)의 착란(discursiveness)을, 침묵으로 만들어진 이방인에서 떠맡아 보증한다고 언급한다. 10년 후에, 롤랑 바르트는 영도(零度)의 글쓰기(Le Degré zéro de l’écriture)에서, 카뮈, 모리스 블랑쇼, 그리고 장 케롤(Jean Cayrol)의 “백지의 글쓰기(white writing)” 또는 “공백의 글쓰기(blank writing)”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카뮈의 문체의 중립이 결국 순결한 것이 될는지 모르는 글쓰기를 공리로 간주하려고 하는 그 기원에 의해 추진된다고 주장한다(49). 롤랑 바르트가 언급하는 무색, 공백의 글쓰기는 “언어사전의 목록에 예속된 것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카뮈가 “거의 문체의 순수이성(칸트의)이라고 하는 그 부재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그 부재의 문체”를 공들여 만들고 있는, 이방인의 “투시도처럼 투명한 파롤”로부터 실행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55~56). 이것은 훗날의 작가들에 의해 회복될 것인 매우 중요한 혁신적 효과 중의 하나로 존재한다. 더 나아가 회복의 또 다른 일종이 이방인 그 자체 안에서 발생한다.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것처럼, 미니멀리스트의 조형예술과 음악(그리고 아방가르드의 정향의 딜레마에 대해 의미심장하게 언급하는 것)에서 보이는 그 반-수사적 제스처에서의, 문체에 대한 폭력은 결국 이방인이 창작되었던 그 함정 안으로 추락하고, 그 자체의 문체가 된다.

모리스 블랑쇼의 모호한 사람 토마(Thomas l'Obscur, 1941)와 같은 소설집에서의 소설, 사형선고(L'Arrêt de mort), 그리고 그보다 최근의 대낮의 광기(La Folie du jour, 2002)는 결국 1980년대의 미니멀리스트의 글쓰기와 연합될 것인 특징을 전개한다. 미니멀리스트의 이것들은 고도로 간결한(laconic) 텍스트이다. ―이 점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임계상태적인 작품과 현저하게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화술적인 톤은 감동과 정서가 박탈된 것으로 신중히 반음 내린 것으로(flat) 존재한다. 착란적인 것이면서도, 그들은 평범한 것으로, 객관적인 것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가치를 안정시키고, 복잡하지 않게 만들어진다. 이방인처럼, 모리스 블랑쇼의 소설은 명백한 계층을 거부한다. 이러한 텍스트의 독해에서, 그것은 별개로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보다 오히려 어떤 사건, 목소리, 또는 화술적인 모드의 아종적인 망상에 기인한 것으로서, 추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회피하는 것 그리고 제한적인 것의 매우 신중히 구성된 약동성임에 틀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러한 텍스트 안에서의 중심의 일종으로 동정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리스 블랑쇼의 소설의 글쓰기는 여백에서 지속적으로 방사되는 담화로 존재한다. 아마 어떤 것보다도, 그의 작품의 여백적인 성질은 작가 안의 작가로서의 말하자면 모리스 블랑쇼의 후소(後素)적 반복으로 고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프랑스에서의 미니멀리스트들의 현재의 글쓰기가 그 성질을 인지하고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알랭 로브그리예가 “새로운 소설을 위하여(Pour un nouveau roman)”에서 옹호한 사물로서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것은, 다시 말해서 관념의 구체화(chosisme)는, 카뮈와 모리스 블랑쇼의 소설가로서의 혁신에서 본 것처럼, 프랑스 미니멀리스트들에 의해 마음으로 선택되고, 접근될 것이다. 알랭 로브그리예는 개성, 심리상태, 주체, 그리고 그들이 현상의 세계에서 보다 정밀하게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소설을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언급하면서,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소설가적인 목적론의 변덕(은 또는 환상과 같이 화려한 수사적 표현)에 대해 폭력을 행사한다. 그 새로운 소설은 “정념(passion),” “음모(intrigue),” “정취(atmosphere),” 또는 “메시지(message)”를 위하여 결코 장소를 마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물이 사물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다루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소설에서의 스토리텔링은 미니멀리스트들의 편을 들어 그 목적론의 변덕을 포기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의 주장은 힘이 넘치고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의 이론적 정향(定向, position)의 가장 좋은․전형적인 실례인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탈리 사로트와 가장 강렬한 그녀의 소설 “굴성(屈性, tropisme)”에도 존재한다고 언급하고 싶다.

그 책은 일상생활의 24개의 짧은 사건으로 구성돼 있다. 평범한 화술의 맥락이 그들과 관계되어 있지만, 그 대신 주제적인 것(thematic; 또는 어간형성모음)이, 다시 말해서, 진부함, 빈약, 그리고 일상생활의 시시하고 무미건조함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그 안에 존재한다. 각각의 텍스트는 우아하지만, 매우 예리한 삶의 박편이 들어있다. ―그녀의 주요한 말투에는 고독(solitude), 부재(absense), 권태(ennui), 소외(疎外, alienation), 그리고 공허(emptiness)가 살아 숨 쉰다. 그들의 형식적 간명함이 들어 있는, 그리고 그들의 비명(碑銘)과 같은 성질이 들어있는, 이러한 텍스트는 라 브뤼에르(la Bruyére), 그리고 라 로슈푸코를 다시 불러들인다. 그러나 그들의 화술적인 문체는 단순-천진난만하고, 서술적이고, 정성을 들이지 않고, 설명적이지 않다. 나탈리 사로트는 소설 ‘굴성’에서 아종적인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집단은 한결같게 소외되었고, 소외되고 있다. 사물은 인간과 똑같이 활기를 띠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굴성’은 행동이라기보다 오히려 반응적이다. 나탈리 사로트는 중립적인 그리고 과학적으로 객관적인 것이 된 시선(gaze)으로 말한다. 전체로서의 그 작품의 구조는 골소강(骨小腔, lacunary)이다. 빈 공간은 개인적 텍스트, 다시 말해서 언뜻 보기에 암시가 분명한 것이면서도 관계가 없는 조각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고 있는 것 사이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굴성’의 불연속성은 독해의 전통적인 책략에 저항하는, 더 나아가 복잡 미묘한 것이라고 알려진 것을 만든다. 그러나 모리스 블랑쇼처럼 나탈리 사로트는 그 방해가 어느 담화의 필연적인, 망상의 양상으로 존재하고, 사실 오성(悟性, understanding, Verstand)을 헛되게 하기보다 오히려 촉진시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굴성’ 안의 방해는 그들에 의해 그 책의 가장 개성적인 목소리로 존재하는 일종의 공명(共鳴)의 침묵과 함께 잔뜩 투자된 그 안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

앞의 고찰은 프랑스 미니멀리스트들이 문학적 재능을 유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특별한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그래서 얼마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존재한다. 다음 장에서 나는 광대한 미니멀리스트의 경향의 전형으로 만들어진 현대(contemporary) 프랑스 텍스트의 일련의 독해를 제안할 것이다. 나는 20세기 말 프랑스 문학의 지평 상에 그 또는 그녀가 어떻게 위치를 잡게 되었는가를 언급하면서, 내가 다루고 있는 각각의 작가들과의 맥락과 관련지으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나는 이들 작가들의 작품 간에 널리 퍼진 것, 다시 말해서, 내가 기술하는 경향의 영역의 의미(sense)를 독자에게 제공하는데 기여할 것인 그 유연성(類緣性)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나는 각각의 경우 안에서 문학 형식의 문제에, 그리고 특히 이들 각각의 텍스트가 그것 자체의 유약함(its own smallness)의 스토리를 언급하는 그 방식에, 초점을 맞추겠다. 다시 한 번, 나의 의도는 현대(contemporary) 문학의 현상으로서 그것이 그 자체를 지엽적으로 표출하는, 그리고 기본적인 본래의 모습으로서 미니멀리즘의 다양성을 총체적으로 표출하는, 그 양쪽을 함께 고찰하는 것이다. 나는 두개의 직관과 관련된 것에 의해 안내를 받았다. 한편으로, 나는 미니멀리즘이 우리의 포스트모던적인 문화적인 경제적-유기적인 것 안에 단단히 뿌리가 박혀 있다고, 격론을 벌이며 애타게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예증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미니멀리스트의 작품에 대한 분석이 새로운 휴머니즘의, 롤랑 바르트가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의 글쓰기와 동일시했던 그런 종류의, 흔적을 발견할는지 모르는, 그 페포(閉包)를 신뢰한다. 나는 미니멀리스트의 충격이 다른 원문 안에서, 찰나의 논리 안에서(분할의 관점), 그리고 이렇게 유약한 세계의 광대한 야망 안에서, 추정하는 그 생김새의 독해에 의한 이러한 변덕(통합의 관점), 양쪽을 동시에 실험하고 싶다.

 (게시일: 2011. 11. 11. http://www.poemspace.net/)

 

각주

 

미니멀리즘_C.W. 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SUR LES ROUES/Gueune-Ok JOU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