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池や蛙飛こむ水の音(松尾芭蕉)

 



사토우 카즈오(佐藤和夫), 와세다(早稻田) 대학교 교수 / 박순만 역, 주근옥 편(추가)


    1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일찍이 “와동주의(vorticism, 1914)” 속에서, “일본인은 탐구의 센스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이미지즘의 미를 알고 있다. 옛날 어느 중국인은, 말해야 할 것을 12행으로 말할 수 없다면, 침묵을 지키는 일이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인은 더 짧은 HOKKU(홋쿠[發句]=하이쿠[俳句])라는 형식을 발명했다”고 진술하고, “落花枝に歸ると見れば胡蝶かな(지는 벚꽃 가지로 돌아간다 보았더니 나비로구나-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를 2행으로 번역한 시를 들어, 이것이 대단히 유명한 어느 홋쿠(發句)의 내용이다”고 적고 있다.

    그는 “한 이미지의 시”를 제창하고, 거기에는 중치(重置, superposition)의 구조가 있다고도 말하고 있다.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 1473~1549)의 구(句)에 대해 말한다면, 떨어진 꽃잎에 나비의 이미지를 겹치는 수법이다. 그는 이 중치법(重置法)에 의해 “군중 속에 문득 나타난 이 얼굴들 / 검고 축축한 나뭇가지의 꽃잎들(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Petals on a wet, black bough.)”이란 2행시를 써서, “홋쿠(發句)와 같은 시”라고 불렀다. 중치법은 그 후 현대시의 중요한 기법이 되었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산 사람의 하이쿠(俳句)가 20세기의 모더니즘 단시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In a Station of the Metro


    Ezra Pound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지하철 정거장에서


    군중 속에 문득 나타난 이 얼굴들

    검고 축축한 나뭇가지의 꽃잎들


 

       

      Ezra Pound(1885~1972)

   

   미국 시인. 해밀턴 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어 대학에서 연구하다 런던으로 건너가 그 뒤로는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대에 이미지즘 시 운동을 주도하고 모더니즘 문학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T. S. 엘리엇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도왔으며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자신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를 보여주었을 때 그 시의 절반을 잘라버리라고 충고한 일이 유명하고,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에게 큰 영향을 준 일도 유명하다. 그의 시 가운데에서는 “휴 셀윈 모벌리(Hugh Selwyn Mauberly)”와 “캔토즈(Cantos)”가 대표작이다. 중국문학에 관심을 두어 서구에 중국 고전문학을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한시 등의 번역도 많이 하였다. 그가 번역한 이백의 시 가운데는 영시로도 탁월하다고 인정받는 것이 여럿 있다. 192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살았는데 2차 대전 때 뭇솔리니 정부에 협력한 탓으로 전쟁이 끝난 뒤 국가반역자로 재판을 받았다. 많은 동료 문인들이 탄원을 하였고 그 뒤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 석방된 뒤 여생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2

    영국의 문호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1894~1963)의 “과학과 문학(1963)”에, “시인은 과학자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존재이다” 라는 일절이 있는데, 그 속에서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1644~1694)의 閑かさや岩にしみ入る蟬の聲(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이 “이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의 하이쿠(俳句)에는, 사물의 진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독일 중세기의 신비주의자)의 이른바, “신의 근원”이 영겁(永劫)에서 시간 속으로 갑자기 튀어 나오는 독특한 사건에 관한 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술 불가능한 사건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이 일본의 시인은, 그 시를 극도로 세련시켜 바위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정적만큼 절대적인 정적, “음악적인 공동(空洞)의 허무(주: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의 말)”라고도 할 수 있는 정적을 표현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무심히 되풀이하는 곤충의 울음소리에 담긴 신비적인 함축된 의미에 의해, 일종의 절대성, 우주적인 중대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또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의 다른 매미의 구(句) “やがて死ぬけしきは見えず蟬の聲(곧 죽을 듯한 기색은 안 보이네 매미소리야)”는 “この道や行く人なしに秋の暮(이 길 한 가닥 가는 사람도 없이 저무는 가을)”와 함께, 미국의 현대작가 샐린저(J. D. Sallinger, 1919- )의 단편 “테디” 속에 인용되어 나온다.


    落花枝に歸ると見れば胡蝶かな

    지는 벚꽃 가지로 돌아간다 보았더니 나비로구나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

    閑かさや岩にしみ入る蟬の聲

    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やがて死ぬけしきは見えず蟬の聲

    곧 죽을 듯한 기색은 안 보이네 매미소리야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この道や行く人なしに秋の暮

    이 길 한 가닥 가는 사람도 없이 저무는 가을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旅に病んで夢は枯野をかけめぐる

    병든 나그네 꿈은 겨울 들녘을 헤매이노라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 1473~1549)

    이세신궁내관(伊勢神宮內官)의 신관(神官). 일찍이 렝가(連歌)를 짓다가, 마침내 렝가를 속화(俗化)하여 하이카이(俳諧)를 제창, 야마자키 쇼오캉(山崎宗鑑)과 더불어 하이카이의 창시자가 되었다.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1644~1694)

    

      与謝蕪村이 그린 松尾芭蕉像

 

    20세기 초부터 구미 각국에 번역 소개된 에도 전기(江戶前期)의 세계적인 시인. 그는 여행을 즐긴 방랑의 자연 시인이며, 후세 배성(俳聖)으로 추앙을 받으며, 그 영향은 현재까지 하이쿠나 시에 미치고 있다. 이가 코오즈케(伊賀[三重縣]上野) 출신, 무가(武家)에 태어나 19세경 코오즈케의 성주(城主) 토오도(藤堂) 가에 가신(家臣)으로 출사(出仕)하고, 23세 때 쿄오토(京都)에 나가 키타무라 키킹(北村季吟)에게 하이카이(俳諧)와 고전을 배웠고, 1672년 에도(江戶)에 가서 방랑기우(放浪寄寓)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단린조(談林調) 하이진(俳人)으로서 활약했다. 1680년 겨울에 바쇼오암(芭蕉庵)에 들어갔다. 이 무렵부터 참선(參禪), 한때 사문(沙門)으로서 코오슈우(甲州)에 유우(流寓)하면서 대자연의 시정에 잠겼다. 에도에 돌아가(1683) 암(庵)을 다시 일으켰고, 그 해에 “쭉정밤(虛栗, みなしぐり)”을 완성했다. 1684-1685년의 “野ざらし紀行(きこう)”의 여행에서 쇼오후우(蕉風=正風)를 수립, 그 후 “가고시마(鹿島) 기행(紀行),” “笈(おい)の小文(こぶみ),” “經科紀行(さらしなきこう)”의 여행, 특히 겐로쿠(元祿) 2년(1689) “奧(おく)の 細道(ほそみち)”의 여행을 통해, 쇼오후우(蕉風)의 전개를 추진했다. 동북지방과 서북지방을 걸치는 여행 끝에 오오사카(大阪)에 이르러 발병해 사망할 때까지, 구집 “광야(曠野, こうや),” “猿蓑(さるみの),” 숯섬(炭俵, すみだわら) 등을 펴냈다. “旅に病んで夢は枯野をかけめぐる(병든 나그네 꿈은 겨울 들녘을 헤매이노라)”라는 기세(棄世)의 하이쿠를 남긴 채 문하생 쿄라이(去來), 시코오(支考) 등의 간호를 받으며 객사했다. 그는 데이몬(貞門), 단린(談林)파의 종래의 천박하고 조작적인 하이카이를 지양하고, 인생과 자연의 오의(奧義)를 읊은 대시인이며, 하이카이를 높은 예술의 수준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그의 문하에서 쇼오몬십철(蕉門十哲) 등의 많은 문인들이 나왔다. 그의 예술의 대표이념은 “寂(さび, 閑寂 枯淡의 美)”와 "輕(がる)み(일상다반사에서 취재하여 시적 승화를 겪은 平俗美)”와 "細(ほそ)み(句의 내용적인 깊이를 말하며, 幽玄한 경지에서 얻은 美)" 등이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1894~1963)

    아버지는 서리주(州) 고덜밍에 있는 차터하우스 학교 부교장이었고, 조부는 저명한 동물학자 T. H. 헉슬리이다. 시인·문예비평가인 M. 아놀드, 종교와 사회문제를 대담한 소설로 묘사한 햄프리 워드 부인은 그 외척이고, 생물학자 J. S. 헉슬리는 그의 형이다. 이러한 지적 환경 속에 태어나 이튼학교를 졸업한 뒤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웠다. 이튼 시절에 거의 실명(失明)에 가까운 안질을 앓은 탓으로, 당초에 마음먹었던 의학도의 길은 포기하였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를 출판한 이래 몇 권의 시집도 냈으나, 그가 소설가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것은, 소설 “크롬 옐로(1921)”가 인정을 받게 된 후부터였다. 기지(機智) 있고, 박식하며 염세적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관념소설이라는 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H. G. 웰스 등의 사실소설(寫實小說)이나 사회소설에 대한 하나의 도전장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 무렵 서로 알게 된 T. S. 엘리엇이 헉슬리에게 소설가가 되라고 권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음 소설 “어릿광대의 춤(1923)”은 생존의 의의를 상실한 삶의 권태 속에서 방황하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지식인과 유한부인(有閑夫人)을 묘사한 작품인데, 이것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하찮은 이야기(1925)”는 “크롬 옐로”의 세계를 이탈리아로 옮겨 놓은 느낌을 주는 소설인데, 다음 소설 “영원의 철학”에서 전개되는 사상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지칭되는 “戀愛對位法(1928)”은 갖가지 형의 1920년대 지식인들이 풍자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며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밖에도 일종의 <유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1932),”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가 자신을 그린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 폭력의 부정을 역설한 “목적과 수단(1937),” 제3차 세계대전을 가상한 가공소설(架空小說) “원숭이와 본질(1948)”을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고, “루당의 악마(1952),” “천재와 여신(1955)”에 이어 1962년 발표된 “섬”은 과학에 지배되지 않는 이상적인 유토피아 생활을 추구한 것이다. 그의 창작활동은 근대과학의 맹목적인 신뢰를 배경으로 하는 19세기의 안정된 모럴에 반대하여, 격동하는 20세기에 걸 맞는 모럴 탐구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모럴을 가지지 않은 모럴리스트”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모든 모럴을 부정하는 그의 작품이 사실은, 언제나 새로운 모럴의 실재(實在)에 대한 확신을 배경으로 한다. 넘치는 지성과 분방한 공상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교훈적인 인상을 풍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일면에서는 현실적인 인생의 현장교사(現場敎師)라는 풍모마저 느끼게 한다. 1937년 당시 나치스의 대두를 지켜본 그가 폭력을 부정하고 유럽이 현실적으로 선택해야 할 길을 가르친 평론집 “목적과 수단”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본질을 알게 하는 작품이다.


    3

    불역본 “芭蕉とその弟子の俳諧(바쇼우와 그 제자의 하이카이)”가 파리에서 출판되었을 때의 서평에서,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앙드레 떼리이브(André Thérive)는 바쇼우(芭蕉)에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퐁떼느(Jean de La Fontaine, 1621-1695. 프랑스의 고전파 시인, 우화시 작가)가 바쇼우(芭蕉)를 읽을 수 있었더라면, 아마 그도 바쇼우(芭蕉)와 같은 짧은 구를 남겼으리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하여튼 일본의 시인 바쇼우(芭蕉)는 그의 시대에 이미 프랑스의 같은 시대의 어느 시인보다도 훨씬 우수한 재능을 가지고 감각적인 우미(優美)함과 섬세함을 십분 표현할 수 있었던 시인이다. …이를테면, “亡(な)き人の小袖(こそで)も今や土用干(どようぼし), 죽은 사람의 평상복도 이제는 햇볕에 쬔다.”의 불역 “널어 말리는 옷/ 얼마나 작은 소매인가/ 죽은 아이의”이 겨우 열 두 마디의 시가 묘사적인 애가가 되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프랑스인 꾸슈(P. L. Couchoud)가 1905년에 파리에서 출간한 사가판(私家版)의 하이카이 시집 “강의 흐름을 따라서”는 서양인에 의한 최초의 하이쿠 시집이다. 그 속에 “한 손으로 세탁물(빨래)을 두들기면서/ 또 한 손이/ 이마 위의 머리칼을 치켜 올린다”라는 의미의 3행시가 있다. 비교문학자 W. L. 슈왈츠는, 이 단시가 바쇼우(芭蕉)의 “粽結(ちまきゆ)ふ片手(かたで)にはさむ額髮(ひたいかみ), 찐 떡을 묶는 한 손으로 치키는 이마 머리칼”의 구를 번안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B. H. 체임벌린의 번역(1902)으로 꾸슈(P. L. Couchoud)는 “粽結(ちまきゆ)ふ”를 번안한 것이었다. B. H. 체임벌린은 이 구를, “어느 마을의 축제에서, 시골 아가씨가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떡이나 과자, 엿을 팔면서, 자기 용태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그림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亡(な)き人の小袖(こそで)も今や土用干(どようぼし)

    죽은 사람의 평상복도 이제는 햇볕에 쬔다.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粽結(ちまきゆ)ふ片手(かたで)にはさむ額髮(ひたいかみ)

    찐 떡을 묶는 한 손으로 치키는 이마 머리칼.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4

    세르게이 아이젠쉬타인(Sergei M. Eisenstein)의 몽타주론은 영화예술의 이론으로서 유명하지만, 그는 몇 개의 논문에서 하이쿠를 인용하고 있다. 즉 “뜻하지 않은 것(1928년)”에서는, 그 첫머리에 “廣(ひろ)き野をただ一呑(ひとの)みや雉子(きじ)の聲, 넓은 들판을 한 입에 삼킬 듯이 우는 꿩 소리  -야메이(野明)”의 번역을 들고, “필름 언어(1934년)”에서는, “帆(ほ)をあぐれば岸(きし)の柳(やなぎ)の走りけり, 돛을 올리면 물가의 버드나무 달려가도다.  -若水(じゃくすい)”를 인용하고 있다.

    특히 그의 일본문화론이라 할 수 있는 "영화예술의 원리와 표의문자(1930년)”에서는, 카부키(歌舞伎)와 샤라쿠(寫樂)의 배우 그림(役者繪)과 하이쿠 및 탕카(短歌)에 언급하여, 일본의 전통예술에 몽타주의 수법이 현저하다는 것을 진술하고, “枯(かれ)枝に鳥(からす)のとまりたるや秋の暮, 마른 가지에 까마귀 앉아 있네 늦가을 저녁  -松尾芭蕉,” “明月(めいげつ)や畳(たたみ)の上に松の影, 중추명월에 다다미 위에 비친 솔 그림자여  -榎本其角(えのもときかく),” “夕風(ゆうかぜ)や水靑鷺(みずあおさぎ)の脛(すね)をうつ, 저녁 바람이여 냇물이 왜가리의 정강이 친다.  -与謝蕪村(よさぶそん),” “明方(あけがた)や城(しろ)をちりまく鴨(かも)の聲, 새벽녘이여 성곽을 둘러싸는 오리의 소리  -森川許六(もりかわきょりく)”의 4구를 열거하고 있다. 확실히 이러한 구(句)들은, 번역문으로 읽어보면, 모두가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될 만큼 영화적이다. 그는 하이쿠를 “집중된 인상파의 스케치”라고 한다.

    세르게이 아이젠쉬타인(Sergei M. Eisenstein)의 상기(上記)한 여러 논문은 “필름 포옴(1949년)”으로 영역되어 있다. 


    廣(ひろ)き野をただ一呑(ひとの)みや雉子(きじ)の聲

    넓은 들판을 한 입에 삼킬 듯이 우는 꿩 소리  -야메이(野明)

    帆(ほ)をあぐれば岸(きし)の柳(やなぎ)の走りけり

    돛을 올리면 물가의 버드나무 달려가도다.  -쟈쿠수이(若水)

    枯(かれ)枝に鳥(からす)のとまりたるや秋の暮

    마른 가지에 까마귀 앉아 있네 늦가을 저녁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明月(めいげつ)や畳(たたみ)の上に松の影

    중추명월에 다다미 위에 비친 솔 그림자여  -에노모토 키카쿠(榎本其角)

    夕風(ゆうかぜ)や水靑鷺(みずあおさぎ)の脛(すね)をうつ

    저녁 바람이여 냇물이 왜가리의 정강이 친다.  -요사 부송(与謝蕪村)

    明方(あけがた)や城(しろ)をちりまく鴨(かも)の聲

    새벽녘이여 성곽을 둘러싸는 오리의 소리  -모리카와 쿄리쿠(森川許六)


    요사 부송(与謝蕪村, 1716~1783)

    하이쿠의 거장이며 화가였다. 어릴 때 그림을 배우고, 에도(江戶)에 가서 하이카이를 배웠다. 요사 부송(与謝蕪村)은 단린파(談林派)에서 쇼우후우(蕉風)에로 옮겨 자기 자신의 작풍을 확립했다. 그 시기의 하이카이 중흥의 제일인자로서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와 더불어 하이카이 사상(史上)의 최고봉. 주로 사회, 인사(人事)에서 취재하여 화미(華美), 선명(鮮明), 인상 등을 중시하고, 이것을 자연미에 융합시켜 회화적 고전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분방자재(奔放自在)하고 호쾌한 어조, 윤이 나고 싱싱한 색채감, 착상의 묘미 등도 그의 특색이라 하겠다. 저작으로 “신하나츠미(新花摘),” “부송 칠부집(蕪村七部集)”등이 있다. 그림은 남종화(南宗畵)의 수업에 전심하여, 문인화가로서 크게 인정받았다.


    세르게이 아이젠쉬타인(Sergei M. Eisenstein, 1898~1948)

    

    몽타주 이론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옛 소련 감독. 1898년 라트비아 공화국에서 교양있는 부르주아 가문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젠쉬타인은 볼셰비키 혁명 가담 후 모스크바의 전위-혁명연극집단에서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대중과의 사상적 결합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예술의 역할은 관습적인 부르주아 예술의 전통을 공격하는 우상파괴의 힘을 발휘하는 데 있다고 보았으며, 부르주아 예술의 구태의연한 형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혁명적 미학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확신하였다.

    첫작품 “파업(1925)”에서 이미 대조적인 이미지의 결합에 의한 몽타주의 실제를 선보인 그는 혁명 20주년 기념작의 공식감독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이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전함 포템킨(1925)”이다. “어머니(1926),” “10월(1927)”을 발표한 후 1929년에 다큐멘터리 “옛 것과 새 것” 등을 제작하였으나 스탈린의 집권이후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당의 공식적인 예술 노선으로 공표되자 1935년 작가 동맹에서 형식주의자로 공식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알렉산더 네프스키(1938),” “이반 대제”1, 2부를 제작하였다. “이반 대제”는 러시아 제국의 최초 황제인 이반 4세가 러시아 통일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3부작 영화로 기획되었는데, 2부가 완성된 후 역사해석에 대하여 비판을 받아 상영이 금지되었다가 스탈린이 죽은 뒤인 58년에 공개되었다.

    아이젠쉬타인은 1948년 2월 11일 모스크바의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전함 포템킨(Bronenosets Potyomkin 1925)

    철저한 마르크시스트였던 아이젠쉬타인의 '충돌 몽타주'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이론을 영화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영화를 과학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영화의 선동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자신의 이론적 실험을 꾸준히 해냈다. “전함 포템킨”은 그의 초기 몽타주 이론을 실험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가 상영되자, 아이젠쉬타인은 물론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는 세계적 명성을 획득했고, 영화언어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05년 혁명 전야의 제정러시아가 이 영화의 배경. 흑해 선단의 일원인 전함 포템킨에서 장교들의 학대와 열악한 근무조건에 불만을 품은 수병들의 선상반란을 발단으로 시민들이 일어나 혁명의 대열에 함께 한다는 내용. 이 영화에서 특히 유명한 장면은 '오뎃사 계단에서의 학살'장면이다. 계단 밑으로 굴러가는 유모차와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의 표정, 군인들의 학살, 도망가는 군중, 군인들의 학살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는 사람 등의 다양한 모습은 쇼트간의 충돌로 인해 관객에게 긴장감을 환기시킨다. 이 장면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처블스”에서 직접적으로 패러디되기도 했고, 또 전함 포템킨에서의 영화기법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충돌 몽타주

    아이젠쉬타인은 평생의 경쟁자였던 동시대 러시아의 영화감독 프도프킨이 연속적인 화면들을 연속적인 액션으로 보이게 만드는 '연결 몽타주'기법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충돌하여 새로운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아이젠쉬타인의 몽타주이론은 '충돌 몽타주' 라고 정의된다. 충돌 몽타주는 독립된 두개의 쇼트의 이미지가 충돌하여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든다. 아이젠쉬타인은 자신의 이론적 근거로 한자의 예를 들었다. 한자의 견(犬)과 구(口)라는 두 개념이 모여 짖다(口犬)는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데, 여기서 두개의 이질적 요소인 '개'와 '입'의 합성으로 읽는 사람은 '짖다'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연상한다. 이것이 아이젠쉬타인의 충돌 몽타주의 원리다.


    5

    영국의 이미지스트파의 시인 F. S. 프린트는, 1908년 7월 11일부터 영국의 주간신문 「뉴에이지」에서 요사 부송(与謝蕪村)의 “寂(さび)として客の絶(だ)え間のぼたんかな, 괴괴하게도 손님 끊긴 사이의 모란이로구나”를 인용하고 있다.

    그는 일본시가의 영역집 “칼과 꽃”이라는 책의 서평문에서 “일본인은 예술적인 암시를 포착하는데 민감하다고 듣고 있다,” “완전한 묘사가 아니고 시사(示唆)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가 상기된다고 하였다. 또 “단 하나의 말이 일본인에게 온갖 연상(聯想)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시의 전형인 다음의 하이카이를 생각해 보라. “홀로 방에 있으며/ 손님은 가버렸다-/ 모란꽃,” “떨어진 꽃잎이/ 가지로 날아 되돌아간다/ 아아! 나비(落花枝に歸と見れば胡蝶かな의 번역)”라고 기술하고, 맨 마지막에 “이들 일본인과 같이 마음의 음악의 미묘한 단편(斷片)을 포착하여 표현할 수 있는 시인에게 미래는 열려져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寂(さび)として”의 구는 프랑스인 P. L. 꾸슈에 의해 번역된 것이다.


    寂(さび)として客の絶(だ)え間のぼたんかな

    괴괴하게도 손님 끊긴 사이의 모란이로구나  -요사 부송(与謝蕪村)


    6

    아르 마이너는 “영미문학에 있어서의 일본의 전통” 속에서, 요사 부송(与謝蕪村)의 “つり鐘(がね)に止まりて眠る胡蝶かな, 범종에 앉아 하염없이 잠자는 나비로구나”가, 미국 여류시인 에이미 로우얼(Amy Lowell, 1874~1925. 이미지즘파)의 3행시 “대포의 포구에 앉아서/ 노랑나비가 날개를 천천히/ 펴고 접고 있다(1918)”에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에이미 로우얼(Amy Lowell)은 이렇게 절간에 흔히 걸어놓은 범종을 대포로 바꾼 셈이었다.

    이 구에는 언제 어느 때 중이 와서 범종을 당목(撞木)으로 칠지 모른다. 그때 나비는 놀라며 허둥지둥 날아 오를 것이라는 이치 때문에, 하이쿠로서는 썩 좋은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에이미 로우얼(Amy Lowell)의 시에도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나 대포가 불을 뿜고 나비가 도망칠지 모른다는 우의(寓意)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3행시기 쓰인 것이 제1차 대전 중 또는 그 직후이며, 제목도 “평화”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비와 포화의 이미지는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라스트 신을 생각나게 한다.

    이 구는 래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 小泉八雲; こいずみ やくも, 1850~1904)에 의해 “괴담(怪談; かいだん、くゎいだん、 Kwaidan, 1904)” 속의 “나비”의 장에서, 최초로 영역되었다. くゎいだん(怪談)은 그의 일본인 처 節子(せつこ)의 출신지인 島根県의 出雲(いずも) 지방의 방언.


    つり鐘(がね)に止まりて眠る胡蝶かな

    범종에 앉아 하염없이 잠자는 나비로구나  -요사 부송(与謝蕪村)


    7

    이미지스트파 시인 J. G. 플레처의 “이레이디에이션즈(知的光明, 1915)”에 있는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빛나는 보도에 반짝인다/ 갑자기 질주하는 많은 우산들/ 폭풍에 흔들려 화관(花冠)을 굽히는 꽃들”이라는 일절은, 요사 부송(与謝蕪村)의 “春雨(はるさめ)や物語りゆく蓑(みの)と傘. 봄 부슬비여 이야기하며 가는 도롱이와 우산”에 힌트를 얻어 쓴 것이라고 한다(아르 마이너, “영미문학에 있어서의 일본의 전통”).

    요사 부송(与謝蕪村)의 구는, 촉촉이 내리는 봄비 속에 도롱이와 우산을 쓴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읽혀지지만, J. G. 플레이처는 질주하는 박쥐우산(색채가 있다)을 폭풍에 흔들리는 꽃의 이미지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B. H. 체임벌린은 이 구의 春雨(はるさめ)를 스프링 샤워(봄 소나기)로 번역했는데(“재퍼니스 포에트리, 1910”), 그것을 J. G. 플레이처가 읽은 것 같다.


    春雨(はるさめ)や物語りゆく蓑(みの)と傘

    봄 부슬비여 이야기하며 가는 도롱이와 우산  -요사 부송(与謝蕪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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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시의 입문으로 하이쿠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영역된 하이쿠의 단소성(短小性), 연체시(Blank verse)로서의 간결함 때문이다.

    뉴욕의 초등학교에서 아동에게 시 쓰는 법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케네스 콕은, “장미여, 너는 어디서 그 빨간색을 얻었는가(1973)속에 하이쿠를 다섯 구 들어(松尾芭蕉, 正岡子規 등), “아주 짧은 시를 쓰는 것은, 서너 개의 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만약 적절한 선, 즉 말을 선택하면 매우 즐겁고 또한 별다른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고 해설하고 있다.

    또 오오시마 료오타(大島蓼太, 1718-1787)의 “ものいはず客と亭主(あるじ)と白菊(しらぎくと), 아무 말 없네 손님도 주인도 흰 국화꽃도”의 구를 “모두 잠자코 있었다/ 주인도 손님도/ 흰 국화꽃도”라는 영시(미국의 시인 K. 렉스로드 역)로 번역한 예에 대해, “하나만 의외의 것이 들어가도록 단어를 늘어놓아 보세요. 이 시에서는 흰 국화가 그것입니다. 국화는 말을 못하니까”라고 말하고, 이 하이쿠와 같이, “내게는 동무가 셋 있다/ 제인과 세러와 단풍나무”라고 쓰면, 재미 있는 시가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오시마 료오타(大島蓼太)의 하이쿠의 묘미를, 아동 상대로 해설한 예이다. 


    ものいはず客と亭主(あるじ)と白菊(しらぎくと)

    아무 말 없네 손님도 주인도 흰 국화꽃도  -오오시마 료오타(大島蓼太)


    9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에는, 번역되어서 도리어 광채를 띠게 되는 구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人も一人蠅(はえ)もひとつや大座敷(おおざしき), 사람도 하나 파리도 한 마리여 넓은 응접실”라는 구는 “One man/ and one fly/ waiting in huge room.”으로 1972년에 W. H. 코헨에 의해 번역되었지만, 이 단시를 읽으면, 큰 객실에서 주인이 나오는 것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남자손님과 그 주위를 날아다니는 파리의 정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더욱이 인간과 파리가 완전한 평등 및 동렬로 다루어져 있다. 이것이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소동물을 읊은 구의 특징인 것이다.

    미국의 우수한 현대시인 로버트 브라이는, 시집 “바다와 꿀벌의 집(1971)”에서,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구 10수를 번역하고, 그 권말 노트에서,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세게에서 가장 위대한 개구리의 시인, 가장 위대한 파리의 시인, 그리고 아마도 가장 위대한 아동시의 시인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에는 하이쿠를 쉬운 영어로 번역한 아동용 그림책이 몇 종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은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이다.


    人も一人蠅(はえ)もひとつや大座敷(おおざしき)

    사람도 하나 파리도 한 마리여 넓은 응접실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7)

    북시나노(北信濃-長野縣) 카시와바라(柏原)의 농가에서 태어나, 3세 때 생모를 사별하고, 계모 밑에서 불행하게 자랐다. 14세 때 조모가 죽었고, 이듬해 에도(江戶)에 나와 10년간 유랑생활을 했는데, 이 동안에 갖은 신산(辛酸)을 겪고 빈곤과 싸우면서도 하이카이에 전념했다. 39세 되던 여름에 부친이 죽음으로써 고향에 돌아갔으며, “父の終焉日記(しゅえんにっき, 아버지의 종언일기)”를 썼다. 부친 사망 후, 계모 및 이복동생과 유산문제로 10여 년간 싸우다가 겨우 해결되어, 고향에 돌아와 52세 때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나 연달아 모두 요절하고, 61세 때 아내도 죽었다. 게다가 화재로 집마저 소실하여, 타다 남은 흙광 속에 기거하다가 65세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구에는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인간과 생활이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야성적인 생활과 하이진(俳人)으로서 당시의 배단(俳壇)에 이채를 띄웠다. 일생을 역경과 불행 속에서 지냈으므로, 정통적인 풍아관(風雅觀)에 매이지 않고, 속어, 방언을 대담하게 구사했는데 이러한 하이쿠 풍은 잇사조(一茶調)라고 불린다. 구수는 2만구에 가깝고, “七番日記” 기타의 구일기(句日記)에 극명하게 필록되어 있으며, 배문(俳文)의 대표작은 “おらが春(1852, 57세의 원단에서 세말까지 하이쿠로 쓴 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