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영민(문학박사, 충남대 영문과 교수)


I. 서  론


미국 모더니스트 시는 1910년을 전후하여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가 관여한 이미지즘 시 이론에 의해 시작되었다. 1946년 9월호의 "시"(Poetry: A Magazine of Verse)에 기고한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의 평론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에 따르면, 20세기 첫 14년간 미국 시문학계는 침체기에 빠져 “완전한 공백 상태”였다. 이 때 파운드가 “이런 상황을 파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가 나아갈 방향을 알고” 시의 형식과 시의 언어에 대한 일대 변혁을 시도했다. 다행히도 파운드는 시를 하나의 예술, 그것도 “상당히 의식적인 예술”로 파악한 독창적인 비평가였다(17, 21, 24, 20). 엘리엇은 이보다 7년 후인 1953년 6월 9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에서 행한 「미국 문학과 미국 언어」(“American Literature and the American Language”)라는 강연에서 미국의 현대시가 1910년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고 주장했으며(To Criticize the Critic 58), 1954년 "에즈라 파운드의 문학 평론"(Literary Essays of Ezra Pound)에 붙인 서문에서 “20세기 시의 혁명은 어느 누구보다도 파운드의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LE xi). 이와 같은 엘리엇의 주장은 1910년경 출현한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엘리엇의 평가대로 파운드는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죽은 시의 예술을 부활시키고/옛 의미에서의 ‘숭고함’을 유지하기 위한” 과거의 모방 기법을 버리고, 이미지즘 시 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의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SP 61).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 이론이 주창된 이래 이 이론에 대한 논의는 많았으나, 이 이론이 일상 언어를 시어로 써야 한다는 파운드의 주장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느냐에 주목한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여기서는 파운드의 시어 개념에 주목하면서 그의 이미지즘 시 이론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프랑스 상징주의가 이미지즘 출현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파운드는 상징주의자들의 상징은 산수에서 말하는 아라비아 숫자처럼 “고정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미지스트들의 이미지는 대수에서 말하는 기호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논하면서 이미지즘과 상징주의가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Gaudier-Brzeska 84). 그러나 그는 당시의 이미지즘 시운동에 대해 언급하면서 “영시의 역사는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성공적으로 훔쳐 낸 역사”라고 지적함으로써 이미지즘과 상징주의의 상관관계가 긴밀했음을 부인하지는 않았다(Wellek, 5: 154에서 재인용). 상징주의 기법이 레미 드 구르몽(Rémy de Gourmont, 1858-1915)을 거쳐 T. E. 흄(T. E. Hulme, 1883-1917)에게 전달되면서 이미지 기법으로 재현되었고, 흄의 이미지 시 기법이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상징주의가 이미지즘 시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셈이지만, 프랑스의 상징주의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의 시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휘트먼이야말로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II. 파운드 시학의 기초가 된 흄의 이미지 이론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 말다툼에 휘말려 1904년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런던에서 얼마간 지내던 흄은 캐나다, 브뤼셀 등지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다가 1908년 영국으로 돌아와 헨리 심프슨(Henry Simpson), 헨리 뉴볼트(Henry Newbolt) 등과 함께 소위 “시인 클럽”을 만들어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인 클럽 회원들은 주로 수요일 저녁에 만나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며 자신들의 시를 낭송도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토론도 하는 동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흄은 이 시인 클럽 회원들의 시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진부하다는 F. S. 플린트의 공격이 A. R. 오레이쥐(A. R. Orage)의 편집으로 출간되고 있던 주간지 "신시대"(The New Age)의 1909년 2월호에 실리자 이 공격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이 시인 클럽과 결별하고 같은 해 3월 25일 플린트를 비롯하여 엣워드 스토러(Edward Storer), F. W. 탠크렛(F. W. Tancred) 등과 함께 새로운 시인 클럽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시인 클럽 회원들은 런던 소호(Soho)의 한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며 히브리 성경에 사용된 시 형식,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일본 하이꾸(haiku) 시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 기법과 간결하고 정확한 시어, 자유시 형식 등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이 시인 클럽에 파운드가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고 소위 이미지즘이라는 시 운동이 여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흄의 이미지 시 기법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철학적 미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1910년경부터 차츰 시에서 철학과 미술로 관심을 돌린 흄은 1911년 4월 볼로냐(Bologna)에서 개최된 철학 학회에 참석하여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논하는 이미지 개념에 이끌리게 된다. 귀국하여 그는 베르그송의 철학적 이미지 미학을 4월 27일자의 "신시대"에 소개하고 그 해 11월 23일과 12월 14일 사이에는 베르그송의 미학에 대한 일련의 강의를 하였다. 파운드가 이 강연을 경청하고 후일 이미지즘 시학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흄이 바로 파운드의 이미지 미학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해 준 장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Stock 133-134). 흄은 1912년 여름에 행한 「시에 나타난 새로운 예술 철학」(“The New Philosophy of Art as Illustrated in Poetry”)에 대한 강연과 1913년에 행한 베르그송에 대한 일련의 강연, 그리고 1914년에 있었던 현대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강연을 통해 고전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구체화시켰다. 또한 그는 1912년 독일로 건너가 9개월 간 머물며 독일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런던으로 돌아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 입문"(Introduction to Metaphysics)을 번역하여 1913년에 출판했다. 「시간과 자유의지」(“Time and Free Will”)에서 시인을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 자”라고 했던 베르그송의 정의에 따라(Coffman 56에서 재인용), 흄은 「현대시에 대한 강연」(“Lecture on Modern Poetry”)에서 시인을 정의하여 자신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 자연 풍경에서 얻은 “어떤 이미지들”을 별개의 시행에 병치시킴으로써 자신의 느낌을 “환기시키는” 자라고 했다(Coffman 56에서 재인용).

흄의 평론 「베르그송의 예술 이론」(“Bergson’s Theory of Art”)은 그의 이미지 미학이 베르그송에게서 왔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베르그송의 예술 이론」에 따르면, 베르그송에게 “실제”는 “지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요소들의 도도한 흐름”이며, 예술은 “실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매개물이다. “인간의 지각은 어떤 선을 따라 굳어져 버리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어떤 고정된 습관, 어떤 고정된 방법”이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는 외적 대상과 우리의 내적 상태를 지각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어떤 음악,” 즉 “생명의 리듬”이 흘러나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듣지 못한다. 인간의 지각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 있는 모든 말도 처음엔 살아 있는 은유로 시작되지만 거기서 모든 시각적 의미가 서서히 사라져 버리고 일종의 통속어가 되고 만다.” 그러나 “창조적인 예술가”는 겉을 둘러싸고 있는 흐름의 베일을 뚫고 “내적 흐름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가 고정시킬 새로운 모양의 것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은유”이며, 이 은유가 바로 “사물을 도식화된 형태로 표현하는” 인습화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의 “미적 정서”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새로운 은유일지라도 그것들은 일단 사용되고 나면 곧 신선한 의미, 즉 “시각적 의미”를 상실하고 “일종의 통속어”로 전락하고 만다. 따라서 시인은 “자기를 억압하고 있는 언어와 일반적인 지각의 힘을 벗어 던지고” 계속하여 사물의 내적 생명을 드러낼 ‘새로운 은유’를 찾아내어 “단지 언어 속에 형상화되어 축적된 형상만 보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물의 그 내적 생명의 미묘한 움직임은 물론 그 물질적 세계의 형태, 소리 그리고 색을 본래의 순수한 상태대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관찰한 사물이나 느낀 감정을 감각적․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하는 시는, 대수학에서의 기호처럼 도식화된 표준적인 형태만을 사용하여 “어떠한 이미지”도 제시하지 않는 산문과 다르다. 이런 신념에서 베르그송은 예술은 “특수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을 보여 주는 것”이며, 예술가는 “사물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자”라고 정의했다. 흄은 이 베르그송의 예술론이 예술을 “무한을 유한으로 계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로센스타인(William Rothenstein)의 견해와 예술을 “의지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이데아를 순수하게 관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지적했다(Speculations 143-169).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미학에 기초한 흄의 이미지즘은 주로 이미지의 시각적 요소를 중시하고 있지만, 코프만(Stanley Coffman)은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의 견해에 따라 흄이 시에서 운율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통적인 운율보다는 자유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2).

흄의 이미지즘 기법은 베르그송에서 얻어온 것이지만, 이미지즘의 사상은 그가 프랑스의 조르즈 소렐(George Sorel), 샤를르 모라스(Charles Maurras) 등의 고전주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렐의 고전주의 개념이 잘 표명된 "폭력에 대한 재고"(Reflections on Violence)가 그의 번역에 의해 1916년에 출판되었으며, 그 전해인 1915년 10월 14일자의 "신시대"에 이 번역에 붙일 그의   「번역자의 서문」이 발표되었다. 이 서문에서 그는 소렐의 고전주의 개념이 “인간은 천성이 나쁘거나 아니면 한계를 지닌” 존재라고 믿는 “원죄” 개념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했다(Speculations 256). 그리고 그는 그 해 12월 9일부터 1916년 2월 10일까지 소렐과 모라스로부터 터득한 이와 같은 종교적 고전주의에 대한 평론들을 「T. E. H.에 의한 노트북」(“A Notebook by T. E. H.”)이라는 제목으로 "신시대"에 연재했는데, 그의 "고찰: 휴머니즘과 예술철학에 대한 평론"(Speculations: Essays on Humanism and the Philosophy of Art)에 수록된 「인본주의와 종교적 태도」(“Humanism and the Religious Attitude”)는 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 평론에 따르면, 절대자인 신만이 완전하고 “인간은 원죄를 타고난” 불완전한 존재로서 “저주받은 창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인본주의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혼동하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훈련에 의해서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을 뿐이며,” 또한 “인간은 때로 완전에 참여하는 행위를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질서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제도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흄은 인간이 완전하다는 개념에 기초하여 “개성을 신뢰하는” 잘못된 인본주의를 거부하고 “원죄의 교리”에 기초한 기독교의 비인간적인 “종교적 태도가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 터무니없는 개성이라는 것”을 신봉하는 인본주의가 만들어 낸 예술이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이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절대신 앞에 엄숙하게 무릎을 꿇는 종교적 태도가 만들어낸 것이 이집트와 인도와 비잔틴 시대에 출현한 모나고 딱딱하며 건조한 예술이라고 결론지었다(Speculations 3-71). 

「인본주의와 종교적 태도」라는 평론이 인본주의적 태도와 종교적 태도의 차이점에 기초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예술의 출현을 조명한 것이라면, 「낭만주의와 고전주의」(“Romanticism and Classicism”)는 이 두 태도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문학의 출현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를 밝힌 평론이다. 이 평론에서 흄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개념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논지를 명쾌하게 하기 위해 그 정의를 아주 단순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인간은 천성이 선하기 때문에 사회의 “악법과 인습”을 제거하면 “그의 무한한 가능성”이 발휘되며 사회도 진보하게 된다는 루소(Rousseau)의 인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하나의 저수지,” 즉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수원지”라고 보는 루소의 견해를 따르는 인본주의자를 낭만주의자라고 불렀다. 낭만주의자는 인간을 신이라고 생각하여 신을 믿지 않으며, 또한 하늘 나라의 천국 대신에 이 지상의 천국을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흄은 낭만주의를 “분열된 종교”라고 불렀다. 이런 낭만주의적 인본주의 견해가 인간의 원천적 타락을 설파하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억압당한 결과로 고전주의가 생겨났다고 흄은 보았다. 플로렌스(Florence)의 사보나롤라(Savonarola), 제네바의 칼뱅(Calvin), 17세기의 영국 청교도들처럼, 인간은 “그 천성이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특이하리 만치 고정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는 동물”이며, 인간이 얼마간의 품위를 지니려면 “오로지 전통과 조직에 의해” 훈련받아야 한다는 종교적 태도를 가지는 사람을 흄은 고전주의자라고 불렀다. 흄은 이와 같은 고전주의적 견해가 “조그마한 변이들이 축적되어 새로운 종이 생겨났다”는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의 등장으로 잠시 흔들렸으나, “각각의 새로운 종은 짧은 걸음들이 축적되어 서서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스포츠인 한번의 도약으로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며, 일단 생겨나면 절대 고정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는 드 브리스(De Vries)의 돌연변이설에 힘입어 오늘날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Speculations 113-140).  

이와 같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개념에 기초하여 흄은 자신의 미학 이론을 전개했다. 흄은 “아름다움의 개념”에 대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해석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낭만주의자는 인간의 신성을 신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한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만, 고전주의자는 인간의 한계성을 믿기 때문에 “작고 건조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낭만주의 시인은 시에서 “비상의 은 들”을 사용하지만, 고전주의 시인은 “결코 한계성을 잊지 않고 . . . 언제나 한계의 개념에 충실하며” 또한 “지상과 얽혀 있음을 명심하고, 뛰어오르더라도 언제나 되돌아오며, 결코 에워싼 공기 속으로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 흄이 옹호하는 고전주의 문학은 “어떤 표준적인 고정된 양식에의 순응”을 지향하며, 고전주의 시인은 “자신이 보는 것을, 그것이 어떤 사물이든, 마음 속에 있는 어떤 생각이든 간에,” 잘 통제된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정확한 곡선”을 정밀하게 그려내려고 한다. 고전주의자에게 시란 시인이 느끼는 순간적인 인상을 “물질적인,” 즉 “시각적인” 이미지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해 낸 것이며, “시에서의 이미지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언어의 정수 그 자체다”(Speculations 120-135). 흄의 “이미지” 시는 단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전통적인 시의 규칙적인 운율은 무시되고 자유로운 운율이 허용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흄은 시를 청각적인 “음악”보다는 시각적인 “조각”에 근접시키려 했다. 「현대 예술과 그 철학」(“Modern Art and Its Philosophy”)이라는 평론에서 보듯이,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예술”은 “살아 있는 유기체적인”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것이다. 그는 예술을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인본주의가 지배했던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유기체적 예술 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고대 이집트와 비잔틴 시대의 종교적 태도가 낳은 기하학적 예술 양식이다. 그리스와 르네상스 예술에서는 “부드럽고 살아있는” 선을 사용하지만, 이집트나 비잔틴의 예술에서는 “모든 것이 각지고, 곡선도 딱딱하며 기하학적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육체마저 종종 완전히 죽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다양한 종류의 굳은 선과 입체적인 모양에 맞도록 뒤틀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대 예술이 살아 있는 유기체적 예술 양식에서 기하학적인 모자이크 예술 양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현대에 접어들어 인간을 “일종의 비인간적인 기계”로 파악하는 새로운 감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라고 흄은 주장한다(Speculations 75-109). 그가 「베르그송의 예술론」(“Bergson’s Theory of Art”)에서 작품에 사용된 언어로서 시와 산문을 구분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산문은 “계수 언어”를 사용하고 시는 “직관 언어”를 사용한다. 계수 언어를 사용하는 산문은 사물을 시각적으로 제시해 주지 못하며 독자로 하여금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반면에, 시는 “직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감각을 구체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흄은 시인이 “사물의 정확한 곡선을 얻기 위하여” 계수 언어인 인습적인 언어를 피하고 “새로운 은유의 덩어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유의 덩어리를 사용하는 시적 기법이 바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언어의 기법으로서 흄의 이미지즘의 요체이다(Speculations 143-169). 결국, 흄의 이미지 미학은 베르그송의 이미지 철학과 소렐, 모라스 등의 고전주의 개념의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다.



III. 파운드의 이미지스트 시학


흄이 시각적 이미지 시의 출현에 기여했다면, 파운드는 거기에 청각적 요소를 추가하여 이미지 미학을 보다 진일보시켰다고 할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과 해밀턴 대학에서 고대 영어, 프로방스 어, 프랑스 어, 독일어, 이탈리아 어, 스페인 어, 그리스 어, 라틴 어 및 중세사 등을 두루 공부한 파운드는 1906년 로망스 어를 전공하여 석사를 받은 다음 바로 그 해 스페인 시인 로페 드 베가(Lope de Vega, 1562-1635) 연구를 위한 장학금을 받게 된다. 유럽에서 자료 수집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1907년 인디애나 주 크로포즈빌(Crawfordsville) 소재의 워배쉬(Wabash) 대학에 로망스 어 교수로 초빙되어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유 분방한 생활 때문에 6개월도 못 채우고 학교를 그만 두게 되자 차제에 로페 드 베가의 연구를 마무리짓기 위해 1908년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 해 여름을 베니스에서 보내면서 그는 미국을 떠나기 전에 쓴 시들을 모아 시집 "희미한 빛"(A Lume Spento)을 출판하였다. 첫 시집이 출판되면서 박사 학위를 위한 연구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그 해 가을 런던으로 건너가 1909년 4월 22일 시 「세스티나」(“Sestina: Altaforte”)를 선보이며 흄의 소호 시인 클럽에 가담했다. 1912년 초 F. S. 플린트로부터 구르몽의 작품을 소개받은 그는 구르몽의 "사랑의 자연 철학"(The Natural Philosophy of Love)(1926)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사랑의 자연 철학"을 번역하며 그는 성과 시 창작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구르몽의 이론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구르몽의 "문체의 문제"(Le Problème du Style) (1902)를 통해 프랑스 상징주의의 기법에 매료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삼는 “알몸의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SPR 386, LE 340).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흄이 추구했으나 아직 문학 이론으로 정립하지 못한 간결하고 명확한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시적 기교에 대해 리처드 올딩턴(Richard Aldington), 에이취 디(H. D., Hilda Dollitle) 등과 함께 켄싱턴(Kensington) 가에 있는 찻집에 모여 논의했다. 이 때부터 파운드는 차츰 시보다는 철학으로 관심을 돌린 흄을 대신하여 시인 클럽을 이끌게 되었다. 그의 노력에 의해 "신시대"에 실렸던 흄의 시 5편과 시인 클럽 회원들의 시를 함께 수록한 시집 "반론"(The Repostes)이 1912년 10월 출판되었다. 이 "반론"의 부록으로 수록된 흄의 시에 대한 서문에서 파운드는 여기에 시를 수록한 시인들을 “이미지 학파”에 속한 시인들이자 흄의 “1909년의 잊혀진 학파의 후계자”로서 “이미지스트들”(Les Imagistes)이라고 불렀다(P 266). 이것이 소위 “이미지즘”(Imagism)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발점이다.

"반론"과 더불어 이미지즘 시 운동의 중추적 인물로 부상한 파운드는 1912년 10월 시카고 사업가들의 재정적 지원과 해리엇 먼로(Harriet Monroe, 1860- 1936)의 편집에 의해 시 전문지 "시"가 시카고에서 창간되면서 먼로의 요청에 따라 이 저널의 해외 주재 특파원이 되었다. 그 해 8월 해외 특파원으로 활동하겠다는 수락 편지와 함께 보낸 그의 시 두 편이 "시"의 창간호에 실렸고, 그가 9월에 먼로에게 보냈던 올딩턴의 시 세 편이 "시"의 두 번째 호인 1912년 11월호에 게재되었으며, 10월에 보냈던 에이취 디의 시 세 편이 그의 주해와 함께 "시"의 1913년 1월호에 실렸다. 특히 에이취 디의 시에는 파운드의 권유에 따라 “이미지스트, 에이취 디”(H. D., Imagiste)라는 서명을 붙이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이미지스트”라는 명칭이 비로소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의 1913년 3월호에 그가 에이취 디 및 올딩턴과 함께 설정한 새로운 시의 세 가지 원칙을 담은 「이미지즘」(“Imagisme”)이라는 제목의 글이 F. S. 플린트의 이름 아래 발표되고, 그 자신의 이름으로 된 「이미지스트에 의한 몇 가지 금기 사항」(“A Few Don’ts by an Imagiste”)이 담긴 평론 「회고」(“A Retrospect”)가 함께 발표되면서 “이미지즘”은 하나의 새로운 시 운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이미지즘”(Imagisme)이라는 말과 “이미지스트”(Imagiste)라는 말이 프랑스 어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은 이미지즘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서 생겨났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운드의 이미지스트 미학은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라는 두 가지 측면을 다 포함하고 있다. 파운드가 1914년 5월호 "시"에 기고한 W. B. 예이츠(W. B. Yeats)의 "책임들"(Responsibilities)에 대한 서평에서 “예술의 최고의 기능은 고귀하리 만치 풍부한 소리와 이미지로 마음을 채워 주는 것”이며, 시에는 음악을 지향하는 시와 조각이나 그림을 지향하는 시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겐, 가장 ‘시적인’ 두 종류의 시가 있어 왔다. 첫째는 음악이 스스로 또렷한 언어로 변모해 들어가는 것 같은 종류의 시이고, 둘째는 마치 조각이나 그림이 언어로 변모해 들어가는 것 같은 종류의 시이다. (LE 380) 

 

이처럼 이미지의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 둘 다 중요시했던 파운드는 이미지즘 시 운동이 에이미 로우얼(Amy Lowell)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차츰 정적인 시각 이미지 창출에만 매달려 인상주의로 흐르게 되자, 이미지즘이 “에이미지즘” (Amygism)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비난하며 이미지즘 시 운동과 결별해 버렸다. 

로우얼은 먼로의 권유로 1913년 1월호 "시"에 실린 에이취 디의 시 몇 편을 읽고 스스로를 “이미지스트”라고 생각하고는 먼로의 추천서를 소지하고 그 해 여름 런던으로 건너가 파운드의 이미지스트 시인 그룹에 가담했다. 그녀는 1914년 4월호 "시"에 8편의 이미지스트 시를 기고했으며, 같은 해 파운드는 로우얼의 시를 포함하여 올딩턴, 플린트, 파운드, 에이취 디,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등의 시가 수록된 시 선집 "이미지스트들"(Des Imagistes)을 출판했다. 로우얼은 그 해 7월 17일 이미지스트 시인들을 위한 소위 “이미지스트 만찬”을 베풀고, 이 자리에서 이미지스트 선집을 5년간 매년 발행한다면 경제적 뒷받침을 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9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지원 아래 1915년 첫 번째의 이미지스트 시집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Some Imagist Poets)이 출판되었으며, 이 시집의 서문에 올당턴이 쓰고 로우얼이 수정한 다음 여섯 개의 이미지즘 원칙이 제시되었다.  


1. 일상 용어를 사용하되, 거의 정확한 단어나 단지 장식적인 단어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확한 단어를 사용한다. 

2. 새로운 분위기를 표현해야 하므로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도록 하고 단순히 옛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는 옛 운율은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시를 유일한 시작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자유의 원칙을 위해 싸우듯이 자유시를 위해 싸운다. 시인의 개별적인 특질은 인습적인 형식으로보다는 자유시로 보다 더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시에서 새로운 운율은 새로운 생각을 뜻한다.

3. 시 제재의 선택에 있어서는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비행기와 자동차에 대해 나쁘게 쓰는 것이 좋은 예술이 아니듯이, 과거에 대해서 잘 쓰는 것이 반드시 나쁜 예술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대 삶의 예술적 가치를 열정적으로 신뢰하지만, 1911년의 비행기만큼 감격적이지 않은 것도 없고 그렇게 구식인 것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4.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여기서 “이미지스트”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우리는 화가의 집단이 아니지만, 시는 아무리 거창하게 울려 퍼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애매한 일반적인 것을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예술의 진정한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적 시인에 반대한다.  

5. 흐릿하거나 확실하지 않은 것은 완전히 배제하고 딱딱하고 명료한 시를 쓴다. 

6. 끝으로, 우리 대부분은 압축이 바로 시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Coffman 28-29에서 재인용)


로우얼은 이 첫 번째의 이미지스트 시집에 자신의 시가 한 편 밖에 실리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다음 출판될 시집부터는 각 시인들의 시가 평등하게 실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녀의 주도 아래 1916년에 출판된 두 번째의 이미지스트 시집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에 각 시인마다 지면을 고르게 분배받았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시를 “지성인들 사이의 의사전달” 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LE 55), “어떠한 예술도 대중의 눈을 바라다봄으로써 성장한 적이 없다”고 믿었던(L 4) 파운드에게는 이러한 로우얼의 처사가 못마땅했다. 이미지즘 시 운동은 이런 내부의 갈등과 그 이론 자체의 편협성과 지나친 단순화 때문에 더 발전하지 못하고 1917년 세 번째로 출간된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을 끝으로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파운드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석사 과정에서 프로방스 문학을 공부하며 시는 간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흄의 시인 클럽을 드나들며 이미지 창출이 시의 핵심 요소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다음 그의 이미지 시 기법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은 1913년부터 1916년 사이에 예이츠의 비서로 세 번의 겨울을 스토운 코티지(Stone Cottage)에서 함께 보내면서 알게된 일본의 “노”(Noh) 연극의 일관된 이미지 기법이다. 그는 1913년 후반 미국의 철학자이자 동양 예술사가인 어니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 1853-1908)의 일본 및 중국의 문학 관련 평론 "시의 매체로서의 중국문자"(The Chinese Written Character as a Medium for Poetry)의 원고를 그의 미망인 메리 맥닐(Mary McNeil)의 부탁을 받고 정리하면서 일본의 “노” 연극은 물론 중국의 상형 문자에서도 다시 한번 이미지 시의 가치를 확인하였다. 이미 일본의 “하이꾸”(haiku) 시가 지닌 이미지의 간결성과 암시성에 익숙해 있던 파운드는 이 원고의 출판을 위해 편집하면서 의미를 시각적인 그림으로 제시하는 중국어의 응축된 표의 문자와 역동적인 언어 배열이 자연 현상에서 직접 얻어온 이미지라는 것과 이런 이미지가 시에 적합한 이상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표의 문자가 어떤 소리의 그림이 되려고 하거나 어떤 소리를 상기시키는 문자 기호가 되려고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물의 그림이 되고, 어떤 주어진 위치나 관계 속에 있는 사물, 혹은 사물들의 혼합을 나타내는 그림이 된다. 그것은 사물, 행동, 혹은 상황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묘사하는 몇 가지 사물에 긴밀하게 관련된 특성을 의미한다. (ABCR 21)


이처럼 “물질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비물질적인 것들을 암시하는” 중국의 상형 문자는 파운드에게 적절한 시의 언어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가장 훌륭한 시는 자연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고귀한 사상과 정신적인 암시와 모호한 관련들도 다루기” 때문이다(CWC 21-22).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중국의 상형 문자에서(ABCR 21) 파운드는 후일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의 그림과 앙리 고띠에-브르제스카(Henri Gaudier-Brzeska)의 조각에서 발견하게 될 소용돌이와 같은 역동적인 이미지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파운드에게 중국은 “새로운 그리스”였다(LE 215). 파운드는 자신의 중국 시 번역본 "중국"(Cathay)(1915)이 발표된 얼마 후 역시 페넬로사가 남긴 일본의 “노”(Noh) 연극의 번역을 손질하면서 긴 소용돌이 이미지의 시도 음악과 동작에 의해 단일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일본의 노 연극은 파운드에게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처럼 “하나의 정교한 삶의 은유”를 제시하는 문학 형식이었다(SR 87). 다양한 전설과 역사적 사건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그의 방대한 서사시 "캔토들"은 바로 소용돌이 이미지의 소산이다.

소용돌이주의에 대한 파운드의 관심은 "희미한 빛"을 출판할 때 이미 잉태되었던 것이지만, 그 관심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1914년 6월 20일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며 화가인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와 함께 "돌풍"(Blast)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는 베르그송 이미지 미학에 대한 흄의 강연에서도 시적 기교로서의 소용돌이의 필요성을 감지했었다. 파운드가 “소용돌이주의”라고 명명한 시적 기법은 병치의 방법을 통해 이미지를 보다 큰 패턴으로 유도하는 것으로서, 역동적인 “소용돌이” 이미지를 도입한 예술 운동이었다. "돌풍"은 여기에 참여했던 루이스와 고띠에-브르제스카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1915년 7월 두 번째 호를 내고 막을 내렸지만, 파운드의 새로운 이미지즘 이론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잡지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이 잡지를 통해 파운드는 특히 루이스의 그림과 고띠에-브르제스카의 조각 같은 공간 예술 양식이 보여 주는 명확성과 뚜렷한 윤곽, 그리고 기계의 역동성을 구현하는 소용돌이의 기법을 배워 자신의 시에 생각들을 병치시켜 하나로 결합하는 소용돌이를 창출해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소용돌이가 파운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에게 이미지즘은 소용돌이주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1914년 9월 1일자 "포트나잇틀리 리뷰"(The Fortnightly Review)에 기고한 「소용돌이주의」(“Vorticism”)이라는 평론에서 파운드는 소용돌이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미지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빛나는 마디점 즉 덩어리이다. 그것은 사상이 그것으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속으로 끝임없이 돌진하기 때문에 내가 소용돌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소용돌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필요성에서 소용돌이주의가 생겨났다.

(Gaudier-Brzeska 92)

 

이런 관점에서 파운드는 이미지를 “주관적” 이미지와 “객관적” 이미지 두 가지로 구분했다. 주관적 이미지란 마음에 작용하는 외부 요인들이 “마음 속에서 융해되고 전파되어 그 자신들과 다르게 나타나는” 이미지이며, 객관적 이미지란 “외부의 장면이나 행동을 포착하는 감정이 그것을 그대로 마음에 전달하고, 소용돌이가 그것에서 본질적이거나 지배적이거나 극적인 특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정화시킴으로써 외부의 본래적인 것처럼 나타나는” 이미지이다(SP 344-345). 

소용돌이주의는, 그의 "시 읽기의 기초"(ABC of Reading)(1951)에서 다시 거론되고 있듯이, 파운드에게 “움직이는 이미지”의 개념을 확실하게 심어준 예술 양식이었다. 파운드는 이미지즘을 “희석시키는 자들은 가장 손쉽고 가장 쉬운 의미만을 취하여, 단지 정체적인 이미지만을 생각했다”고 비난하면서, 이미지즘에 “움직이는 이미지”를 포함시키지 않을 경우 “고정된 이미지와 작용”의 구분을 쓸데없이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ABCR 52). 그는 또한 “시에는 대체로 고정된 요소와 다변적인 다른 요소가 있다”고 전제하고 “어느 요소가 고정되어야 하고 어느 요소가 가변적이어야 하는 것, 그리고 그 정도가 어느 만큼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작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ABCR 201). 시에서의 “움직이는 이미지”의 개념이 시에 도입되면서 이미지즘 시는 하나의 유기체로 정의될 수 있었다. “시란 각 부분이 기능하면서 소리 혹은 의미에 무엇인가를 주는―오히려 소리와 의미 모두에 무엇인가를 주는 하나의 유기체이다”(SPR 27).

1913년 3월호의 "시"에 발표된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힘 혹은 감정의 형태로서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파운드는 “하나의 힘 혹은 감정이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할 때,’ 이것은 말로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이미지의 언어적 표현은 적절한 혹은 동족의 운율 형식과 음색 형식에 의해 보강될 수 있다”고 믿었다(SPR 346-7). 그는 감정을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시적 방법을 에이취 디 및 올딩턴과 함께 토의하고 다음과 같은 “이미지즘”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룬다.

2. 표현에 기여하지 못하는 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3. 운율에 대해서는 음악적 어귀의 운율을 따르도록 하고 박절기의 운율에 따르지 않는다. (LE 3). 


이 원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은유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감정을 신속하고 강렬하고 생생하게 표현하는 시적 기법과 유사하다. 시인은 “어떤 생각과 그에 수반하는 감정들, 혹은 어떤 감정과 그에 수반하는 생각들, 혹은 어떤 감각과 그것에서 생겨나는 감정들, 혹은 감정적인 어떤 인상 등”을 동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가능한 한 적은 수의 말을 사용하여” “완전하리 만큼 분명하고 간단하게” 표현해야 하며, 그렇게 되었을 경우 그의 작품은 훌륭한 것이 된다는 것이 파운드의 생각이었다(LE 52, 51, 50). 

여기에 제시된 세 개의 원칙 중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룬다”는 첫 번째 원칙은 감정에 의해 창조되는 이미지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두 가지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지가 주관적인 것이 되는 경우는 “외부적인 요인들이 마음에 들어와 혼합되고 변형된 다음 그 자체와 다른 어떤 이미지로 나타날” 때이며, 이미지가 객관적인 것이 되는 경우는 “어떤 외부적인 장면이나 행동을 포착하는 감정이 그것을 마음에 그대로 끌고 들어가게 될 때 그 소용돌이가 그것에서 본질적이거나 지배적이거나 극적인 특징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외부의 본래 대로의 것처럼 나타날” 때이다. “어느 경우이든, 이미지는 사상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혼합된 사상의 소용돌이거나 덩어리이며, 힘을 지니게 된다”(SPR 344-345). 이미지가 주관적인 경우든 객관적인 경우든, 이미지 시는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말과 사물을 합치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의 원리의 핵심이다(SL 158).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룬다”는 첫 번째 원칙을 잘 반영하고 있는 시의 표본은 아마도 「지하철 정거장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일 것이다.

 

군중 속에 나타난 이 얼굴들의 환영,

축축한, 검은 가지에 피어난 꽃잎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SP 35)


이 시는 파운드가 1911년 봄 파리를 방문했다가 파리 지하철역에서 기차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느낀 놀라운 경험을 이미지 기법을 빌어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가 생겨난 과정에 대해서 그는 1914년 9월 1일자 "포트나잇틀리 리뷰"에 기고한 「소용돌이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년 전 파리에서 나는 콩코르드역 지하철 기차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얼굴을, 그리고 또 다른 얼굴을, 그리고 또 아름다운 어린이의 얼굴을,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종일 이것이 나에게 준 의미를 표현할 단어를 찾아보려 했지만, 나는 그에 합당한, 아니 그 갑작스러운 감정만큼 아름다움을 표현할 어떤 단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저녁 레이누아르 가를 따라 집으로 가며, 애쓰다가 갑자기 표현을 찾아냈다”(Gaudier-Brzeska 86-87). 이렇게 하여 생겨난 이 작품은 그 길이가 처음에는 30여 행이었으나, 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번의 손질을 거쳐 2행으로 줄어들어 1913년 4월호의 "시"에 지금의 형태로 발표되었다. 첫 행은 지하철에서 밖으로 나오며 드러나는 군중들의 환한 얼굴에 대한 사실적 묘사이며, 둘째 행은 이 밝은 얼굴을 “축축한, 검은 가지에서 피어난” 밝은 색의 꽃잎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첫 행에는 “환영”이란 단어의 사용으로 군중 출현의 극적 효과가 나타나 있다. “축축하다”와 “검다”라는 두개의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는 둘째 행은 “지나친 형용사 사용을 금하는” 이미지스트의 강령에 반대되는 것 같지만(SL 11), 밝은 색의 꽃잎의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이 두 형용사는 칙칙하고 어두운 지하철에 나타난 환한 얼굴 색의 생생한 이미지를 표현해 주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어두움에서 밝게 피어나는 꽃잎의 이미지는 지하철에서 아름답게 비친 승객들의 얼굴을 보고 느낀 시인의 벅찬 감정을 적절히 나타내는 일종의 등가물로서 손색이 없다.

“표현에 기여하지 못하는 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미지즘의 두 번째 원칙은 “시가 훌륭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훌륭한 산문처럼 잘 쓰여져야 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SPR 345). 이 원칙은 훌륭한 시의 이미지는 최소한의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의 경제”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LE 4). 1913년 "에고이스트"(The Egoist)에 기고한 「진지한 예술가」(“The Serious Artist”)라는 글에서 파운드는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산문을 진지한 시인이 따라야 할 표본으로 생각했다. 그는 「휴 셀윈 모벌리」(“Hugh Selwyn Mauberley”)라는 시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시적 기교에 가장 근접한 산문을 쓴 작가의 예로 플로베르를 들며 그를 자신의 “진정한 페넬로페”라고 불렀다(SP 61). 「진지한 예술가」에서도 플로베르는 “정열적인 간결성”을 지닌 산문을 쓴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파운드에게 산문과 시는 모두가 동료들과 의사 교환을 하는 언어적 수단이다. “산문과 시는 언어의 확장에 불과하다. 인간은 동료들과 의사교환을 바란다.” 사람은 “어떤 생각과 그 생각이 지니고 있는 정서나, 어떤 정서와 그 정서가 지니고 있는 생각이나, 어떤 감각과 그 감각이 동반하는 정서나, 정서를 일으키는 어떤 인상 등을 전달하기를 원한다.” 만일 시에 사용된 “모음과 자음의 멜로디”가 시가 전달하려는 “정서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시는 훌륭한 작품이 된다. 산문의 경우도 “단어들과 그 의미가 정서를 전달하기에 적합하게 쓰여졌다면” 훌륭한 작품이 된다. “시인들도 산문의 장점들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대충 말하면, 훌륭한 글이란 완벽하게 통제된 글이다. 작가는 자신이 의미하는 것만을 말한다. 그는 완벽하리 만치 명료하고 간결하게 그것을 말한다. 그는 가능한 한 가장 적은 수의 단어를 사용한다.” 산문과 시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시의 언어보다 “산문의 언어가 훨씬 덜 충전되어 있다”는 것이며, “시가 보다 더 충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파운드에게 “똑똑한 사람들과의 의사 교환”인 시는 “표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가능한 한 간결하게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LE 49, 50, 51, 50, 26, 49, 55, 56). 

이와 같은 견해를 파운드는 1915년 1월 해리엣 먼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되풀이하면서, 시의 언어가 구어체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는 산문처럼 잘 쓰여져야 합니다. 시의 언어는 훌륭한 언어이어야 합니다. 고양된 강렬성(즉 단순성)에 의한 경우를 빼면 구어체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책의 언어도, 에두르는 표현도, 도치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는 모파상의 산문과 스탕달의 산문처럼 간결해야 합니다.

감탄사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어떠한 말도 허공을 향하여 날아가서는 안됩니다. . . . 진부한 말도, 고정된 어귀도, 상투적인 저널리즘 언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객관성 그리고 다시 객관성, 그리고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앞뒤가 바뀌는 것도, (“썩은 이끼 낀 각진 모서리”와 같이) 양다리 걸친 형용사도, 테니슨이 사용하는 것 같은 말도, 어떤 환경, 어떤 감정의 압박 상태에 있어서, 실제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SL 48-49)

 

파운드는 「베도스와 연표」(“Beddoes and Chronology”)란 그의 평론에서 시가 보다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고어체 대신에 일상 구어체를 사용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어느 누구도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백발이 성성한 수 백년의 세월에서 솟아난,

마치 옛날의 허깨비에게처럼, 단어의 그림자를.’


이 시행들은 그가 지금까지 쓴 어떤 것 못지 않게 아름답지만, 우리는 직접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순전히 고대 일상어로 시를 쓸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베도스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무대에서는 사용되었을 테지만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 대신에 실제의 구어체를 사용했더라면, 이 시가, 그의 시가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또 그 효과도 훨씬 더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까? (SPR 351)


1917년에 출판된 소책자 "에즈라 파운드, 그의 운율과 시"(Ezra Pound: His Metric and Poetry)에서 엘리엇은 과거의 제한된 시 형식으로부터 파운드를 해방시켜준 것은 고띠에르(Jules de Gautier), 라포르그(Jules Laforgue, 1860-1887)나 코르비에르(Tristan Corbière, 1845-1875) 등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영향이라고 지적하면서 파운드는 휘트먼으로부터는 영향을 받은 바 없다고 주장했다. “휘트먼은 분명히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이 없으며, 휘트먼과 파운드는 서로 정반대이다”(TCC 177). 그는 또한 1928년 그의 편집으로 출판된 "에즈라 파운드 시 선집"(Selected Poems of Ezra Pound)의 서문에서도 파운드의 자유시 형식 사용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는 파운드가 휘트먼에게 신세진 것이 없다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Schulman 77). 그러나 파운드 자신이 인정했듯이, 이미지즘이 일상 구어체 사용을 중시하고 자유시를 옹호하는 것은 상징주의 시인들과 휘트먼의 영향이다. 파운드의 객관성 추구, 주지주의에 대한 신념, 엘리트 중심사상, 예술로서의 시 창조의 개념이 휘트먼이 추구했던 주관성, 민주주의적 이상, 대중성, 삶으로서의 시와는 상반되지만, 휘트먼의 혁신성, 자유시 추구, 시어로서의 일상구어체 사용 등은 파운드를 미국시인으로 길러낸 원천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성숙에 미친 휘트먼의 영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휘트먼이 프랑스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초이고, 프랑스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에 접어들어서이다. 그리고 그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1880년대 후반 라포르그(Jules Laforgue, 1860-1887)의 번역을 통해 그의 시가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어 프랑스 시인들이 그의 시적 비전과 기법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휘트먼에게서 배운 것들 중에서 파운드의 이미지즘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 구어체를 시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전통적인 운율을 버리고 자유시 형식을 쓰는 것이었다(Erkkila 51-77). 휘트먼의 자유시 옹호는 자연의 리듬을 따라 시를 써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휘트먼에게 자연은 곧 신의 상징이며, 시의 모형이다. 자연에서 자유 민주주의 양식을 발견한 휘트먼은 자신의 시의 운율을 전통적인 “약강 5보격, 강강격, 강약약격 등의 운율 규칙”을 버리고 유기체처럼 자유로운 양식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Prose Works, Vol 2: 519). 이와 같이 자유시를 옹호하는 휘트먼의 입장은 자유시를 지향하는 상징주의와 이미지즘의 시적 원리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운율에 대해서는 음악적 어귀의 운율을 따르도록 하고 박절기의 운율에 따르지 않는다”라는 이미지즘의 세 번째 원칙은 감정이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채의 조직자일 뿐만 아니라 들을 수 있는 형태의 조직자이기도 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시인에게는 “말을 창조적인 감정의 운율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충분한 기술”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원리에 따라 쓰여질 경우, “시는 ‘음악’에 맞추어진 말의 결합 혹은 ‘구성’이 되는 것이다”(SPR 345). 이미지스트 시에서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시어가 음악으로서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 읽기의 기초"보다 훨씬 앞서 1918년에 발표된 평론 「자유시와 아놀드 돌메취」(Vers Libre and Arnold Dolmetsch)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견해가 피력된 적이 있다. "프랑스와 비용의 증언"(Le Testament de François Villon)(1921)과 "카발칸티"(Cavalcanti)(1932)라는 두 편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바이올린 곡을 작곡한 경험이 있는 파운드가 시에서 청각적 이미지의 창출에 관심이 깊었던 것과 시가 “음악으로 읽혀지기를” 희망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청각적 이미지에 기초한 그의 시어 이론은 “모든 예술은 끊임없이 음악의 조건을 지향한다”는 월터 페이터(Walter Pater)의 신념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Elliott 156). 「자유시와 아놀드 돌메취」에서 자유시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파운드는 “단어는 그 자체에 음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어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시는 음악을 떠날 때 시들어 소멸하고 만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음악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시인들은 신통치 않은 시인이거나 그런 시인이 됩니다. 나는 시인들이 결코 음악과 너무 오래도록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음악을 연구하지 않으려는 시인들은 결점을 안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은 그들이 음악의 대가가 될 필요성이 있다든지, 아니면 반드시 음악 교육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조금은 고집이 세고 이단적일 수 있는 것이 어쩌면 그들의 가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은 진부해지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며, 또한 언제나 평범한 것은 당대의 유행이 불변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반 의식적으로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지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거나 그렇게 해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LE 437) 


이런 신념에 따라, 파운드는 시를 정의하여 “음악에 맞추어진 말의 결합”이라고 했다(LE 437). 

파운드에게 시의 음악은 “표현될 정서나 정서의 그림자에 꼭 부합되는 하나의 운율, 즉 ‘절대 운율’”을 뜻한다(LE 9). 이 절대 운율은 화자의 감정의 곡선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일상 구어체의 자연스러운 운율을 뜻하며, 자유시 출현의 배경이 되었다. 파운드가 일상 구어체가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한 것은 대학 시절 프로방스 시를 연구하면서부터이다. 머레이 셰이퍼(Murray Schafer)에 따르면, “파운드에게 프로방스 어는 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과 결합된 시를 의미하며” 또한 “바로 자기 앞에 음악을 놓고 시를 쓰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음악적 어귀의 연속’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그는 오래도록 영시를 구속해 온 뒤틀린 운율과 형식으로부터 영시를 해방시키게 될 특이한 시적 기교를 발전시켰던 것이다”(131-132). 시와 음악은 같은 운율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시의 율동적인 흐름은 음절과 분절적인 소리의 성질에 의해서 그리고 음악의 법칙이나 아름다운 가락의 운율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으며,” 또한 “이 음악적인 진실성을 시에 적용하는 것은 바로 자유시를 사용하는 것이 된다”고 파운드는 생각했다. 파운드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견해가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프로방스 시에서 왔음을 밝히고, 그 때에는 “시와 음악 예술이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시가 최고의 운율적인 탁월성을 달성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LE 9, 93, 91). 그래서 그는 “우리의 목표가 자연적인 구어체, 즉 말하는 대로의 언어이다. 우리는 시의 언어가 자연적인 순서를 따르기를 바란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우리가 실제로 삶에서 말하지 않는 것은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LE 362).  

파운드에게 “감정은 단지 시각적인 형태나 색채뿐만이 아니라 청각적 형태까지도 구성하는 것”이었다(SP 345).


당신의 시를 개별적인 약강격으로 짤라 나누지 마십시오. 각각의 시행을 그 행의 끝에서 완전히 멈추게 하지 말고 매 다음 행을 상승 어조로 시작하십시오. 결정적으로 길게 중단할 생각이 아니면, 다음 행이 시작될 때 운율 물결의 상승을 이어가게 하십시오. (LE 6)


화자의 정서가 일상 구어체의 운율에 의해서 전달되어야 한다면, 전통적인 규칙적 약강격 운율의 시행보다는 자유시 형식이 보다 적절한 것이 된다. 그러나 파운드는 언제나 자유시를 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꼭’ 자유시를 써야 할 때만, 다시 말하면, ‘사물’이 미리 정해진 보격의 운율보다 더 아름답고, 더 사실적이고, 그 ‘사물’의 정서의 일부에 더 근접하고, 규칙인 강세를 지닌 시의 율격보다 더 밀접하고 친밀하고 해석적인 운율을, 즉 미리 정해진 약강격이거나 약약강격의 율격에 만족하지 못하는 운율을 형성할 때만 자유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LE 12). 이런 원리에 의해 파운드는 “음악이 분명한 말로 변형되는 부류의 시”와 “마치 조각이나 그림이 언어로 변형되었거나 변형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류의 시”가 생겨난다고 생각했다(LE 380). 표현 대상을 조각이나 그림과 같은 정확한 언어와 음악적인 자연스러운 운율로 창조된 이미지 시는 인간 정서에 대한 등가물을 제시하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파운드가 지향하는 이미지 시의 목표는 정확한 언어로(두 번째 원칙) 시각적 이미지를 창조하여(첫 번째 원칙) 음악적 효과를 달성하는 것(세 번째 원칙)이다. 이 세 가지 원칙과 관련하여 파운드는 1923년 1월호의 "크라이테리언"(The Criterion)에 기고한 「비평 일반론」(“On Criticism in General”)에서 고띠에, 고르비에르, 라포르그, 랭보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언어를 충전하거나 언어에 힘을 불어넣는 다양한 방법에 따라 시를 “음악시,” “회화시,” 그리고 “언어시” 등 세 종류로 구분하고 각각의 유형의 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으며, 이 세 종류의 시에 대해 1929년 1월 세 번에 나누어 "뉴욕 해럴드 트리뷴"(The New York Harold Tribune)에 기고한 평론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파운드는 “위대한 문학은 가능한 한 최상의 의미로 충전된 언어다”라고 정의하고, “말들이 음악적 속성에 의해 충전되어 평범한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시를 “음악시,” “시각적 상상력에 이미지들을 투영하는” 시를 “회화시,” 그리고 “단어들 사이에서의 지성의 춤”을 연출하는 시를 “언어시”라고 불렀다(LE 23, 25). 파운드는 이 세 종류의 시를 프로방스 시에서 발견했다. 프로방스 시는 “말을 음악과 잘 어울리도록 하는 예술”인 음악시의 전형이었다(LE 112). 프로방스 시의 대표적인 시인인 아르나우트 다니엘(Arnaut Daniel)의 시는 그에게 “시는 음악과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될 때 퇴보한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주로 음악시를 위한 것이라면 트루바두르 시를 연구하면 될 것이다”(ABCR 61, 52). 또한 다니엘이나 카발칸티(Cavalcanti) 같은 프로방스 시인들은 “외적 자연이든 감정이든 그것을 명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시어는 “거의 새로운 언어”로서 “새로운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태초에 “아담이 사용했던 언어”로 생각되었다(LE 11, 112). 그들의 시는 파운드에게 일상의 “구어체를 새로운 방법으로 사용하고, 새로운 말을 글쓰기에 활용하고, 또 말들을 새롭게 혼합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언어시의 전형이었다(LE 111). 그래서 프로방스 시는 “말을 극도로 명확하게 사용하려는 상당한 욕구”를 드러내는 회화시의 전형이기도하다(LE 26). 

파운드는 1951년에 출판된 "시 읽기의 기초"(ABC of Reading)(1951)에서 “언어를 최고도의 의미로 충전시키기는” 방법에 따라 시를 세 종류로 구분했다. “시각적 상상력(고정적이든 동적이든)에 사물을 투영하는” 방법을 쓰는 회화시, “말의 소리와 운율에 의해 정서적 등가물을 유추하는” 방법을 쓰는 음악시, “사용된 실제 언어나 단어 집단과 관련하여 받아들이는 자의 의식에 남아 있는 (지적이나 정서적인) 인상을 자극하여 양쪽 효과를 이끌어 내는” 방법을 쓰는 언어시 등이 그것이다(ABCR 63). 음악적인 어귀를 따라서 시를 써야 한다는 셋째 원리와 관련이 되는 음악시는 말의 소리와 운율에 의해 정서를 유발시키는 시의 청각적 혹은 음악적 양상에 역점을 둔다. 사물을 직접 취급해야 한다는 첫째 원리와 관련이 있는 회화시에서는 고정된 사물이나 유동적인 사물이 독자에게 시각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정확한 언어의 사용을 주장하는 두 번째 원리와 긴밀하게 관련이 된 언어시는 독자의 지적 혹은 정서적 연상을 자극시킴으로써 시각적·음악적 효과를 유발시켜 미적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파운드는 이 세 종류의 시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시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 부류의 시를 구분짓는 요소들이 모두 한편의 시에 나타나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게 “모든 글은 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LE 26). 시에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적 요소가 미적 내용을 전달하는데 동시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 양상이 서로 혼합되어 완성된 마지막 한 편의 시에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 이론은 둘째의 원칙이 적용되는 언어시에 그 핵심이 있다. 왜냐하면 첫째 원칙에서 말하는 시각적 이미지는 둘째 원칙에서 말하는 정확한 언어의 사용에 의해서만 창조되고, 셋째 원칙에서 말하는 시의 음악적 효과도 정확한 언어의 사용에 의해서만 성취되기 때문이다. 파운드는 「진지한 예술가」에서 정확성에 기초한 도덕적 미학 이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그는 “예술의 시금석은 정확성”이며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예술을 인간을 소재로 한 과학에 비유하며 예술가를 과학자에 비유한다. “예술과 문학과 시는, 화학이 과학이듯이, 과학이다. 그것들의 소재는 인간과 인류와 개인들이다.” “과학자가 추상적인 숫자, 분자의 힘, 물질 구성 등의 관계를 다루듯이, 진지한 예술가는 인간, 즉 개인들의 속성을 다룬다.” “진지한 예술가는 자신의 욕망, 자신의 미움, 자신의 무관심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그의 기록이 정확하면 할수록 그의 예술 작품은 더 영속적이고 난공불락이 된다.” “훌륭한 글이란 완벽하게 통제된 글이며, 작가는 자신이 뜻하는 것만 말한다. 그는 완전하리 만큼 분명하고 간단하게 그것을 말한다. 그는 가능한 한 적은 수의 말을 사용한다”(LE 48, 43, 42, 47, 46, 50). 



IV. 결  론


파운드에게 이미지는 일차적으로 흄이 말하는 사물에 대한 “정확하고, 간명하며, 뚜렷한 묘사”를 뜻한다(Speculations 132).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에게 이미지는 “특별한 감정의 형식이 될 일련의 사물, 어떤 상황, 일련의 사건들”을 표현하는 엘리엇의 “객관 상관물”과 유사한 것이다(Sacred Wood 100).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미지를 “인간 정서에 대한 등가물”로 정의하였다. “시란 일종의 고양된 수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숫자, 삼각형, 원 등에 대한 등가물이 아니라 인간 정서에 대한 등가물을 주기 때문이다”(SR 14). 결국 파운드에게 “‘이미지’란 순간적으로 지적․정서적 복합체를 제시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그와 같은 ‘복합체’를 순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갑작스런 해방감,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감,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숙감을 고취시켜 주게 된다”(LE 4).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흄의 경우처럼 반낭만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미지즘이 시의 예술성을 강조하며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모더니스트의 시운동으로서 “시가 예술이라는 생각을 달갑지 않게 여기며” 여전히 시란 감정을 “풀어놓는 것이 되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던” 당시의 예술 풍토에 대한 도전이었다(ABCR 74- 75). 파운드에게 예술 작품은 “자기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엮어낸 몰개성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감정의] 등가물”이었기 때문에(LE 431), 이미지즘 시 이론은 작품의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것이 되었다. 엘리엇의 몰개성 시론과는 달리,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원죄 개념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이 노력의 대가 없이 부를 축적하려는 물질적 욕망에 의해 인간의 정신이 타락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고리대금업은 인간과 그의 끌을 녹슬게 하며

그것은 장인을 파멸시키고, 기술을 파괴시킨다.

하늘은 암으로 병들어 버렸다.

Usury rusts the man and his chisel

it destroys the craftsman, destroying craft;

Azure is caught with cancer. (C 250)


파운드는 고리대금업을 “악이거나, 범죄”라고 생각했다(SPR 317). 클라크 에머리(Clark Emery)의 지적대로, 파운드에게는 “돈의 오용과 언어의 오용은 사회 질병의 어떤 징후”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Sullivan 249). 그래서 파운드는 언어의 오용을 없애기 위해 간결하고 구체적이며 꾸밈없는 일상 언어를 추구하는 이미지즘 시 이론을 정립했던 것이다. 엘리엇은 파운드가 어빙 배빗(Irving Babbitt)처럼 공자의 영향을 받아 “개성주의자”가 되었으며, 배빗보다 “오히려 더 자유 의지 옹호자”가 되고 말았다고 공박한 적이 있지만(ASG 41-42), 파운드는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배제하고 보편적인 인간 정서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더니스트였다.

그러나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상당히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는 화석화된 시”이며 “훌륭한 작품에서는 언어와 사물은 하나가 된다”고 주장하는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신념(“The Poet” 231, Journals 3.271), 혹은 “사물의 완전함”에 대한 신념에서 시인은 “실제 사물에서 영감을 발견한다”거나 “언어를 완전하게 사용하는 작가는 사물을 사용한다”는 휘트먼의 주장(Leaves of Grass 727, 564; Neglected Walt Whitman 165)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에머슨이 "자연"(Nature)에 “언어의 타락은 인간의 타락을 수반하며” 언어의 “이중성과 거짓이 그 단순성과 진실성을 대신하게 될” 때 언어의 힘은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이미저리는 더 이상 창조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20), 파운드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로마는 시저와 오비드 그리고 타키투스의 언어와 함께 번성하였다가 생각을 숨기는 외교관의 언어인 수사적 표현의 와중에 몰락하였다. . . .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마치 훌륭한 의사가 무지한 아이가 단지 잼 파이를 먹는 줄 알고서 그 어린애가 스스로 결핵에 감염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만족해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조국이 문학을 부패시키거나 훌륭한 작품이 멸시당하도록 방치할 때 더 이상 조용히 앉아 몸을 사릴 수 없다. (ABCR 33). 


파운드의 주장은 추상적인 표현에 가려진 언어의 힘을 재생시키기 위하여 부패된 언어를 순화시키고 언어를 이미지로 옷 입힐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휘트먼의 Leaves of Grass 파운드가 몇 번에 걸쳐 인정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시 이론은 휘트먼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우선 우리는 파운드가 1909년의 평론 「내가 휘트먼에 대해서 느끼는 것」(“What I Feel about Whitman”)에서 휘트먼을 “나의 정신적인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평론에서 파운드는 자신의 시가 휘트먼 시의 운율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며, 그와 같은 시를 쓰는 자기의 출현은 휘트먼에 의해 예언된 것이라고 밝히면서 “정신적으로 나는 휘트먼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SPR 115). 파운드는 휘트먼으로부터 시에서의 단순성의 가치를 배워 자신의 이미지즘의 초석으로 삼았던 것이다. 휘트먼은 그의 1855년에 출판된 자신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의 초판 서문에서 “예술의 예술”은 “단순성”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시인”은 어떤 화려한 치장이나 우아한 표현을 삼가는 자라고 정의했으며(717), 그리고 어느 한 노트에서 “신성한 문체”는 “장식적인 비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투명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Notebooks, Vol. 1: 385). 그와 마찬가지로 파운드도 1910년에 출판된 "로맨스의 정신"(The Spirit of Romance)에서 “진정한 시인”은 형용사도 사용하지 않고 “가장 단순한 표현”을 일삼는 자라고 정의했다(SR 219). 그래서 파운드가 이미지즘의 세 원칙을 제시한 그 다음 달인 1913년 4월에 발행된 "시"의 4월호에 발표한 시 「계약」(“A Pact”)에서 자신의 이미지즘 시 이론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미국 시인이 휘트먼이었다고 했던 주장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당신, 월트 휘트먼과 계약을 맺겠소―

나는 당신을 너무나 오래도록 싫어했소.

나는 이제 고집이 센 아버지를 가진

다 자란 어린이가 되어 당신에게 왔소.

나는 이제 화해할 수 있을 만큼 자랐소.

새 목재를 쓰러뜨린 것은 바로 당신이고,

지금은 조각할 시기요.

우리는 하나의 수액과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소―

우리 서로 영적 교류를 가집시다.


I make a pact with you, Walt Whitman―

I have detested you long enough.

I come to you as a grown child

Who has had a pig-headed father;

I am old enough now to make friends.

It was you that broke the new wood,

Now is a time for carving.

We have one sap and one root―

Let there be commerce between us.  (SP 27)


휘트먼에게와 마찬가지로 파운드에게도 이미지는 “자연 대상물”을 사용하는 “적절하고 완전한 상징”과 같은 것이다(LE 9). 따라서 이제 우리는 라포르그의 번역을 통해 프랑스에 소개되어 프랑스 상징주의 성숙을 도운 휘트먼의 시적 비전과 기법이 프랑스 상징주의 작가 레미 구르몽을 거쳐 영국의 흄과 미국의 파운드에게 전달되어 이미지즘을 낳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충남대>

한국현대영어영문학회 제47권 제1호(2003)

 

소용돌이파_에즈러 파운드/전홍실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