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맥문학 통권 227호 2009. 07. 25)

 

이노우에 테츠지로우(井上哲次郞)

야타베 료우키치(矢田部良吉)

토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

주근옥 역

 

新體詩抄序

程子가 이르기를, “옛날 사람들의 詩는 지금의 歌曲과 같다. 비록 평민이 사는(누추한) 동네의 어린아이들이라도 모두 자주 들어 익숙해지면 그 說(내용)을 알게 되므로, 능히 가곡을 지을 수(감흥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비록 노련한 선생과 공부를 많이 한 유학자라 할 지라도 오히려 그 뜻을 잘 펼치지 못하니(자기의 의도를 시로 표현하지 못함), 하물며 공부하는 사람(초학자)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이것은 시에서 興(感興)을 얻지 못한 것이다.”라 하였다.(cf :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論語」) 내가 이 글을 읽고 개연히 탄식하여, “오늘날의 가곡은 옛 사람의 시와 같은데, 지금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지금의 가곡은 천하게 여기고 옛 사람의 시는 숭상하고 있으니, 아아 이것 또한 유감이로다! 어찌하여 지금의 가곡은 취하지 않는가?”라고 말하였다. 나중에 傳記를 읽어보니,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1630~1714, 유학자)씨가 한 말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단지 와카(和歌)만 가지고도 자기 뜻을 말하고 감정을 서술할 수 있는데, 졸렬한 詩를 지어서 어리석음에 부합하여 와카(和歌)를 꾸짖는 것을 자랑삼을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내가 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에키켄(益軒)씨가 말한 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와카(和歌)는 배울 수가 있지만 詩는 배우기가 어렵다. 비록 오늘날의 사람이 지은 시라 하더라도 와카(和歌)에 비하면 훨씬 난해하니, 어찌하여 와카(和歌)를 배우지 않는 것인가? 나중에 大學에 들어가 西歐의 시를 배우게 되는데, 그 중 짧은 시(短詩)는 비록 우리의 단카(短歌)와 비슷하지만, 그 중 긴 시(長詩)는 거의 10권내용의 분량에 이르니 우리의 長歌가 꾀하여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 대개 서양의 시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시는 지금의 용어를 周到綿密하게 사용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고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옛날의 와카(和歌)는 취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어찌하여 신타이시(新體詩)를 짓지 아니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또 생각하건대, 이것은 어려운 일(大業)이다. 일본과 중국의 古今의 시가를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일본과 중국의 고금의 詩歌를 배워, 그 글의 뜻을 잘 연구하여 완미함으로써(咀英嚼華) 장차 신타이시(新體詩)를 지으려 하나 그 성패여부를 알 수가 없다. 최근에 ゝ山仙士(토야마 마사카즈, 外山正一)와 尙今居士(야타베 료우키치, 矢田部良吉)가 속속 지은 신타이시(新體詩)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내가 받아서 읽어보니, 그 문장은 비록 俗語가 많이 섞여 있긴 하지만, 매우 平坦한 글이어서 읽기가 쉽고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내가 탄식하여,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평민이 사는 누추한 동네의 어린아이들이라도 자주 들어 익숙해지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겠는가? 또 이 시를 지어 감정과 뜻을 펼쳐 보이면, 唐詩를 지어 수준 낮은 문장을 뛰어난 것처럼 만들어 보임으로써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보다는 더 낫지 않겠는가? 이에 두 사람(ゝ山仙士와 尙今居士, 즉 外山正一와 矢田部良吉)과 서로 왕래하면서 格律을 고치고 聲調를 바로잡아 改作한 것이 적지 아니하였는데, 그 중에 뛰어난 작품만 골랐기 때문에 “신타이시쇼우(新體詩抄)”라 이름지은 것이다. 이것이 제1편이다. 세상에서 詩歌를 짓는 사람들 중에 간혹 이것을 鄙俗하다고 꾸짖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하다. 옛날부터 신타이시의 興(感興)은 많은 부분이 우연히 생긴 것이어서, 반드시 여러 방면의 연마(작시연습 따위)의 고생을 기다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비록 비루하고 저속하기는 하지만, 어찌 신타이시의 始端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明治十五年五月七日(1882년 5월 7일)

 

                                      이노우에 테츠지로우(巽軒居士井上哲次郞) 撰


新體詩抄序

사람의 삶에는 善惡是非의 差別이있다고 해도 一定 不變의 이치가 있는 것이 틀리지 않는 것과 같이 善인가 惡인가 하는 것은 그 조상으로부터 遺傳되는 心性과 그가 살고 있는 곳의 社會에서 받은 敎育에 의해 차츰 規準이 되는 것이 마음속에 생김으로 해서 判別될 뿐, 儒道가 오로지 행해지는 나라에 있어서는 孔子의 말씀을 옳다고 하고 ‘몰몬교’가 오로지 행해지는 땅에 있어서는 J. Smith의 말씀을 眞으로 하는 반면, 지금 유럽 사람들이 믿는 예수교는 예전부터 유태교 국가의 邪敎이며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믿는 불교는 일찍이 인도로부터 추방된 것이며, 今世에 행하여지는 光線波動의 說과 萬物化醇의 論(C. R. Darwin의 진화론)같은 것은 옛사람이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을 明治의 시대가 되어 某氏에 의해 처음으로 “楠公內藏之助의 忠義는 權助의 충의”라고 하는 말에 비할만한 것을 알고 某氏에 의해 처음으로 “壓制는 자유의 근본 원인”이 됨을 알았으며, 세계의 넓은 開化의 가지가지, 대대로 人肉을 먹고 노인을 생매장하는 것을 옳다고 하는 나라 없다고도 하지 못하며, 나라를 달리 하고 時代를 달리 하고 교육을 달리 하고, 觀念의 연합1)을 달리 하는 것도 서로의 善惡是非를 말하지 말라는 것을 그러므로 노래로 말하면


세상은 자기 마음의 모습이 되고 善이든 惡이든 그밖에는 없고 


이렇게 말하면서 굳이 世道의 衰頹를 걱정하고 이것을 挽回하려고 함과 같은 大事를 도모하지 않는다. 그저 同志 1, 2 名과 서로 도모하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종래 平常語를 사용해서 詩歌를 만드는 일이 조금 한탄스럽기도 하고 西歐風을 모방하고 일종의 新體의 詩를 만들어냄과 같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西歐詩의 번역과 관계되는 것이 많고 바로 그 가르침이 될 만한 시를 모아서 한 권으로 만들어 세상에 발표하는 이것을 스스로 작은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임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奇怪하고 여러 가지 野鄙한 것이 至極한 것으로 여기고 唾棄하는 것을, 그러하다고 해도 앞에서 말했듯이 是非善惡은 一定의 時空 초월의 보편타당한 이치가 없어 시대의 新古開化의 先後 各人이 믿는 것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詩도 역시 오늘날의 사람에게 받아들여져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後世에 Homer의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해도 혹시 大家의 출현이 있어 이것이 새로운 潮流의 뜻임을 命題(善)로 하고, 한층 궁리를 더하여 게다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고 귀신을 울게 하는 시를 낳게 하기까지 이르지 못한 점, 이 책을 읽는 자는 이를 惠諒하고 小人이 갖고 있는 본래의 뜻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이 밝혀질 것을 감히 고대하며, 卑見을 기록함으로써 序言에 대신하고자 한다.

明治十五年四月(1882년 4월)

 

                                  야타베 료우키치(尙今居士矢田部良吉)識 


新體詩抄序

唐의 평민의 골목길에 사는 毛唐人이 말하기를 「무릇 평온을 얻지 못하면 곧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이며, 초목은 원래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어 울게 하고, 물도 원래는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그 평온한 상태를 무너뜨려 울게 한다.」라 하고, 「사람의 마음을 말로 나타나는 것 역시 당연하며, 부득이 말을 함으로써 노래가 되고 그 노래 속에는 사람의 생각이 담겨져 있으며, 통곡 속에는 아픈 마음이 들어 있으며, 무릇 입에서 나오는 것을 소리라 하고, 그 모든 것이 평온하지 못함을 이름인저.」라고 해서 우리 나라에도 長歌니 三十一(5,7, 5, 7, 7) 文字니 센류우(川柳)3)니 中國風의 詩니 하는 여러 가지 노래하는 법(鳴方)이 있고, 달을 보며 노래하고 눈을 보며 노래하고 꽃을 보며 노래하고, 이밖에 다른 것을 보며 노래하고, 미인을 노래해도 충분히 노래하는 재주가 없고, 뭐라고 굳이 말한다면 古來의 長歌를 가지고 노래할 수 있는 것 없지는 않았어도 이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므로 특히 근세에 있어서 長歌는 완전히 없어졌으며, 사물로부터 감동 받을 때의 노래하는 법(鳴方)은 모두 三十一 문자나 센류우(川柳)나 簡單한 唐詩를 가지고도 실은 간편히 노래할 수 있는 법(鳴方)이라면 법이 되지만, 어쩌면 그 노래하는 법(鳴方)의 간단함을 가지고 보면, 그 안에 있는 思想도 극히 간단한 것임에 틀림없고, 몹시 無禮한 말일지 모르지만 三十一 문자나 센류우(川柳)등과 같은 技法(鳴方)으로 능히 노래할 수 있는 思想은 綠香烟花나 流星 정도의 思想에 지나치지 않고 조금 깊이 있는 思想으로 노래하려고 할 때는 定形律(固)과 이렇게 간단한 技法(鳴方)으로 만족하지 말고 또 唐風의 詩를 짓되 좀더 길게 노래하는 것, 근래 世間에 적지는 않지만 원래 詩라고 하는 것은 그 의미도 定形律(固)보다 오히려 소중하며 그 音調의 良否도 또 아주 소중하며, 그런 變則者流(漢詩文을 일본식으로 훈독하는 방법)의 한학자가 唐詩를 만들면 無意味․無音調의 定形律(固)보다 平仄의 변화가 있어 그 시 한편이 音律로 이루어진 것임은 전혀 의심 없다고 하나, 보잘것없는 풋내기(芥子坊主)가 이것을 읊는다면 과연 마음 상쾌한 音調가 될까, 마치 솥이 깨지고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것임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어쩌면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中國風의 詩는 마치 벙어리의 흉내, 어쩌면 인형을 조종하는 손놀림과 같은 것이나, 벙어리로 태어나지 않고 벙어리의 흉내를 내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형을 흉내내는 것, 또 불쌍히 여기며 거기서 우리는 깊이 있는 思想 안에 있지만 표현(飜譯)할 수 없는 마음 상쾌한 音調를 가지고 능히 노래할 수 있는 자가 아니더라도, 三十一 문자나 딱딱한 唐詩가 전혀 하지 못한 아쉬움에 뭔가 하나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해도 역시 古來의 長歌流新體 등등의 이름을 붙이기는 붙였지만 역시 자화자찬의 의기로 새롭게 서구의 詩를 애석하게도 번역도 모르면서 번역했지만, 역시 서투른 글솜씨지만, 쓴 長文句를 잘 보면,


    新體라는 이름이야 새롭게 들리지만

    역시 와카(和歌) 등 옛 시형식의 확대    


확대(法螺)라고 알면서 古來의 노래하는 법을 나부터 행한 속마음, 가소롭다고 할만한 확대(法螺)는 아직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님이 틀림없다. 사람이 행한 것이므로 가령 확대(法螺)가 아닌 것도 아니고 다만 사람마다 다른 것은 사람이 노래하려고 할 때는 멋이 있는 雅言이나 당나라의 四角四面의 文字로써 詩文의 才能을 나타내는 것도 우리에게는 新古雅俗의 구별 없이 和漢 西洋 섞어서 사람에게 알린다는 일심으로 사람에게 알리면 스스로 깨우치고 쉽게 쓰는 것도 하나의 能力이니, 見識 높은 사람들은 우습다고 웃으려면 웃어라, 속담에 말하기를 “쓴 것을 먹는 벌레도 좋아서(취향은 사람마다 가지가지)”라고 했다면, 많은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우리들의 善行을 칭찬하는 바보 없지도 않을 것이다. 어찌 알랴, 우리가 횡설수설 잠꼬대를 지껄여도 드디어 오늘날 唐詩와 같이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일없으랴. 황송하도다(穴賢).

 

                                     토야마 마사카즈(ゝ山仙士外山正一)識


凡例

一, 한결같이 이 뜻을 언급하고, 그래서 이것을 중국에서는 詩라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歌라고 하나 아직 歌와 詩를 총칭하는 이름을 못 들었다. 이 책에 싣는 것은 詩가 아니고 歌도 아니고 과연 이것을 詩라고 함은 서구의 “poetry”라고 하는 말 즉 歌하고 詩를 총칭하는 이름에 해당할 뿐 古來의  이른바 詩가 아님.

一, 와카(和歌)가 길은 것은 그 體 또는 5, 7 또는 7, 5이고, 과연 이 책에 실은 것도 7, 5는 7, 5라고 해도 古來의 법칙에 구속받지 않고 동시에 그 외의 여러 가지 新體를 求하려고 하며 따라서 이것을 신타이시(新體詩)라고도 함.

一, 이 책 중의 詩가 모두 句(verse, 여기서는 詩의 一行을 의미) 節(stanzer)을 구별해서 쓴 것은 西歐의 詩集의 예를 따름.

一, 詩歌의 처음에 왕왕 序言을 붙이는 것은 이전에 신문 잡지류에 실은 것으로 그것이 詩學的으로 잘못된 관계가 있으므로 해서 이것을 다시 여기에 실으니, 굳이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독자는 부디 이것을 양해하라.

明治十五年五月(1882년 5월)

                                             編者識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2001, 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