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 texte est traduit avec la langue Coréenne. This text is translated with the Korean language.)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 에이미 헴펠(Amy Hempel), 그리고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


C. W. 할렛(Cynthia Whitney Hallett)1) / 주근옥 역

 

3. 레이몬드 카버와 미니멀리스트의 미학

   (PEN 문학 통권 87호 2008. 6. 10)

 

미국소설의 미니멀리스트적인 경향은 이제 헤밍웨이의 고전적인 문학기교, 즉 그 청정과 절감으로까지 더듬어 올라갈 수 있으며,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에서 그 자신이 원형임을 뽐낸다. 레이몬드 카버가 비록 헤밍웨이와 그의 스타일이 유사하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영향이라기보다 차라리 칭찬의 말로” 언급하기를 더 좋아했다(Saltzman 76). 또한 레이몬드 카버는 현대 거장 중 그가 좋아하는 작가로서 체호프와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를 포함시켰으며, 종종 대학에서 창작지도 교수였던 존 가드너(John Gardner)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직업적인 작가로서의 경력이 비교적 짧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 카버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강력하고 혁신적인 단편소설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비평적 명성을 확립했다. 그는 “하이퍼리얼리스트적인 미니멀리즘(hyperrealistic minimalism)”과 “적은 것이 더 많다(less-is-more)”는 주제를 내건 학파라고 하는 용어로서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존 바스(John Barth)가 그러한 단편소설 작가들의 주요한 배후인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리더로서 많은 문학 비평가들에 의해 그와 동일시되었었다. 레이몬드 카버의 처녀작 세 편 중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극점의 모델로 인식되었다.

모든 훌륭한 작가들이 불가사의한 창작과정에서 발생하는 작품의 독특한 변화를 각각 창조할 수 있었다고 하는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선배, 스승, 편집자, 그리고 친구들에게 어떤 무엇을 단단히 신세지고 있는지도 모르며, 그러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능의 현존과 환경의 뿌리 깊은 영향이 경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레이몬드 카버는 다양한 블루컬러의 직업으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소설을 썼다. 부족한 돈과 시간으로서의 그러한 평범한 고통으로, 게다가 의사소통의 평범한 결핍으로 시달리며, 그 결혼생활은 폭풍우처럼 동요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극단으로까지 치달았고(특히 음주량의 증가로), 결국 이혼으로 끝을 냈다. 후에, 이러한 사건으로 인하여 레이몬드 카버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1977년 6월부터 한 해 동안, 그는 폭음을 하고 있었고, 1988년 8월 2일 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했던 테스 갤러거(Tess Gallagher)와의 인간적인 그리고 직업적인 친밀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레이몬드 카버에 의하면, 그가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된 경험은 삶에 있어서 그가 전도(前途) 있는 것으로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케 했다. 그는 그의 처녀작 세 편 속에서 자신을 “황폐한 소설작가”라고 고백하지 않고 삶 속의 신념과 기쁨 같은 것으로 표현했다(Cochrane 79). 이야기하는 마음가짐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스타일도 표준보다 짧은 미니멀리즘으로 변해버렸다. 비록 처음에 가치가 떨어지는 전기문학으로 보이는 것이 확고할지라도, 또는 비록 어떤 작가의 소설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 타당할지라도, 레이몬드 카버의 경우에, 문학 비평가들은 독특한 것으로, 어떤 것은 그가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 뒤에 글쓰기의 스타일이 의외의 것으로 변했다고 언급한다.

대부분의 작가 지망자들은 “당신이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하여 써라”와 같은 규칙에 친숙하다. 레이몬드 카버 역시 이것을 엄밀하게 지켰다. 그는 그의 소설에서 자전적 기본요소에 대하여 솔직하게 쓰고 언급했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주제에 대한 민첩한 반성은 실재적 삶과 소설 간의 결합을 확실하게 한다. 모리스 딕스타인(Morris Dickstein)의 아래와 같은 기술은 대부분의 문학 비평들과 견해를 같이 한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대부분은 태평양연안 노스웨스트에서 만들어진다. 중상류층 삶의 본류와 먼 그의 블루컬러 성격의 삶은 세련된 도시풍의 아이러니와 궤변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설은 우주론적 딜레마를 다루지 않지만, 그러나 결혼생활의 일상적인 불행과 알코올 중독, 부랑자적 불성실, 따분한 직업, 오래 지속되었던 실직상태와 같은 문제 속의 가정생활을 다룬다.

 

레이몬드 카버에 대한 회고 속에서, 리처드 에더(Richard Eder)의 논평은 다음과 같은 세속적 시나리오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즉 “삶은 그것을 떠받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지만, 그러나 낡아버린 냉장고이며, 실패한 직업이며, 자취를 감춘 가정이며, 그리고 아마 아이들 또는 어린시절의 기억이 될 것이다(3).”

레이몬드 카버는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되기 전에 그리고 미니멀리즘으로부터 스타일리스트적인 전환이 보고되기 전에 쓴 세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즉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성난 계절과 그 밖의 이야기(Furious Season and Other Stories, 1977),”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1981)”를 말한다. 이 세 편 중에서 특히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안에 절감된 텍스트는 노동계급의 절망과 뿌리 없음을 기록한 작가라고 하는 명성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 세 번째 소설을 쓴 뒤에, 레이몬드 카버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음을 느꼈다. 더 나아가 그가 미학적으로 불만족하고 있는 그 절감된 소설로서의 텍스트를 발견했던 그 회상에 잠겨, 특히 논평자들이 그에게 문학적 미니멀리스트라는 명칭을 덧붙이기 시작한 뒤부터(Gentry, ⅹⅴ, ⅹⅲ).” 1981년 이후에 몇 번 인터뷰를 갖게 됨으로써 표면화된 용어 미니멀리즘을 그는 불신하고, 다른 유형의 소설을 창작하는 데 의식적으로 전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평가 마셜 브루스 젠트리(Marshall Bruce Gentry)와 윌리엄 L. 스툴(William L. Stull)은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리스트적인 변화를 그들 자신의 말로 기록하고 있다.

 

1981년과 1983년 사이에 레이몬드 카버는 회복되어 때로는 그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로 환원시켰던 텍스트를 다수의 소설로 확장시켰으며, 더 나아가 동일 기간에 그는 보다 풍부하고, 보다 알차고, 그리고 보다 더 희망에 찬 비결로 12편의 새로운 소설을 공들여 썼다. “나의 소설은 그들이 5년 전에 했던 것보다 지금을 더 긍정하려고 한다.”라고, 1982년 봄 학생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폭 넓은 단계가 시작되는 레이몬드 카버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애덤 마이어(Adam Meyer)는 “모래시계 양식(hourglass pattern)”이라고 교묘하게 언급했다. (ⅹⅳ)

 

레이몬드 카버의 경력 가운데 이러한 두 번째 단계에 썼던 새롭고 교정된 소설은 “대성당(Cathedral, 1983)”과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Where I'm Calling From, 1986)” 두 편으로 발표되었다. 그동안 그는 열정적으로 산문, 운문, 그리고 픽션, 즉 평론, 시, 소설 작품(1983)을 발표했다. 비평가들은 그가 시, 그리고 소설 “강물이 서로 만나는 곳(Where Water Comes Together with Other Water, 1985)”과 “울트라마린(Ultramarine, 1986)” 두 편 이외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기간을 레이몬드 카버의 문학경력 가운데 세 번째 단계와 동일시한다. 레이몬드 카버가 그의 경력 가운데 후기에 계속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이 트레이드마크인 미니멀리즘과 가장 동일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것을 그가 혐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최초로 그를 문학적 주목의 대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소설의 특별한 브랜드였다.

아서 M. 샐츠맨(Arthur M. Saltzman)은 레이몬드 카버를 “문장에 즐거움을 주는 정련공”이라고, 어떤 관찰력이 다시 말해서 미니멀리즘의 힘이 배제의 그 시학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론을 강력하게 지원한다고, 정의한다(7). 래리 매카페리(Larry McCaffery)와 신다 그레고리(Sinda Gregory)와의 인터뷰에서, 레이몬드 카버는 그의 작품을 정련하기 위하여 그것을 무턱대고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즉 “문장을 매만지며, 그들과 놀고, 그들을 고쳐 쓰고, 그들이 어쩐지 딱딱한 것 같으면 그들을 벗겨내며 항상 사랑했다…. 그것은 나를 되돌아보고, 페이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정련하고, 불필요한 삽입어구를 제거하는 세계 속에서의 가장 자연스러운 취미였다(74)”고 한다. 레이몬드 카버의 미니멀리즘을 향한 성벽은 자연적인 것 같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그 자신의 예술적 콘셉트의 타당성으로 플로베르의 “미학개념”을 인용한다. 먼저 레이몬드 카버는 다음과 같은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한다. “작품 속의 예술가는 그의 작품에 한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매우 강력한 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은 도처에서 지각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덧붙여 말한다. “특히, 나는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그 마지막 부분을 좋아한다(74).” 어떤 비평가는,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은 그의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애매성에 타당성을 갖게 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즉 “은어(또는 사투리)를 허용하는 한계로까지 진행된다면, 경험은 지각의 허약해진 어휘가 되어야만 한다. 대화는 짧고, 변명할 여지가 남겨지고, 그들이 어떤 것에 대해 필요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의 투영으로 존재한다. 현재의 삶에 대해 아연실색케 하는 성격은 그의 소설에 스며든 축어적(逐語的) 무능력이 선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Saltzman 7~8).” 레이몬드 카버 소설의 등장인물은 “특별히 감수성이 강하거나 내관적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그들에게 결코 겸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직접적으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는 그들의 압축된 자각을 그의 기교로 조작한다(Dickstein 508).” 레이몬드 카버와 가장 우수한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이 각기 창조한 것들을 허구적 등장인물들과 함께 공유하여 나타내는 것은 “말의 지시적 적당함의 막연한 느낌”이다. 그러나 언어의 정련공처럼, “그들은 문장 운율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공유한다(Saltzman 10).”

게다가 공유 문장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레이몬드 카버(즉,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은 가장 우수한 언어체계에 선천적이며 격상적인 결합의 빈틈없는 자각을 반영한다. 언어의 격상적 성격을 이용함으로써, 레이몬드 카버는 리얼리즘의 껍질 안에 이러한 주체적 상호관계를 관현악곡처럼 조직화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지 리얼리즘에 불과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는데, 그 이유는, 레이몬드 카버의 어떤 소설 속에는 “어떤 이상함, 즉 신화의 꼬투리”가 발견되기 때문이다(Eder 3). 미니멀리즘의 옹호자이자 비평가인 킴 A. 헤르친저(Kim A. Herzinger)는 미니멀리스트 작가의 디자인을 리얼리즘의 전통과 비교하며, “전통적 리얼리스트들은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기술하는데 관념과 감정의 복합(언어로 다듬은; 기술적 관념과 은유와 같이 언급된 수사의 결합-역주)을 사용했고, 미니멀리스트들은 그들이 기술하는(원문 그대로) 세계를 이용하는 관념과 감정의 복합(언어로 다듬은; 기술적 관념과 언급되지 않은 심층의미의 결합-역주)을 가지고 있다(20)”고 한다. 킴 A. 헤르친저의 단평은 “객관적 상관물”의 미니멀리스트적인 적용으로서 다른 방법으로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레이몬드 카버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언급한다. “시 또는 단편소설 속에서 흔해빠진 사물과 흔해빠지고 아주 적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이, 그리고 이러한 사물들(의자,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포크, 돌, 여자의 귀고리)에 막대하고 깜짝 놀라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On Writing" 24).”라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레이몬드 카버가 “적은 것이 더 많다. 즉 보다 적은 심리상태, 보다 적은 문학적 언어, 보다 적은 연속적 내레이션, 독자 자신으로서의 우리가 조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선언적(選言的, disjunctive) 세부목록을 소중히 다뤄 절약하여야만 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픽션의 조립재료일습을 갖추고 있는 연장통과 같다(Dickstein 508).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모리스 딕스타인의 재치 있는 단평이 시사하는 것보다 레이몬드 카버의 미학이 그 이상으로 존재한다. 마르크 셰네티에(Marc Chénetier)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을, “페이지 위에 나타나고 있는 말의 일차원적이면서 연속적인 해독을 충분히 초월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생략에 의해 기록된 공동(空洞), 즉 기묘한 무언을 향하여 쾅하고 갑자기 기세 좋게 그리고 멋지게 전진하기 시작하는 내러티브”로 본다(166).”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에 놀라운 정밀성과 힘이 부여됨에 따라, 어떤 결핍과 천박함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그가 그 용어를 지각하여, 본질적로 미니멀리스트와 동일시하는 것을 거절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작가 또는 비평가와 마찬가지로, 보다 좋게 기여했을지 모르는 문학은 미니멀리즘으로 라벨이 붙어있는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보다 더 좋은 레이몬드 카버 스타일의 방식으로 정의되었던 문학적 미니멀리즘을 갖고 있었다. 조정적 접근으로서의 이것은, 작가에게 매우 훌륭하게 부여됨으로써, 달성된 역동적인 예술의 레벨로 글쓰기의 스타일을 향상시켰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 단편소설은 미니멀리즘의 모든 기본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며, 게다가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스타일은 미니멀리스트의 기교 전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A. M. 츠페레프(A. M. Zverev)가 미니멀리즘과 레이몬드 카버 양측에 각주로 쓰고 있는 1992년 그의 비평 논문 “미국적인 체호프의 러시아적인 관점(A Russian view of American Chekhop)”에서 그에 의해 잘 이해되고 있다.

 

아주 흔해빠진 상황 쪽으로, 뚜렷하게 유형적인, ‘통계적으로 평균적인’ 성격과 굉장히 케케묵은 이야깃거리인…, 거의 항상 현세의 밀집단층으로, 또한 언외의 의미인, 사실상 체호프적인, 모두 언급된 단평과 직접적인 의미보다 더 많이 의미작용을 하고 있는 모든 저자의 말로 꾸려진…, 편견(또는 선입관, bias), 즉 이미저리의 극단적(extreme) 절약에 의해 성격이 만들어진…(112).

 

레이몬드 카버 초기 소설의 어떤 것에 대한 비평적인 분석은 미니멀리즘의 기본성격을 정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그가 회복되기 전 그의 최초의 특징과 동일시하는 양측 모두에 기여한다. 이러한 연구는 미니멀리스트로서의 특별한 재능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용어 미니멀리즘의 비평적 적용이 문학적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대신에 잘 실행될 때, 그 용어는 존재(being)의 복합 상태인, 그리고 보편적 인간 조건의 기본요소와 서로 관계있는, 구체적 세부목록으로 나타나는 은어와 수사어구의 정교한 조정으로 귀속된다.

레이몬드 카버에 대한 비평적 연구에서, 유잉 캠벨(Ewing Campbell)은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을 “미국적인 막연한 불안과 절망의 간결한 해석”으로 보고, 미국적인 리얼리즘의 부흥풍조 안에서의,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은 예술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형식으로서의 단편소설의 부흥으로 생각된다고 지시한다(ⅳ). 레이몬드 카버가 가지고 있는 스타일리스트적인 방법의 격상적 천착(穿鑿)은 하찮은 것들의 그럴 듯한 박판(薄板, veneer) 아래의 보편적 의미를 방출하는 것과 같은 소설양식의 미니멀리스트적인 과정의 이러한 비평적 기술과 매우 유사하다.

 

각각의 소설은 히말라야 삼목으로 안을 댄 반침(半寢)의 판벽 널과 같다. 그 표면을 발로 문질러 닳게 해도, 더욱 더 그것은 그 본질의 어떤 것을 방출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거기에 감정적이며 지적인 쾌감이 있다. 왜냐하면 블루컬러의 절망으로든지 또는 통찰을 되찾는 것으로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새로운 모양으로 고쳐 만들어진 경험으로 레이몬드 카버의 구성을 시험하는 것은 삶이 마음의 눈앞에서 형상(shape)을 획득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성된 광경과 사건의 어떤 이해는 작가와 함께 대화를 형성하고, 그러한 영적교통을 이끌어냄으로써, 우리는 우리자신을 알게 되고, 좀 더 분명하게 우리의 세계를 포착하게 된다(ⅹ).

 

이러한 요약은 “작가와의 대화”라고 하는 유잉 캠벨의 콘셉트가 교정된 것이건 아니건 하여간 정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설은 작가의 자취가 없고 그렇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레이터가 거의 없다. 유잉 캠벨이 암시하는 대화는 레이몬드 카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차라리 소설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교통을 제공하는 소설이며, 그것은 자유로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그리고 세계에 대해 크게 자각하도록 독자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솔직히 “독자들에게 위임했던 단장(斷章)들을 독자들 스스로 완성하도록 요구했던 그 독자들 안에서 공동 제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Saltzman 16). 이러한 교환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은 곧 알아볼 수 있는, 즉 보통사람들이 보통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장면 속에서의 낯익은 등장인물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소설에 등장하는 격상으로서의 인물들에 대해, 어떤 비평가는 먼저 사회 변두리의 소외계층, 즉 술고래인, 정신장애자인, 실직자인, 그리고 학대 받는, 세일즈맨과, 평범한 남편과, 평범한 부인과, 웨이트리스와, 모텔 직원과 동일시된, 그리고 알코올중독, 간통, 불면증과 절망으로 납작해진 그러한 부류의 인간으로 지각된, 그 부정적인 인간으로 기술된 등장인물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종류의 소설 속에서, 강조되는 그 중요성은 등장인물보다는 차라리 그 역할에, 그리고 이러한 역할과 그들이 그들의 개인적으로 부조리(어리석은 언행)에 대처하는 방법이 실패로 끝난 그 위에 정위된다. 소설적 등장인물 유형의 혼합 리스트로서보다 차라리 개인적인 발산 군(群)으로 고찰함으로써, 이러한 목록은 미국사회에서의 많은 민중을 묘사한다. 이보다 더 정밀한 정의는, 소설 속 이러한 등장인물의 출현이, “미국소설 속에서 리얼리즘과 지방분권주의로의 복귀, 즉 보통의 삶과 보통 민중의 재발견을…” 크게 다루었던 것이라고 언급된 단편소설의 르네상스 상에 있었던 같았다고 하는 그 충격으로 설명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며, 레이몬드 카버의 잘 알려진 이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스트의 회의론과 절망의 용광로를 통하여 만들어진 후기-사뮈엘 베케트의 리얼리즘이다(Dickstein 508).

대부분의 문학 비평가들은, 레이몬드 카버의 등장인물을 지각하는데 있어서 그의 간결한 스타일만큼이나 그의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기본요소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에 관한 짧은 논평에서, 도날드 뉴러브(Donald Newlove)는 “강력한, 몽롱상태의 거의 객관적인 작품… 희망 없는 상태의 열일곱 이야기, 즉 그 결혼과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파멸은 ‘차가운 스머노프의 열다섯’만큼이나 아주 부족한 산문 속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시한다(77). “성난 계절과 그 밖의 이야기에 관한 논평에서, 안 비티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문체상 독창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즉 그의 사실로서의 질료, 다시 말해서 사건의 분리된(객관적) 관찰은 더욱더 기묘함과 당황케 함이 되는 사건으로서의 힘을 쟁취한다(178)”고 언급한다. 안 비티는 “그의 주체 질료(subject matter)는 곧 평범하면서도 기묘하며…, 레이몬드 카버는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기묘한 속박과 결합, 두 사람 간에 인식된(또는 인식되지 못한) 언외의 강박관념이다(179).” “이웃(neighbors, 곧 객체 질료)”과의 단절에 대하여 안 비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것은 거의 신화적이며…, 부연설명이 지나치게 완벽하고…, 그것은 당신의 눈에 비치는 빛 못지않게 분명하고 순전하며, 그것은 슬픔을 초월하는 어떤 무엇의 원인이다(179).”

모리스 딕스타인은 그의 소론(小論)에서, “평범함의 추구”에 대하여, 레이몬드 카버 소설의 그 민중 그 격상에 대해 언급했던 것과 병치적이라고 소견을 밝힌다. “그의 블루컬러 등장인물들은 중상류층 삶의 본류와 먼, 다시 말해서 세련된 도시풍의 아이러니와 궤변으로 삶을 영위한다(507).” 또한 모리스 딕스타인은 그들을 “특별히 감수성이 강하거나 내관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지만, 레이몬드 카버는 “그들에게 결코 으스대지도 않고 그들을 직접적으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는 그들의 압축된 자각을 그의 기교로 조작한다(507~508)”고 주석을 단다. 워런 칼린(Warren Carlin)의 단평은 다음과 같이 기술을 계속한다. “레이몬드 카버는 우리가 단편소설 작가의 작풍과 결합했던 변화와 문학적 개성을 밖으로 많이 드러낸다. 그 등장인물들은 몹시 취한다. 그들의 말은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그 표층에는 아무것도 없거나, 거의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성생활이 천박하고, 일시적이며 좌절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87~88).”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의 엿보기 취미(voyeurism, 관음증), 인격의 분열,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의 기교에 관한 그들의 소론에서, 데이비드 복서(David Boxer)와 카산드라 필립스(Cassandra Phillips)는 먼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격의 분열은 인간 그 자신의 정체성과 삶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그러고 나서, “그의 일탈된 등장인물은 일시적으로 타자를 추구하며, 레이몬드 카버는 그들 삶의 공허가 섬뜩하게 분명한 광경을 돌연 그들에게 부여하면서 그들을 매복시킨다(75).” 또한 데이비드 복서와 카산드라 필립스는 이 레이몬드 카버의 등장인물에 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그들에 대한 개념을 정의한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실직자 그리고 비참하게 고용된 자, 향상지향(사회적․경제적 지위)의 일을 하고 있는 소수일원과 중류층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친밀한 정이 없고, 보다 나은 것으로의 변화에 대한 막연한 꿈으로 표현되지 못한, 실현되지 못한, 또는 승화된 결핍(needs)이다. 그들은 이웃 서민이며, “진짜 미국인”의 흔한 표상이다. 일반적으로 레이몬드 카버는 생기가 없는, 난잡함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등장인물들, 즉 직업 중에서도 세일즈맨, 거짓말쟁이 중에서도 작가, 한 학기 동안의 학생들, 결혼생활 중에서도 평범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의식이 말똥말똥한 그리고 도저히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환자에 대하여 쓴다. 레이몬드 카버에게 선택된 과제는 이러한 민중들이 혼돈과 그들의 공허한 삶을 분리하는 커튼 뒤에서 흘끗 엿보며 갑자기 깜짝 놀라게 하고 있을 때 그 특별한 순간을 가장 적합한 언어와 상징을 통하여 시사하는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경험의 관음증환자가 된다(76).

 

“매듭을 풀고, 그것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에서 애매성으로 다시 묶이며,” 미가엘 고라(Michael Gorra)를 인용하여, 미가엘 거하트(Michael Gearhart)는 “비평가들은 이러한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사회적, 윤리적, 그리고 정신적 마비상태의 원인이 되고 있는 말(무능력,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로 그들의 좌절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무능력을 공유한다고 썼다는 것을 지시한다. 즉 ‘그 각각의 순간은 등장인물을 어리둥절하게 할 수 있고, 그(또는 그녀)를 무위(無爲)의 혼동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439)”고 한다. 결국 쥬디스 체틀(Judith Chettle)은 레이몬드 카버의 “생략된 것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만큼 의미작용을 하고 있는 그 장소의 공유 스타일은 인간의 정신적 황무지의 이러한 인상을 강화할 뿐이다.”라고 넌지시 언급한다(1503).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은 완고하게 입이 무겁고 말하기를 꺼린다. ―소설 그 자체에 살고 있는 등장인물들처럼. 그의 선배 체호프와 헤밍웨이의 소설과 비교해보면,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거의 말없이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는 에두름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조용히 살았던 삶의 흑백 스냅사진과 아주 많이 닮았으며, 만약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비록 솔직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어로 언급된 그 기술은 고귀하게 명상되고 양식화될 것이다. 그의 소설 중 어떤 것은 아주 극소해서 그 안에 생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순히 비인간화된 양식으로만 보이는 것 같다. 어떤 주제이든지 간에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때때로 충격적이며 적나라한 윤곽으로, 보통 하찮은 사건으로, 그리고 여백으로, 그들의 고립적인 성격을 전혀 분절할 수 없는 것 같은 등장인물의 과묵으로 존재할는지도 모른다. 레이몬드 카버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남녀간의 박약한 결합과 항상 절박한 것 같이 보이는 불가사의한 간격이다.

발표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와 단편소설집에서 가장 흔한 것 중의 하나인 “춤추지 않으시겠어요?(What Don't You Dance?)”는 그가 결혼의 박약한 결속을 매우 흔한 연기로 묘사하는 것에 적용된 레이몬드 카버의 미니멀리스트 스타일 가운데 가장 우수한 예이다. 전형적인 레이몬드 카버의 줄잡아 말함 속에서, 명백히 하찮은 장면의 은밀한 기술은 붕괴된 결혼생활과 아내 부재의 순수 환경을 넌지시 언급한다. 즉 다음과 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부엌에서 그는 마실 것을 쏟아 붓고, 침실은 앞마당에 만든다. 매트리스는 벗겨지고, 줄무늬 시트는 양복장 위에 두 개의 베개와 나란히 놓여있다(3).” 다음 시퀀스에서, 사이가 틀어진 아내는 소유격 대명사 "her"의 부재로서의 원형(antecedent)이다. 애매한 그리고 물러난 그녀에 대한 변죽울림 전체는 앞마당 잔디밭에 배치됨으로써 세간에 대한 남편의 관찰에 의한 발언 속에 묻힌다. “그러한 일이 없었다면, 물건들(그의 침대 옆에 있던 책상과 독서 등, 그녀의 침대 옆에 있던 책상과 독서 등)은 그것들이 침실에 있었던 방식 그대로 놓여있었을 것이다(3).” 그 사람은 실내 생활품을 앞마당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그리고 그것은 싸구려 물품처럼 보인다.

 

그날 아침 그는 찬장을 청소했고, 살림방에는 세 개의 납지용기만 있을 뿐, 모든 소지품은 집밖에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코드 확장을 계속하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었다. 물건들은 그것들이 실내에 있었을 때 있었던 방식 그대로 변함없이 작동되고 관찰되었다.

이제 그러고 나서 자동차는 느리게 움직이고, 사람들은 말똥말똥 바라본다. 그러나 정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게다가 그가 결코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았던 것이 그에게 나타났다(4).

 

어떤 젊은 커플이 운전하고 있는데, “처녀가 청년에게 말했다. 중고 가정용품 판매임에 틀림없어(4).” 젊은 커플 사이에서 통용되며 계속 삭감된 그 신비로운 교환은 최초의 개진만큼 생략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교통은 마치 “흰 코끼리 같은 언덕”에서의 남녀간의 부자연스런 교환과, “프란시스 마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의 긴장된 교환같이, 헤밍웨이의 소설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과 공유된 대화가 회상된다. 중고 가정용품 판매장의 결혼생활의 팬터마임은 계속된다. 침대를 시용(試用)해보기 위하여, 처녀는 옆에 누워있는 청년을 향해 말한다. “키스해줘요,” 그러나 그는 “일어나 텔레비전을 보는 체하며 그대로 있었다(5).” 그 남자는 일어나 “개방된” 집 안에서 연기하고 있는 그들을 발견한다. 그 세 사람은 파괴된 가정으로부터 발아(發芽, 새로운 의미가 될 것이다: 역주)로 이동하는 찰나의 동작을 경험한다. 그 남자는 거실 밖의 젊은 커플을 환대한다. 그들은 함께 마시고 춤춘다. ―개방된 그 장소에서 기진맥진하여, 이웃의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한다. 그리고 그 남자 자신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곳을 초월한 모든 사물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레이몬드 카버의 이와 같은 소설 속의, 적나라한 사건은 폭로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과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내레이터는 그 남자가 알코올중독으로 별거하게 되었고 또는 이혼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매우 우울하게 되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 남자가 주정뱅이로 취급받아 소외되고, 그의 삶 속에 있었던 일로 인하여 더 이상 동기유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지한다. 그 남자는 공개된 모든 것, 즉 ―그의 파괴된 결혼생활에 대한 필사적인 은유를 앞마당 잔디밭에 연출하는 것으로 그의 가정생활의 은밀한 내재-삶을 밖으로 구체화했다. 약혼한 그 커플의 행동은 그들 자신을 예시할는지도 모르는 결혼생활의 무의식적으로 모방한 시나리오를 나타낸다. 타인의 붕괴의 여파를 그 젊은 커플의 출발에 후소화시킴으로써(함축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레이몬드 카버는 독자를 위해 소설의 직감 속 그 처녀를 동일 부류의 긴장으로 재창조한다. 유잉 캠벨에 의하면, “레이몬드 카버는 꿈이 필사적인 행위 속에 자기 자신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종종 시시해진다는 것을, 이러한 필사적인 사람은 그가 그녀또래였을 때,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관계로 인생을 시작할 때 사랑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발단으로 처녀를 이끌어간다(45).” 젊은 그 처녀는 후소를 직관으로 인지하는 것 같으며, 그것을 필사적으로 빈사화하여 나타내려고 시도하며, 마치 그 소설을 자세히 열거함으로써 그것을 믿는 것처럼 어쨌든 그녀는 그 결합을 예측할 수 있고, 그것으로 그 결과를 교묘하게 다룬다. 내레이터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거기에는 많은 것이 있었으며, 그녀는 그것이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시도를 중단한다(10).” 가장 훌륭한 다른 미니멀리스트 작가에 의해 쓰인 소설과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대부분은,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기탄없이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소설 그 자체 안에서 객관화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객관화는 등장인물을 위한 함수적 세계와 레이몬드 카버의 창작기교의 과정을 통하여 독자를 위한 최후의 효과 양측에 나타난다.

그의 첫 작품집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에서, “비곗덩어리(Fat)”는 일일이 이야기하는 사건에 의해 어떤 무엇을 인지하려고 하는 웨이트리스와 함께 이러한 종류의 딜레마를 정확하게 연기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위기 위해 내 친구 리타(Rita) 쪽으로 고쳐 앉아, 그것(it)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1).” 여기서 "it"에 대한 지시는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 안에서의 "it"에 대한 사용을 생각나게 하는데, 그 이유는 두 소설 속에서, "it"이 어떤 모든 것을 포함한 "it(전체)"과 동시에 "it(일부)"의 개인적인 양상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흰 코끼리…”에서의 "it"은 낙태, 유아, 선택의 자유라고 하는 일부, 그리고 전체의 장면을 함께 지시한다. “비곗덩어리(Fat)”로서의 "it"은 비곗덩어리 고객과의 조우이다. 즉 비곗덩어리라고 하는 고객으로서의 변형(separate version)/ 사람이 아닌 물체로서의 비곗덩어리라고 하는 변형(version of fat), 본질직관으로서의 존재(being)/ 환원된 단자로서의 비곗덩어리(becoming fat), 강박관념으로서의 강제(compulsion)/ 그것이 임의적으로 선택한 비곗덩어리(choice), 그리고 그 편차의 종합적 함축원리와의 만남이다. 웨이트리스의 이야기는 포식증환자가 중축이 되기 때문에, 많은 비평가들은 카프카(Kafka)의 “굶주린 광대(A Hunger Artist)”와 “비곗덩어리”를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인다. 유잉 캠벨은 “레이몬드 카버의 선택의 자유가 아닌(그러나 먹기만 하는) 굶주린 광대의 근원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지만 고정된 카프카의 “굶주린 광대”와 비교됨이 명백하다(14)”고 본다. 이러한 상호관계가 겉으로는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지만, 그러나 레이몬드 카버는 카프카의 내러티브에 없는 어떤 무엇을 제공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굶주린 광대와 직관적으로 동일시한다. 먹도록 강제된, 그저 “굶주린 광대”와 같은 내레이터는 그렇다고 해서 내적으로 뚱뚱해지지는 않는다. 그 기하학적 도형과 같은 양식은 일차원적이며 직선적인 대당이라기보다 차라리 트라이앵글 모양으로 변하며, 이러한 카프카적인 결합보다, 레이몬드 카버의 “거기에는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그녀의 친구 리타와 함께 이야기를 공유하는데 진력함으로써, 웨이트리스-내레이터는 커뮤니케이션과 의미를 확립하려고, 다시 말해서 아마 자신의 의미를 확립하려고 시도할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비곗덩어리 고객에 한해 부속되어 세부묘사를 떠맡고 있는 그녀로 한정되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혼자만의 순간과 묵상에 대한 정보를 신중히 포함한다. 그녀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개인적 데이터를 비곗덩어리인 고객에 대하여 어떤 세부목록으로 후소화시킨다. 그렇게 실행함으로써, 그녀는 비곗덩어리 남자와 그녀 자신 사이의 대비를 드러내고, 그녀의 거동과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타인들의 거동과의 차이를 폭로하며, 사건에 대해 그녀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것과 리타의 어리둥절함 사이의 편차를 지각한다. 첫 번째 사람의 복수 대명사 "we"를 사용하는, 그 비곗덩어리 남자가 하고 있는 담화의 총괄적인 방식은 그 웨이트리스와 그의 결합에 신용을 빌려주지만, 그는 그의 테이블에 혼자 앉아 말을 걸며 이야기하는 레스토랑의 단지 어떤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 “이제 주문을 하려고 하거든요.(1)

웨이트리스는 조롱하는 것 같은 코멘트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레스토랑의 다른 종업원들은 지절거린다. “맙소사, 정말 비곗덩어리야, 하며 리앤더(Leander)도 말했어. 저 사람이라고 저렇게 되고 싶었겠어, 그러니, 입 닥치라구(3).” “비곗덩어리는 아직도 먹고 있니?, 하며 해리어트(Harriet)가 말했어. 너도 해리어트를 알지?(4)” “…루디(Rudy)는, 해리어트가 그러는데 네가 비곗덩어리를 서커스에서 데려왔다고 말했어…, 난 이렇게 말해주었지. 루디, 그가 비곗덩어리인 것은 사실이야, 그렇지만 그게 모든 얘기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구(5).” “마르고(Margo)는 내게 말했지. 너 비곗덩어리한테 반했구나? 그는 진짜 비곗덩어리야. 헌데 뚱뚱한 것은 그 사람의 일부분이야(Now that's part of it). 난 정말 일부분이라고 생각해(2).” 여기서 그녀가 "it"에 대해 만들고 있는 것을 지시하는 그 애매함은 애티튜드의 원리(a principle of attitude)에 기인한 것이다. 여기서 대명사 "it"에 대해 웨이트리스가 사용하는 것은 타인과 그녀를 분리하는 그 남자의 조건을 향한 감수성으로서의 편차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그 비곗덩어리와 그녀를 연결한다. 이러한 결합은 “그녀의 경우에 비록 그녀가 뚱뚱해질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거리낌 없이 너무 먹는다는 것을 고객에게 말할 때 보강된다(Campbell 13).” 게다가 “그게 모든 얘기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구(that is not the whole story)”라고 지시됨으로써, 그녀가 아이를 뱄는지 안 뱄는지, 그리고 지나치게 뚱뚱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폭로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질 때, 그녀는 나중에 비곗덩어리 고객과 그녀의 결합에 대한 자각을 입증시킨다. 그 다음에 침대에서, 그녀가 루디의 성적 진전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갑자기, “루디가 작은 대상, 즉 아무리 보아도 거의 없는 대상이 되고, 그래서 그녀가 무시무시하게 비곗덩어리인, 지나치게 비곗덩어리인,” 그 비곗덩어리로 느껴진다(6). 지나치게 비곗덩어리 같지는 않더라도, “무시무시하게” 비곗덩어리이어서, 부정적 이미지라기보다 차라리 조정적인 비곗덩어린 것이다. 그녀의 감수성으로,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루디보다 더 큰 인간이 된다. 따라서 디디와 고고가 아직도 고도를 기다리는 것만큼, 리타도 “기다리며 앉아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알고 싶다”고 내레이터에게 말하며, 조정적인 주석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당당해야지. 내 삶도 변화시키고 말 거야. 난 그것을 느껴(6).” 어쩌면 그녀가 루디의 애를 뱄을지도 모른다. 즉 그녀가 경험으로부터 성장되고 있는 그리고 루디와 다른 작은 사람들로부터 생성되고 있는, 새로운 자신의 자각으로 수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은 지나치게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텍스트 안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객관적 내레이터는 사설적 단평 또는 평가적 관찰로 소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내레이터는 사건의 관여자일 뿐만 아니라, 레이몬드 카버의 등장인물 중의 오직 한 사람만이 접근하는 것이 아니든지, 일어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어떤 본질의 돌연한 현현이든지, 하여간 소수의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단어 “본질의 돌연한 현현(epiphany)”은 개념의 가장 일반적인 적용으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통찰이 소설 속에서 갑작스럽게 주조해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세계 속에 지각과 변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즉 발생될 어떤 무엇이 측정됨에 있어서 그 의미가 매우 하찮은 것일지라도, 상대적으로 말하기는 본질의 돌연한 현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소설 속에서의 지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결합은 함축적이다. 많은 것들이 은유적 결합이다. 비록 소설의 마지막 순간이 조정적 주석으로 에워싸일지라도, 그 결말은 애매하다. 해답은 가장 중요한 무엇을 포함하여야만 하는 것, 즉 "it"이 무엇이든지간에 이러한 여인의 삶 속에서의 어떤 종류의 변화와 성장이 있어야만 하는 그곳의 독자와 함께 존재한다. 유잉 캠벨은 이러한 콘셉트를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비록 지각의 차원에서 인식될 수 있을지라도 그리고 슬쩍 비춰 보일지라도, 그녀의 새롭게 하기는 완성된 것으로 또는 정지된 것으로 조망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생성의 유동상태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13).”

또한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의 첫 작품집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속에서, “이웃들(neighbors)”은 보다 더 애매하며,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적인 소설이다. 그것은 결혼한 젊은 커플, 즉 여행을 떠난 그들의 이웃 해리어트와 짐 스톤(Jim Stone)을 위해 아파트를 돌보는 빌(Bill)과 아를린 밀러(Arlene Miller)의 특징을 이룬다. 그들이 “행복한 커플”이기는 하지만, 빌과 아를린 밀러는 그들이 그들의 친구집단 사이에서, 즉 “대부분 그들의 이웃 해리어트와 짐 스톤의 삶”과 비교하여, 최소한의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7). 주요한 초점은 그가 이웃집 아파트에서 볼일로 오래 꾸물거리고 있는 빌에게 있다. 그의 최초의 행동은 빈사적(賓辭的)이다. 그는 킁킁거리며 사물을 찾아다니고 주제넘게 간섭하지만, 그의 몸짓은 빠르게 기상천외의 것이 된다. 그는 아파트에서 꾸물거리기 시작하고,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알약이나 어떤 담배의 용기같이 하찮은 물건을 훔치기 시작한다. 그는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고, 그들의 위스키를 착복한다. 빌은 이웃집에 체류하는 동안 성적으로 자극을 받는다. 그는 직장에서 몰래 쉬는 시간을 낸 후 이웃집 아파트에서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는 짐 스톤의 셔츠와 짧은 바지 하나를 골라 입는다. 또한 그는 해리어트의 브래지어와 속옷을 입어본다. 소설은 독자가 빌과 마찬가지로 황홀지경에 빠진 아를린 밀러를 체득하게 될 때 빠르게 중첩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서랍에서 발견된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은 독자의 추측으로 남게 된다. 그들이 이웃집 아파트에 체류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된 후,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 되돌아오고, 그리고 해리어트와 짐 스톤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이 이웃집 아파트 안에서 열쇠로 잠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기치 못한 사건의 반환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기묘하게 필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걱정 마,’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아무쪼록, 걱정 마.’ 그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서로 끌어안았다. 마치 그들은 바람과 단단히 준비된 자기 자신에게 대항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어에 기댔다(14).” 여기서 레이몬드 카버의 짧은 서술문은 내레이터 “그리고 독자가 빌과 아를린 밀러의 포옹처럼 함께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 속에 문학적 환경을 생산한다. 그것은 그들이 또는 우리가 기대했던 물리적인 결합이 아니며, 그리고 그것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일진의 돌풍에 잘 견디는 오직 그들만을 허락할 수 있는 포옹이다(Beattie 178).”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작품의 유형인, 이러한 소설은 근거에 대한 명백한 실마리가 담겨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인간의 통찰력, 즉 별개의 숨겨진 리얼리티, 특히 다른 것에 대한 동일성이 보다 좋은 위치에 정위될 때, 그 신비스러운 매력을 그린다. 그것은 또 다른 퍼스나의, 다시 말해서 지식과 독특성으로서의 만져서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이러한 충당의 전율적인 흥분에 대한 것이다. 빌과 아를린 밀러는 어둠, 즉 그들 “이웃집”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관음증환자의 스릴을 경험했고, 또 해리어트의 란제리를 입어보는데 그 자신이 혼자이고 아무에게도 관찰되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는 빌을 관찰하고 있는 독자-관음증환자로서의 스릴도 경험했다.

이와 동일한 첫 작품 가운데, “그들은 당신의 남편이 아니다(They're Not Your Husband)”는 관음증이 한계의 붕괴 상에서 항상 결합하는 것으로서, 또는 남녀가 어떤 또 다른 허약 상에서 향연을 베푸는, 말하자면 점점 거세지는 배경으로서, 그의 결혼생활의 완고한 주제와 함께 인간조건의 선천적인 기본요소로 존재한다는 그 함축을 레이몬드 카버가 결합하는 것 그 중의 한 소설이다. 또한 그 소설은 커뮤니케이션의 결핍으로 인한 순환주제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무능력을 표현한다. 독자가 인지하게 되는 모든 것은 등장인물과 상태의 내재 실재성을 반영하는 일상생활의 그 장면 안에 담긴 결합으로부터 직관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얼 오버(Eearl Ober)는 해고된 세일즈맨이고, 그의 아내 도린(Doreen)은 철야 커피숍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아내를 보려고 잠간 들렀을 때, 얼 오버는 두 남자가 아내의 몸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엿듣는다. “‘저 엉덩이 좀 보게. 정말 대단하군…,’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하지만 비곗덩어리 칼집을 좋아하는 놈들도 있다구…,’ ‘난 아냐…,’ ‘난 절대 아냐(21).’” 이렇게 약간 엿들은 후에, 얼 오버는 그의 아내가 반드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그리고 식욕을 감퇴시키는 몸으로 몰아붙여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녀의 동료들이 그들의 걱정을 말로 나타낼 때, 얼 오버는 그들을 무시하고 도린에게 말한다. “그들은 당신의 남편이 아니야.” 친밀하게 가깝지는 않더라도 인지할만한 단순 장면, 단순 변화(이러한 사건)는 약간의 사회적인, 배우자로서의, 그리고 종개념으로서의 고유의 개인적인 문제를 반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사용되지 않은 말 그리고 이러한 말, “비곗덩어리 칼집을 좋아하는 놈들”과 같이 겉으로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가 되기를 원치 않는, 얼 오버는 인색한 회계사의 말과 유사한 행동을 연출한다. 매일 밤 그는 동전을 쌓고 지폐를 펴며 도린의 팁을 계산한다. 매일 아침 그는 그가 목표로 삼았던 눈금 상의 보이지 않는 무게로 그녀를 계산한다. 그는 양측의 접합을 계속 유지한다. 구두쇠의 시각적으로 형이하의 은유는, 무게가 전이된 그의 행위를 통하여, 살덩어리의 무게를 착취하고 있는 샤일록(Shylock)의 이미지로 확장한다. 결국 부인에 대한 얼 오버 자신의 관점과 번역으로, 그는 그녀의 체중감량을 ―즉 어떤 "it"에 대한 체중감량을 계속한다. 즉 간이식당에서 남자 손님에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좀 인상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보기가 좋은지 나쁜지 얘기 좀 해봐요(27).” 무례한 질문을 엿듣고 다른 웨이트리스가 도린에게 가서, 얼 오버를 가리키며, 저놈 누구야? 아주 순진하게 묻는다(27). 얼 오버를 “건달” 협회의 설립위원 쯤으로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용어 “건달”이 환기시키고 있는 모든 내포와 변죽울림은 웨이트리스, 내레이터, 작가, 그리고 독자에 의해 얼 오버에게 적용된다. 어떤 이유 때문에, 즉 이 소설의 분석에서 유잉 캠벨은 얼 오버가 스스로 그의 특성을 벌충하지 못한다고 하는, 그리고 얼 오버의 성격에 대한 작가의 전개가 관심을 갖고 어떤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쩔쩔매게 된다. 거기에는 그에 대한 비극적이거나 애처로운 것도, 감탄할만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단순히 불쾌하고, 천박함과 해악함을 결코 실현하지 못하는 것 같은 숙맥일 뿐이다(19~20). 결국 유잉 캠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세계를 재해석하거나 자신의 번역으로 팽창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등장인물도 독자도 하여간 어느 누구도 결코 알아채지 못한다(20).” 아마 유잉 캠벨은 그가 얼마나 구역질나는 사람인가 정확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것의 은밀한 관찰에 대한 가치를 알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독자는 얼 오버가 실제로 실행하는, 즉 결코 알아채지 못하거나 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한다. 더 나아가 실존주의자는 어떤 인간존재든지 그렇게 무자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나,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는지도 모른다. 아니, 본질의 돌연한 현현은 결코 경험적으로 얼 오버의 것으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갑자기 또는 그렇지 않게, 통찰로 나타나며, 여기서 생각건대, 모든 독자를 위하여 존재한다.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레이몬드 카버는 모든 인간성의 수용능력을 반영한다(Saltzman 18).

레이몬드 카버의 첫 단편집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가 형성하고 있는 강력한 요구는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흰 코끼리 같은 언덕”에서 젊은 부인의 애조 띤 애원을 상기시킨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만 좀 하지 않겠어요?” 침묵을 위해 이렇게 부탁하는 애원은 평화와 평온을 위한 필요성에 의해 흔히 유발되며, 그래서 애원자가 그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말하기는 커뮤니케이션의 효과가 없는 것 같으며, 따라서 이렇게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의미 없는 단어의 소음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게 느껴진다. 아서 M. 샐츠맨은 “속삭임에 충격을 받은” 존재가 됨으로써, 그리고 “오도(誤導)된 격발(激發)의, 신경의, 그리고 전도(顚倒)의 변형 속의 공통된 병폐를 그들이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만큼 드러냄으로써,” 이렇게 특별한 작품 속의 등장인물을 정의한다(22). 아서 M. 샐츠맨은은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ch)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즉 이러한 일치상태에서의 삶의 사회심리학적 연구, 다시 말해서 「미니멀리즘적인 자아: 어려운 시점에서의 심리적 생존자(The Minimal Self: Psychic Survival in Troubled Times)」를 인용한다.

 

어려운 때에, 일상생활은 살기위한 몸부림이 된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자아는 절박한 결핍생활의 시대에 그 외곽에 정위된 일종의 사치품이 된다. 자아는 개인의 역사, 친구, 가족, 다시 말해서 어떤 처지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한 포위공격 하에서, 자아는 역경에 대항하여 무장된 방어적 핵으로 수축된다. 정서적 평형상태는 지난 세월의 오만한 자아가 아닌 미니멀리즘적인 자아를 요구한다(Lasch 15).

 

20세기 미국에서의 크리스토퍼 라쉬의 삶이 비록 어떤 것과 논쟁적인 것인지 모를지라도, 아서 M. 샐츠맨은 그의 표현이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많은 등장인물의 삶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미니멀리스트 소설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허구적 장면은 많은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문학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크리스토퍼 라쉬의 이론에 리얼리티가 있는 것으로 게다가 어떤 적절한 원천임에 틀림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집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속의 소설들은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가장 우수한 정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제공되었다. 이 세 번째 작품집 속의 소설들은, 비평적으로 약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의 두 번째 작품집 “성난 계절과 기타의 소설들” 안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었다. 1989년도 판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의 뒤표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은, 전체 미니멀리스트의 효과를 잘 요약하는데 기여하고 있는데 그것은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가 쓴 것으로서, 통찰력 있는 보고서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전체적인 문화와 전체적인 윤리의 조건이 비록 외관상 가벼운 스케치로 표상될지라도, 그것이 얼마간 완벽하게 실현되기 전의 한 순간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꼭 잡아둔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관련이 있는 그 비평적 관찰에는, 그것(it) 안에 “발생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골칫거리가, 레이몬드 카버의 타이틀 소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와 대비되어 꼭 박혀있다. “고도를…”에서와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두 명씩 두 결합으로 만들어진 네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무대이다. 즉 멜(Mel)과 그의 두 번째 부인 테리(Terri), 그리고 닉(Nick)과 그의 부인 로라(Laura)의 경우를 말한다. 디디와 고고에 비교할만한 그들은 어떤 장소에 갈려고 하는데, 그러나 결코 그 장소에 가지는 못한다. 모리스 딕스타인은 그 소설의 일반적인 특색을 다음과 같이 친숙한 말로 기술한다. “레이몬드 카버의 유명한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스트의 회의론과 절망의 용광로를 통하여 용해되었던 포스트-사뮈엘 베케트의 리얼리즘이다(508).” 이 두 커플이 하는 것은 평범하게 식탁 주변에 앉아 진을 마시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환은 "it"을 위해 다양한 지시대상물을 두드러지게 다루며, 이 소설 속에서의 대화는 사랑의 많은 다양성을 명시한다. 즉 정신적인, 육체적인, 육감적인, 감상적인, 기사도 정신적인, 게다가 헌신적인 애정이 이상화된 사랑, 친구들 간의 사랑, 그리고 유잉 캠벨이 “그 정도가 아니라 정말이지 욕설로, 종종 살인으로, 어떤 때는 자살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고통의 부류와 동일시하는 사랑(46)”을 말한다. 헤밍웨이의 같은 소설 속에서 침묵을 요구하고 있는 진심으로 반복된 단어 “제발(please)”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속에서의 대화, “평생 한번만이라도 입 다물어 줘… 잠깐 동안만 내게 호의를 베풀어주지 않겠어?”와 같은 애원이다(146). 안 비티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단다. “헤밍웨이를 상기하지 않고 레이몬드의 소설을 읽기란 어려운 일이다. 즉 여기서 냉철함(stoicism)은 매우 지나치게 화려한 형식이 아님을 말한다. 비록 체념처럼 보일지라도… 침묵은 어떤 무엇의 감응으로 충당되는 것 같다(180~81).”

닉은 이 소설에서 제1의 내레이터이다. 그러나 네 명의 등장인물 중 멜은 사랑에 관한 이 담화의 주요한 유인자(誘因者)이며, 언제나 아이러니하게도, 심장 병리학자, 즉 사랑에 관해 강의하고 있는 심장전문의이다. 그는 두 가지 일화와 관계한다. 즉 하나는 테리의 전 남편 에드(Ed)에 관한 것인데, 그의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위협적인 것이며, 따라서 결국 자살을 저질렀고, 두 번째는 어떤 노부부가 교통사고로 심하게 부상을 당했고, 몸을 깁스해서 꼼짝 못하고 눕게 되었는데, 영감이 할멈보다 덜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멜은 경청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 있어? 그 영감은 젠장 머리를 돌려 젠장 할멈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풀이 죽어있었다, 이런 얘기야(151).” 이렇게 주관적인 이야기는 그 대화의 방향을 멜의 편향으로 흐르게 하고, 따라서 사랑에 대한 주관적인 형세를 반영한다. 그 내레이터는 대화의 무드를 반영하고 있는, 그리고 “이 소설에, 궁극적으로 그 타이틀을 부여하고 있는 그 책 안에서의 모든 무드에, 즉각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그래서 도움이 되는 비유와 함께 관찰력이 예리한 내레이터를 제공하고 있는 그 자신만의 햇빛에 쬐인 이미지의 무리를 가지고 있다(Runyon 132).” 소설의 바로 그 발단에서, 닉은 “햇빛이 싱크대 뒤의 큰 창으로 들어와 부엌을 가득 채웠다”는 것을 관찰했다(137). 그가 주목한 뒤에, “방안의 햇빛은 이제 변하면서, 점점 엷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창밖의 나뭇잎들은 여전히 희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으며, 나는 유리창과 포마이카 카운터 위에 드리워진 그것들의 무늬, 즉 양식(pattern)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같은 양식이 아니었다(150).” 그 양식들은 표면(유리창, 포마이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 이러한 반영의 화맥(context)은 그것들의 양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그 대상(things) 가운데서도 특히 사랑의 화맥은 그것이 획득한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내재-형세(inner-state)를 반영하는 양식에 영향을 미친다. 랜돌프 폴 루니온(Randolph Paul Runyon)은, 그의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에 관한 비평적 연구, “레이몬드 카버 읽기”에서, 이러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는 그 타이틀 소설의 전체 작품을 통하여 반복됨으로써, 화맥으로 변하고 있는 양식의 반영인 이러한 주제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양식의 비유는 멜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언급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과 관련되어 있다. 세 개의 다른 양식 안에서 일어난 동일 기초 이미지의 이러한 예는…, 단순한 이야기 안에서 규정화되며, 그러므로 그것은 아마 그 타이틀의 소설 안에서 우연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두 이야기(때로는 세 이야기)는 동일 기초 이미지를 다른 양식으로, 다른 화맥으로, 과장하여 나타낸다. 할멈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멈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영감이 비탄에 빠진 것과 같은, 그 이야기는 영감의 바로 곁에 누워있는 그의 짝을 반밖에 지각할 수 없다는 것과 그 표층 아래의 지금 당장 반밖에 알 수 없다는 관계를 만들고 있는 그들(멜, 닉, 테리, 로라)의 한계를 애타게 탈출하고자 하는 것을 동시에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133).

 

이러한 콘셉트는 다음과 같은 멜 자신의 가정으로 함축된 어떤 무엇을 후소화시킨다(병치시킨다). “로라, 만약 내가 테리를 버린다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리고 만약 닉이 나의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질는지도 모릅니다(150~152).” 다시 말해서 그 화맥이 변형될 때, 어떤 장면(이러한 이야기로서의, 내재 이야기로서의, 이러한 관계속의 모든 이야기로서의, 독자의 삶이 있는 그 이야기로서의), 즉 그 모든 것이 “만약(if)”으로 다르게 폭로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다르게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 부인, 삶, 사랑이라고 하는 최초의 양식은 항상 동일하다. 레이몬드의 소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서의 어떤 이야기)”는 사랑의 전체 양식을 반영하고, 그 명칭을 함축하고 있는 전체관계의 이야기를 몸짓으로 연기한다.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소설집은 사랑의 양식을 위해 다양한 화맥을 반영하고,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는 거의 무한수의 화맥을 넌지시 언급한다. 이러한 소설과 각각의 이야기는 종합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작품집 속에 내포되어 있고, 이러한 소설, 이러한 작품집, 이러한 작가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와 같은 방식으로 내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반영하며,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의 최대량의 디자인을 반영한다.

그의 개인적 그리고 문학적 르네상스의 화맥 속에서, 레이몬드 카버는 어떤 미니멀리즘의 사람을 감동시키는 예와 함께 문학비평분야에 제공된 그 자신을 아무것도 없는 것과 대비시킨다. 그는 알코올중독과 미니멀리즘으로부터 전환된 뒤 단순히 새롭게 또는 단순히 마전장이(fuller)의 방식으로 소설을 생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기 소설의 어떤 무엇을 고쳐 쓰고 증대시켰다. “대성당”의 새로운 이야기들은 초기 작품집에서의 이야기들보다 낙천적이고 희망에 찬 것 같이 보이며, 교정된 그 이야기들은 마전장이적인 방식이면서도 초판보다 더 상세하다. 새로운 스타일 속에서, 레니몬드 카버는 이야기를 야기 시킨 감정과 장면을 토론하고 설명하고 탐구하는, 그래서 더욱 더 증가하는 자율성을 드러낸 내러티브적 목소리로 이야기를 생산했다. 선언(選言) 대신에, 레이몬드 카버의 후기 소설은 비록 폐쇄되어있을지라도, 결합 또는 재결합 쪽으로 이동한다. 문학적 변형(metamorphosis, 메타형태형성)은 레이몬드 카버의 성분상의 의식적이며 스타일리스트적인 변화라기보다 오히려 “전망 있는… 일종의 신념과 살아있는 환희를 표현하고 있는 인생관으로의 기본적인 이동의 반영이었다(Cochrane 79).”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과 판에서 이러한 변화의 가장 심원한 예는 그의 1976년 작품 “목욕(The Bath)”에서의 이야기와 1983년 작품 “사소하지만 좋은 것(A Small, Good Thing)”에서의 이야기 사이에서 발견된 그 기본적인 편차로 현저하게 나타난다.

두 이야기에서, 병원에 입원한 아들의 양친은 그의 상태를 걱정하면서 그의 생일을 보낸다. 교통사고로 여덟 살의 스카티(Scotty)는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장면은 성가심으로 인하여 더욱 악화된다. 즉 그 양친의 집으로 성가시게 익명의 전화 걸려오는데, 그 사람은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어머니가 케이크를 주문했던 빵집주인이었으며, 그 케이크는 스카티가 그의 생일인 월요일 아침 등교 도중에 발생한 사고로 인하여 배달되지 못했던 것이다.

“목욕”은 레이몬드 카버의 미니멀리스트 스타일로 쓰인 간략한 소설이다. “사소하지만 좋은 것”은 단지 세 시간 동안만의 이야기이다. 레이몬드 카버는 비록 아들을 위한 그들의 기도가 그들이 전에 결코 느끼지 못했던 진심에서 우러난 인간내성으로 그들을 함께 동여매고 있음을 연상시키고 있을지라도, 두 커플의 정서적 삶을 마전장이의 방식으로, 교감적인 세부묘사로 발전시킨다. 두 소설은 세부이야기묘사의 증가로, 그리고 뒷이야기 안에서 발견된 정서적 카타르시스의 세부묘사로 다툴 뿐만 아니라, 급박하게 결말로 이끈다.

“목욕”에는 의미적으로 그 소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있다면 빵집주인의 전화가 걸려오고 작은 스카티의 케이크가 배달되었다고 하는 정도이다. 매우 부분적이기 때문에, 그 소설은 내러티브의 목소리가 단조롭고, 냉담하고, 감정이 없고, 심지어 비교감적이어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 같은, 형용사적 또는 부사적 수사어구가 거의 담겨져 있지 않은, 그저 단순한 문장이 조용하게 중개될 뿐이다. 이러한 억양은 기괴한 어떤 것이 발생하고, 하여간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의 말과 동작으로 나타날 때 흔히 경험되는 그 몽상의 특징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몽상적 담화의 이러한 이미지는 무감정적으로 그리고 소설의 방법론으로 강화된다. 레이몬드 카버가 비록 모든 일반적인 대화를 관례적인 구두점으로 중단하여 표현하고 있을지라도, 양친의 내재독백은 마치 인용구나 이탈리아 체 글씨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이 없는 것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오히려 “언급된 텍스트”로서, 내러티브의 목소리의 일부인 것처럼, 각각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들을 주시했다… 그때 그는 더 많은 공포를 느꼈다. 그는 머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는 이처럼 그 자신에게 말했다. 그 애는 무사해. 집에서 잠자고 있는 대신에, 여기서 잠자고 있을 뿐이야. 잠은 어디서 자든 마찬가지야(51).

(의사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이처럼 그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러 어딘가에서 꼭 올 거야. 그들은 그에게 특별한 메달을 줄 거야(52).

 

이러한 화맥적 역기능은 독자의 임무에 헤살을 넣고, 이해의 속도를 늦춘다. ―독자는 연상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말을, 이야기 속에서 양친의 혼미상태의 가장을 작동하는 필요조건을 재배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비현실”의 감정을 제공하는 요인은 아마 집에 가기 위하여, 즉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하여 병원을 떠나야만 하는 어머니의 그 이유로서의 비논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깊이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그를 돌보고 있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그는 아마 소생할 거야. 그가 내 앞에 없을지라도 난 항상 돌보고 있으니까.” 세상을 미신에 사로잡힌 것으로 맞바꾸든지, 신을 값 싸게 팔아버리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그녀의 생각은 불합리하다(비록 매우 일반적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녀가 병원을 떠남으로써, 다쳐서 위태롭게 된 소년의 다른 가족과 조우한다. 이 두 양친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 넬슨(Nelson)”이라는 말뿐이다. 그 부인은 스카티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 넬슨의 소식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어긋난 연기와 불합리한 추론의 간단한 대화는 초점 결핍의 속이 빈 메아리이며, 흐릿해진 지각작용과 느릿해진 반응은 소위 이야기의 연기를 구성한다. 그 이야기는 수심에 찬 어머니가 받은 전화 속에서 익명으로 언급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스카티,’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스카티에 대해서입니다.’ 역시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스카티와 함께 해야만 해요, 암.’” 이 막연한, 최후의 말은 빵집주인의 것인지, 병원 누군가의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이렇게 확실한 정보 없이 그리고 그렇게 옹색한 내러티브적 프레임 안에 담겨있는 그밖에 모든 것과 함께, 그 이야기는 스카티에 대해 적게,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와 이러한 장면의 유형이 생산하는 그런 식의 경험, 즉 사람들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장면 속에서 행하는 어떤 무엇을 보다 많이 나타낸다.

보다 팽창적인 이야기 “사소하지만 좋은 것” 속에서, 상처를 입은 소년은 죽고, 그 양친은 빵집주인과 대치하고, 결국 세 어른들은 종교의식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빵의 파괴”를 공유한다. 이러한 내러티브 안에서, 스카티의 죽음과 세 어른들이 일으키는 적종적(適從的) 연기는 희생과 구속(救贖)의 주제적 이미지―죄 많은 사람의 구속에 무감각한 순수를 환기시킨다. 순결한 소년의 죽음은 어른들을 구속하는데 기여한다. 양친이 성나서 빵집주인을 방문할 때, 그 대치는 양친이 빵집주인의 고독을 그리고 빵집주인은 그들의 슬픔을, 화해와 소생을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입원: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에서 알코올중독과 회복”에서, 해밀턴 E. 코크런(Hamilton E. Cochrane)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사소하지만 좋은 것’의 말 속, 익명의 알코올중독자의 세계에서처럼, 그것은 보다 큰 힘으로 그리고 그들의 상대에게로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84).” 더 나아가 이야기를 지시하는 윤리적 어조는 마크 A. R. 패크니츠(Mark A. R. Facknitz)의 논평 “잔잔하고, ‘사소하지만 좋은 것’ 그리고 ‘대성당’: 레이몬드 카버와 인간가치의 재발견” 속에 나타난다. 그는 “사소하지만 좋은 것”의 기본 등장인물 앤(Ann)과 호워드 웨이스(Howard Weiss)가 행복의 파괴와 대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아들의 죽음이라고 하는 파국과 대치하며 부딪쳐나감으로 해서, 이러한 경우, 그들의 기본 악역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비록 발단 장면에서 등장인물과 위기가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이 두 이야기는 스타일, 내용, 그리고 효과(어떤 비평가의 견해에 반하여) 면에서 매우 차이가 있다. 즉 그들은 동일 이야기의 분리된 버전으로 단순하게 동일시될 수 없다. 그들은 동일 이야기가 아니다. 한 이야기를 다른 것으로 단지 확장만 한 것이 아니다. “목욕”의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은 독자가 개인적인 고통 없이, 휴머니티의 이러한 반응을 생성하는 공포 없이, 떠맡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정서적 경험을 아주 생생하게 중첩시킨다. “사소하지만 좋은 것”의 마전장이 스타일은 기술과 사건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경험보다 더 많은 주제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작품집 “대성당”이 출간된 후 레이몬드 카버와의 인터뷰에서, 래리 매카페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LM: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에 나타난, 초기 버전 “목욕”과 “사소하지만 좋은 것(sic, 대성당에서)”을 비교할 때, 편차의 인상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버전 간의 편차는 단지 세부묘사를 첨가하고 있거나 부분을 살찌웠거나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기본적인 것이 더 많은, ―즉, 두 작품의 전체 경향은 매우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RC: “사소하지만 좋은 것” 안에는 낙천주의가 분명히 더 많이 들어있습니다. 내 자신의 마음속으로 나는 그들이 동일한 이야기의 단지 다르기만 한 버전이 아닌, 사실 전적으로 두 개의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그 이야기는…, 내가 강조하려고 했던 위협의 특성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목욕” 안에 응축되었었고 압축되어 있었습니다(66). …

 

레이몬드 카버는 “빵집주인을 둘러싼 연기, 즉 전화가 걸려오고, …목욕을 하고, 등등은, 그래요, 내 이야기 속의 많은 사람들을 위협을 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에 대해 쓰려고 선택한 것은 위협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세계가 위협적인 장소라고 느끼는 사람이 매우 적을지라도,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66, 67).” 라고 하는 말 속의 불쑥 거대한 모습을 나타내는 위협과 동일시한다.

사치스러운 기술이 없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에 반하여 “사소하지만 좋은 것” 안에서 확장된 세부묘사와 대당이 되는 것으로서, “목욕” 안에서의 압축을 분명하게 예증하고 있는 다음 비교와 각각의 효과로서의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는, 텍스트에 의해 생산된, 요컨대, 편차에 어떤 의심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남자는 병원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그는 평소보다 더 빠르게 도로를 운전해갔다.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향유했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 가족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었다. 그 남자는 운이 좋았었고 행복했었다. 그러나 그가 목욕을 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목욕,” 49).

호워드 웨이스는 병원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축축하고, 어둑한 도로를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렸지만, 문득 그것을 깨닫고 속도를 늦췄다. 지금까지, 그의 삶은 무척 순탄했고, 만족스러웠다. 즉 대학생활, 결혼생활, 경영관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대학원시절, 그리고 투자회사의 하급사원으로 일하는 현재까지,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지금까지, 그는 행복했고, 운도 좋았었다(“사소하지만 좋은 것” 62).

 

대학원에서의 경영관리학, 그리고 투자회사의 하급사원, 이러한 호워드 웨이스의 약력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블루 칼러” 소설의 등장인물들일 것이다. 다음 예증은 양친의 철야기도를 묘사하고 있는 이렇게 매우 다른 장면과 드라마틱한 대조를 나타낸다. ―“목욕”에서.

 

“난 기도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아버지도 말했다. “나도 기도했어.” (“목욕” 53)

 

―“사소하지만 좋은 것”에서:

 

“난 기도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했다. “난 기도하는 법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되데요. 내가 한 것이라곤 눈을 감고, ‘주여 저흴 도와주셔요, 스카티를 도와주셔요,’ 라고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러고 나니 나머지는 술술 나오데요. 바로 거기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예요. 당신도 기도를 해보면 아마 같은 걸 느낄 거예요.”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난 벌써 기도했어.” 그가 말했다. “난 오늘 오후, 아니 어제 오후 기도했어. 당신 전화 받고, 병원에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내내 기도했어,” 그가 말했다.

“잘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녀는 이러한 곤경을 남편과 함께 헤쳐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 어리석게도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오직 그녀와 스카티에게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비록 호워드 웨이스가 곁에 있었고 또한 그가 절실하게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워드 웨이스를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아내라는 것을 뿌듯하게 느꼈다. (67~68)

 

시문학 통권 392호, 2004. 3. 1.
  조선문학 통권 176호, 2005. 12. 1
  조선문학 통권 177호, 2006. 1. 1.

  PEN 문학 통권 87호, 2008. 6. 10.)
 

 

미니멀리즘_C.W.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SUR LES ROUES/Gueune-Ok JOU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