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위에서』의 세 사내의 등장인물은 3중자아의 “나”인가? 『다리 위에서』의 두 사내의 등장인물 또한 2중자아의 “나”인가?

 

  

송 재영

(충남대 불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1

고대 그리스 철학자 지노우(zeno)에 의하면 이 세상에 움직이는 물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행하는 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물체가 움직인다고 가정할 때, 그러나 그 움직임을 일정한 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트로이 성을 함락시킨 천하의 맹장 아킬레스(Achilles)의 화살도 느림보 거북을 쏘아 맞출 수 없다. 어떤 목적물에 가 닿으려면 우선 그 목적물과 추적자와의 거리 중간 지점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그 다음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거리의 축소이지 물체의 운동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물체의 운동을 부정하는 지노우의 유명한 파라독스, 아니 괴변 철학의 진면목이다. 그런데도, 아킬레스의 화살과 비교되는 이 괴변으로 이 글의 모두를 장식하는 것은 그것이 이제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근옥의 시 세계와 미묘한 컨트러스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퀴 위에서』, 그렇다! 바퀴 위에서 그러니까 열차를 타고 이 시의 퍼스나 세 사람은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 구조가 내면적으로는 지극히 복잡한 장치로 얽혀 있기 때문에 첫눈에 대뜸 시인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시 읽기가 『바퀴 위에서』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따라서 무익하고 불필요한 접근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이다.  

시 읽기에 있어, 아무리 새롭고 기발한 분석 방법론을 내세우며, 그 이론적 타당성을 강조할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바로 해석학적 이해라는 관문이다. 치밀하고 풍부한 자료에 입각한 주석학적 고증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 편의 시가 담고 있는 최소한의 의미론적 추론마저 포기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시 읽기의 오류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지함을 호도하는 태도이다. 하나의 예로서 말라르메(S. Mallarmé)의 경우를 들어보자. 오늘날까지 말라르메라는 이 거대한 <언어의 집> 앞에서 수많은 연구가들이 배회하다가 남기고 간 기념비적 저작들, 그 가운데서 그것이 비록 역사적, 정신분석학적, 기호학적―그 어느 방법론에 의거했을 지라도 결국엔 말라르메 시에 몇 줄의 해석학적 설명을 더해주는 것으로 귀납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바퀴 위에서』가 난삽하다고 해서 처음부터 최소한의 의미소(意味素)의 추출조차 단념하고 지나친다면 이 작품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이 작품은 형식상 일정한 서사적 구조―시인은 이것을 소극시라고 정의하고 있다―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진술 형식이 너무나 특이하고 복잡해서 전통적인 독서 방식으로는 처음부터 접근이 어렵다. 어쩌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현실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한, 말하자면 부조리 투성이의 어떤 세계를 영상적으로 보는 듯한 그런 시이다. 그러나 이 장시가 담고 있는 줄거리는 분명하고 짧게 요약될 수 있다. 마가, 우가, 구가, 이 셋은 양심 강탈범으로서 쫓기는 입장에 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질주하고 있다. 그들은 말끝마다 고향에 간다고, 아니 가야 된다고 떠들지만, 그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언제 거기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때로는 반목하고 또 때로는 화해하면서 기약 없는 여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연극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바퀴 위에서』를 이 이상 더 소상히 산문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이 시에 대한 배반이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어떤 점에 있어서 그것은 무익하고 불필요한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위와 같은 서사 구조가 순서 정연하게 배열되고 기술된 것이 아니라 산만하게 순서 없이 얽혀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여기서 우리는 주근옥의 시적 비의(秘儀)를 들추어내어야 될 단계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시적 비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간단히 말해서 쉬르레알리즘적인 기술 방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바퀴 위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시인의 내면에 중첩되어 온 무의식 세계의 시적 변용이다.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강박관념의 실체는 유적자(流謫者)의 자기 상실감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퍼스나는 바로 이것을 대변하고 대역(代役)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시인의 무의식적 분신으로서 넓은 의미로는 오늘날의 인간 조건을 암시한다. 싸르트르(J. P. Satre) 식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아무런 선험적 가치도 없는 존재로서 이 지구상에 불쑥 던져진 우연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작품에 수없이 등장하는 고향이라는 시어는 바로 이 자기 정체성의 상징어 이외에 다름 아니다.  

         

우가도 등을 맞대고 앉으며

고향은 얼마나 머냐

그 따윈 알아 뭘 해

우리의 정신은 고향에 있지

지금 그걸 가지러 가는 거야

그러나 그들은 고향이 얼마나 먼지, 언제 도착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고향은 얼마나 머냐?

어둠이 끝나는 곳이지

굉장히 멀대

나도 한 번 안 가봤으니까

잘은 몰라

이제 출발했으니까

정차하는 곳이 바로 거기겠지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향에 도착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금만 더 가면 고향이야

우린 제 정신을 찾게 되는 거야

 

시인은 거의 작품 말미에 이르러서 <우린 제 정신을 찾게 되는 거야>라는 시구로써 고향의 숨은 뜻을 분명히 보여준다. <뿌리 뽑힌> 유적자가 찾아가는 고향, 다시 한번 되풀이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정체성의 확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글의 초두에서 잠시 언급한 지노우의 얼토당토 아니 한 궤변을 상기할 차례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퀴 위에서』의 기차는 아킬레스의 화살이다. 그것은 아무리 달려가도 고향에 가 닿을 수 없다. 그 기차는 바퀴만 굴러갈 뿐 영원히 제 자리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처음부터 거북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주근옥의 시적 진술 방식은 일찍이 쉬르레알리스트들이 실험했던 자동기술법을 연상시킨다. 브르통(A. Breton)에 의하면 자동기술법은 일종의 무의식적 기술방식이다. 그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다음처럼 정의한다. 《이성에 의한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해지는 사유의 구술》. 확실히 주근옥은 <심미적 윤리적 관심>을 뛰어넘고 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언어의 윤리성(나는 이 말을 언어 표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규범으로 생각한다)마저 포기한다. 아니, 무의식 세계에 있어서는 원래 언어의 윤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기록 장치를 잘 작동만 시키면 될 일이다. 『바퀴 위에서』는 이 자동기술 장치가 잘 작동되고 있다. 시인은 단지 열차의 바퀴가 탈선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작만 가하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무의식의 세계에서 흔히 드러나는 것이 야수성과 공격성이다. 의식의 표면 위에서는 도덕률로 은폐되어 있던 것이 일단 무의식의 세계로 내려가면 거기서는 마음껏 본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건 말씀야, 간단하지 

순간에 숨통을 끊어버리니까?

아픔이 오래 계속되도록

눈알부터 뺄 걸 그랬다

손가락부터 끊어버리는 건데

난 죽었어, 결박당한 채 죽어있어

피를 콸콸 쏟으며 쓰러진

한 발 다가서며, 그건 꿈이야

우가도 다가서며, 병신 그건 꿈이다

오지 마, 거기 서, 쏠테야

난 아직 아픔을 느끼고 있어

피를 콸콸 쏟으며 쓰러진

내 얼굴이 똑똑히 보여

우린 널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야수적인 공격성은 마치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오는 그것처럼 환상적․착란적 성격을 띄고 있다.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이 잔인한 공격성을 형상화하기 위해 주로 동물적 이미지에 의존했다면, 주근옥은 직접적으로 무의식의 표출을 과감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무의식의 환상적 상태에서 주제와 논리의 설정 없이 비약적으로 전개되는 자동기술적인 시구들은 인간의 원초적 잔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라깡(J. Lacan)의 주장에 따른다면, 무의식의 범주는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그리고 <실재적인 것>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바퀴 위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의 언어적 범주는 어느 것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명료한 선으로 구분할 수 없도록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두 경계선에 다 걸쳐 있으면서 <실재적인 것>을 후광으로 가리고 있는 형상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인가? <실재적인 것> ―달리 말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실존적 정체성을 의미할 터인데,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퍼스나를 이 고향, 즉 정체성을 찾아 기차 여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바퀴 위에서』는,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아킬레스의 화살>을 상징화한 주제를 심층구조로 삼고, 이것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분출되는 무의식의 언어를 사상(捨象) 없이 시화(詩化)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형식상 극시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주근옥은 적절히 지문을 삽입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단순한 부가적 기법일 뿐이다. 그는 작품 전체를 통하여 무의식의 흐름을 절실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일체의 구두점을 생략하고 가급적 짧은 시행의 연속으로 독자를 긴장시키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시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수사학조차도 거부하고―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직설법적 단문(短文), 그러면서도 읽는 가운데 주술적 마력의 흡인력을 발휘하는 시를 선뵈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어쩌면 자칫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연속적인 단문의 시행을 때로는 활력적인 리듬의 사용으로 생동감 있게 살리고 있다. 즉 이 작품에서 쉽게 눈에 띄는 두운(頭韻)과 각운(脚韻)의 의도적인 배합, 그리고 반복운의 사용에 의한 음악적 효과 등은 다분히 시인의 ―계산된 기법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국 『바퀴 위에서』는 현실에서 추방당한 무력한 시인이 유적지를 배회하면서 탈출을 시도하려는 몸부림의 노래, 고향으로 상징되는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현대인의 무의식의 언어군이다. 아무리 달려도 고향에 닿지 못하는 『바퀴 위에서』 단지 <갑자기 높아지는 기관차의 소음>만이 들릴 뿐이다. 즉 고조되는 자의식의 소리만 들리는 것이다. 

 

2

『다리 위에서』는 우화적 기법의 풍자시라는 점을 제일 먼저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만남과 기다림의 장소를 연상시키는 다리의 이미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사내 1>과 <사내 2>가 <횡설수설 지껄이며 걸어와 /철푸덕 주저앉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앞서 살펴본 『바퀴 위에서』와는 많은 동질성을 보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많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다.

『바퀴 위에서』의 바퀴가 실제로는 굴러가지 않는 바퀴, 즉 영원히 정지돼 있는 기차이듯이, 『다리 위에서』의 다리 역시 결코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외로운 존재이다. 이 작품이 베케트(S.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주제적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두 사내는 우연한 인연으로 한 여인을 공유했던 경험이 있는 숙명적인 관계에 있다. 아무런 윤리의식 없이 이 사내와 저 사내 사이를 징검다리 건네듯 내왕하며 몸를 내맡긴 여자, 바로 이 여자가 이 작품의 직접적인 제재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녀는 작품에 정면으로 등장하지 않고, 마치 고대극에서 볼 수 있는 무대 밖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모습을 숨긴 채 작품을 이끌어간다. 즉 <사내 1>은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참혹하게 살해하여 그 시신의 일부를 가방 속에 넣고 다리 위로 달려와서 그것을 강으로 던질 순간을 노리고 있는 반면, <사내 2>는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이 돌아오리라 믿고 다리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다리 위에서 해후한 두 사내,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들이 같은 여인을 공유했던 것을 알고 경악한다. 그리고 <사내 1>은 <사내 2>가 그 여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그에게 가방을 넘겨준다. 그러나 <사내 2>는 그 가방 속에 사람의 머리가 있는 것을 보고 질겁한다.

 

가방을 조심스레 연다, 순간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사색이 다 되어

나 날더러 어떻게 하라고

사람의 머릴, 사람의 머릴

두 손으로 가방을 든 채

가로등 밑을 왔다갔다 한다

제 정신이 아니다

강물에 가방을 던져버리고

뒷걸음치다가 급히 도망친다

가로등만 혼자 남는다

 

이렇게 끝나는 『다리 위에서』는 분명 미묘한 극적 구조에 따라 그 서사체계가 전개되고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숙명론적 세계관을 현대적 기법으로 패러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삶의 넌센스를 희화화(戱畵化)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삶의 엄숙함과 현실의 냉혹함이 함께 어우러져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하듯이 『다리 위에서』 또한 관능적 쾌락과 원죄의식의 속박이라는 상호 충돌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내가 벌인 비속한 열정의 드라마는 <사내 1>에게 있어서는 동물적 잔인성과 비열함으로, <사내 2>에게 있어서는 순박한 기다림과 처절한 절망으로 각기 대조를 이룸으로써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그 종지부를 찍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다리 위에서』는 시보다 분명 희곡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사 구조가 아주 정연하게 기하학적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다분히 산문적 문채(文彩)가 번뜩인다. 자서(自序)에서 시극(詩劇)은 상연을 전제로 하여 쓰여진 운문극인 반면, 극시(劇詩)는 상연과는 상관없이 쓰여진 운문극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작품은 극시와 유사한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작품은 시인의 주장과는 달리 극시보다는 오히려 시극 쪽에 가깝다. 즉 『다리 위에서』는 무대 상연을 함에 있어서도 그다지 무리가 없는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사실 60~70년대 서구 연극계를 풍미했던 이른바 앙띠․떼아뜨르(反演劇)라는 이름의 희곡들은 주근옥의 『다리 위에서』보다 상연하기에 오히려 더 부적절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 작품의 무대 상연의 적합성 여부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단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앙띠․떼아뜨르가 언어의 무의미성과 연극 자체의 부조리함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고 있듯이 주근옥은 『다리 위에서』를 통해 시의 무용성과 연극의 허위성을 풍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다리 위에서』는 도식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구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즉 가로등이 비치는 다리, 여기서 이루어지는 두 사내의 운명적인 해후, <사내 1>이 들고 있는 가방,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 이 일련의 이미지가 통합되어 떠올리는 메타포는 아름다운 시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시의 이러한 아름다움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동물적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시의 감각적 균형을 잃지 않도록 기여한다. 다시 구체적으로 반복한다면 분뇨담(糞尿譚)에 가까운 표현들과 잔인한 이미지가 가끔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다리 위에서』를 통해서 언어적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 아버진 개백정이었지

뒷마당은 개들의 사형장이었지

개의 모가지를 옭아 잡아당기면

생똥이 삐질삐질 나오고

그 악에 바친 눈

빼어 문 혓바닥

습관으로 난 보았소

개백정이라고

아이들이 놀렸지

 

<사내 1>이 들려주는 그의 아버지의 직업적인 삶의 이러한 잔인성은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그러나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개백정인 아버지의 개잡는 이러한 끔찍한 모습의 기술은 그 아들인 <사내 1>이 장차 자행할 살인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사내 1>이 자신의 정부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그 목을 잘라 가방에 넣는 장면을 묘사하는 식의 직접적인 기술방법을 생략하고, 개백정의 도살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간접적인 암시로 대신하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치밀하게 계산된 시적 기교이며, 따라서 그것이 발휘하는 상징적 효과는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났을 때 더 확연하게 나타난다.

『다리 위에서』는 그것의 극적 서사성 때문에 시의 미학적 측면에서는 많은 부분의 손상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야기가 복잡하고 매우 미묘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자칫 재미있는 서사성만을 탐색하기에 바빠 정작 시의 본바탕을 멀리 하기 쉽다. 이야기를 더욱 단순화함으로써 주제를 더 부각시키고, 아울러 더욱 긴장감 있는 시적 언어세계를 구축할 수는 없었을까― 이와 같은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던지는 충격은 만만치 않다. 물론 오늘날까지 동서양을 통해 이야기의 형식을 담은 장편시는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다리 위에서』와 같이 극적인 상황을 담고 있는 극시가 있었던가? 이런 의미에서 이 시는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3

주근옥은 많은 시인들이 애써 추구하고 있는 이른바 품격 높은 시어를 탐내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비속한 일상어가 범람할 뿐, 수사적 구문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한 마디의 시어, 한 행의 시구를 통해서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고자 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로 작품 전체의 구조, 그리고 이 구조 사이에 숨어있는 언어의 고리가 발휘하는 힘이 그의 시의 작품성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바로 이 언어의 고리들을 풀어서 정연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그의 시가 처음엔 쉽게 읽혀지는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어야만 되는 까닭은 바로 이 숨어있는 언어의 고리를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근옥은 확실히 새로운 장시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이고 있다. 『바퀴 위에서』는 쉬르적(심오한 초현실주의의 비-영웅적 서사시, 또는 미니멀리즘울리포) 기법을 통해서 무의식의 내면 세계를 조명하고 있는가 하면, 『다리 위에서』는 일상적 어법을 통해 같은 기법으로 고대인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편의 장시는 이미 밝힌 것처럼 새로운 가능성과 또한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이 두가지 문제점을 어떻게 보완하고 해결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시인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히 다음 작품에서 밝혀지리라 믿는다.  (시문학 통권 제367호, 2002. 0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