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은 혜

 

Humpty Dumpty sat on a wall:

Humpty Dumpty had a great fall.

All the King's horses and all the King's men

Couldn't put Humpty Dumpty in his place again.

땅딸보가 담장 위에 앉아있었네.

땅딸보가 그 담장에서 떨어졌네.

왕의 모든 말들과 왕의 모든 신하들이

땅딸보를 다시 그 자리에 올려놓을 수 없었네. (주 근옥 역)

 

I

현 시대는 경제학자 갤브레이스(J. K. Galbraith)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다. 첨단 과학 분야에서조차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과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의 “확정성의 원리”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개념의 허구성이 드러났고, 하이젠베르크의 “확정성의 원리”는 고전 물리학의 인과율도 수정하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의해 등장한 양자역학에서의 “확정성의 원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인식소인 “불확정성(indeterminacy)”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지금 전자(electron)가 어느 곳에 있는지 정확히 확정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자의 실체를 확정짓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즉 양자역학에서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에너지를 가하면 그 전자는 도약을 해서 다른 궤도로 사라진다. 따라서 전자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가하면 가할수록 그 전자의 위치는 더욱 더 불확정적으로 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전자가 도약하기 직전의 ‘흔적’뿐이다(Heisenberg 30~58, Wolf 105~15). 비록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God did not play dice)(Wolf 123 재인용)”라고 주장하여 “불확정성의 원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수학적인 사고와 명확한 언어를 표방하는 과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도출된 불확정적인 상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은 문화적 상황인 포스트모더니즘과 결부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이라는 과학적 원리가 우리 인간의 정신과 리얼리티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보다 넓은 조망을 제공해 줄 것(201~2)”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확정성의 원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불확정적인 시대에서 리얼리티 인식에 대한 은유적 상황으로 작용한다. 전자에 대한 위치를 확정지으려고 하면 할수록 전자는 다른 궤도로 이탈하여 전자의 위치가 더욱 불확정적이 된다는 사실은 바로 포스트구조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논한 절대적 리얼리티의 연기․유보로 인해 절대적 리얼리티의 현존을 부정하게 되는 상황과 유추 관계를 이룬다.

이로 볼 때, 일찍이 이합 핫산(Ihab Hassan)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우리의 행위, 사고, 해석에 영향을 끼치는 지배적인 문화 현상으로 ‘불확정성’을 지목한 것은 주목할 만한 견해로 볼 수 있다(168). 그리하여, 과학 분야에서 하이젠베르크의 “확정성의 원리,” 정신분석 분야에서의 라캉(Jacques Lacan)의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간의 괴리를 표현한 ‘S/s,’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차연(différance)” 등의 개념이 불확정성과 깊이 연관되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된 사실이며,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인 허천(Linda Hutcheon)의 책정과 전복의 메커니즘으로 된 “일시성(provisionality),” 와일드(Alan Wilde)의 포스트모던 아이러니인 “불확정적 아이러니(suspensive irony),” 맥헤일(Brian McHale)의 “존재론적 불안정성(ontological plurality or instability)” 등도 모두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주요 담론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불확정성이란 의미의 임의성, 일시성, 우연성, 종결의 부재로 인한 리얼리티 인식에 있어서의 인식론적이고도 존재론적인 불확정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모든 절대적인 것들을 부정하고 상대적인 다양성을 긍정하여 “하나의 진리”가 아닌 “여러 진리들”을 상정하므로, 필연적으로 리얼리티의 불확정적인 면이 강조된다. 이런 연유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전제를 수용하는 모든 담론은 필연적으로 유희적인 측면을 지니게 되는데, 이는 달리 말한다면 바로 언어 자체가 지닌 자의성, 임의성, 불안정성 등에 기인한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언어가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의 산물이며, ‘차이’에 의해 존재하는 불안정한 매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리고 데리다는 소쉬르의 ‘차이’에다가 “연기․유보”의 개념을 더 보태어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함으로써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과 불확정성을 확대 강조하였다. 데리다의 ‘차연’은 산포된 채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여러 리얼리티들을 상정하고 일시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리얼리티의 불확정성과 언어유희의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매클루언(Marshal McLuhan)이 “매체가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 9)”라고 말한 것처럼, 언어 자체의 불안정성은 언어의 허구적 재구성물에 불과한 텍스트의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으로 귀결되며, 또한 이런 불확정성을 내포한 텍스트는 포스트모던 사회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리얼리티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껴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젠 리얼리티 자체보다는 픽션 내에서 리얼리티가 새로이 창조되는 과정과 창조된 리얼리티들의 인위성과 일시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은 이미 2차 세계대전 이후 출간된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Jorge Borges)와 러시아 출신의 망명 작가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소설에 반영되었다. 보르헤스는 “허구들(Fictions; 1944)”이라는 그의 단편집 제목이 암시하듯 여러 단편들에서 리얼리티의 불확정적인 면을 강조하며, 나보코프는 “롤리타(Lolita; 1955)”에서 리얼리티를 표상하는 롤리타와 이를 간절히 추구하나 좌절할 수밖에 없는 험버트(Humbert)를 통해 불확정적인 리얼리티와 이로 인한 언어 놀이를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영미 문화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60년대를 전후로 한 시기였으며, 이는 현대 영미 소설사에서 1960년대를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룬 시기로 기록하게 하였다. 실제로 1960년대에 출간된 존 바스(John Barth), 토마스 핀천(Thomas Pynchon), 도널드 바슬미(Donald Barthelme), 리처드 브라우티건(Richard Brautigan), 커트 보네것(Kurt Vonnegut), 수잔 손탁(Susan Sontag), 로널드 수케닉(Ronald Sukenick), 존 파울즈(John Fowles),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등,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 소설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 기법이나 규율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이들 작가들이 리얼리티가 지닌 인식론적 불확실성과 존재론적 불확정성의 문제를 자신들의 텍스트 속에 (무)의식적으로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불확정성은 1960년대 전후에 쓰인 대다수의 영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인식소이자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주요 시학 원리로서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1960년대의 영미 소설 중에서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The French Lieutenant's Woman)(1969),”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The Crying of Lot 49; 1966),” 바셀미의 “백설공주(Snow White; 1967)”와 단편 「풍선(The Balloon; 1968)」, 「익사할 뻔한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Saved from Drowning; 1968)」, 「우리 아버지의 우시는 모습(Views of My Father Weeping; 1970)」 등을 중심으로 이들 작품에 나타난 불확정성의 시학을 고찰하고자 한다.))

II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독자/작가”의 위상을 점하고 있는 찰스(Charles)와 “텍스트/리얼리티”의 위상을 점하고 있는 사라(Sarah)와의 관계를 통해 리얼리티 구성과 해체 과정을 메타픽션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여기서 파울즈는 사라라는 인물 창조와 묘사를 통해서, 또는 화자의 자의식적인 서술을 통해서 텍스트/리얼리티가 구성되고 해체되어지는 과정 중에 드러난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 나타난 포스트모던 불확정성은 기존의 여러 결말의 형태를 패러디한 세 가지 선택 결말에 의해 심미화되어 리얼리티의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불확정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주인공 사라가 1장에서 검은 옷을 입은 채 저 멀리 먼 바다를 바라보는 “신비한 인물(a figure from myth; 11)”로 묘사되는 장면이다. 신비하면서도 모호한 사라의 모습은 파울즈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을 사로잡은 아련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는 파울즈가 1985년 캐롤 바넘(Carol Barnum)과 한 인터뷰에서 영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사라 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의 연기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독자에게 심어준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는 사실과, 또한 그가 사라를 “독자가 텍스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이미지를 지닌 인물로서 작품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에서도 드러난다(190). 실제로 파울즈는 사라에 대해 어떤 초월적인 해석도 거부하고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는 포스트모던적 유동성을 지닌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상정하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작품 속에서 사라는 찰스와 화자 그리고 독자에게 완전한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72)”로서 “스핑크스(366)”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면 “사라는 누구인가?(80)” 이에 대해 화자는 13장에서 “모른다(80)”라고 말한다. 사라라는 인물의 정체는 화자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화자도 모르는 사라를 찰스와 독자는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찰스는 사라가 왜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 불리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들은 후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녀가 말한 ‘고백’으로 그녀의 모든 면을 이해하고 그녀의 성격을 구성한다. 사라의 솔직한 고백을 모두 들었을 때 “마치 사라가 그의 눈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142)” 느끼고, 사라와 육체적 합일까지 이루었을 때에는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안 것 같은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곧 사라의 고백이 거짓이었으며 거의 모든 일들이 그녀의 교묘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에 찰스가 사라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를 추궁하자 그녀는 단지 “제가 한 일을 설명하라고 하진 마세요. 전 설명할 수 없어요. 설명될 수도 없구요”(278)라고 말할 뿐이다. 그에게 사라/리얼리티는 단지 ‘벌거벗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찰스/독자에게 있어서 사라는 “유혹하고 물러서고, 교활하면서도 단순하고, 거만하면서도 애걸하고, 방어하면서도 비난하는 것과 같은 모순어법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267)” 여자이며, 이런 사라는 ‘연기’되고 ‘유보’된 텍스트/리얼리티 그 자체이다. 찰스는 오히려 사라가 만들어 놓은 허구의 리얼리티에 말려들어 사라의 실체를 놓쳐 버리고 만다. “진짜 사라와 수많은 꿈속에서 만들어낸 사라(336)” 사이에 경계선을 긋지 못하는 찰스에게 있어서 사라/리얼리티는 채워짐을 전제로 하는 “비어 있음”을 표상한다. 이처럼 사라는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 또한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서 불확정적인 모습을 가지기에, 찰스는 오로지 사라/리얼리티의 여러 ‘흔적들’만을 일견(一見)하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망상(336)”으로 그 리얼리티를 윤색하여 재구성할 뿐이다. 파울즈는 찰스가 사라라는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과정과 사라의 불확정적인 모습을 통해 리얼리티란 일시적인 언어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한다.

사라라는 메타포를 통해 제시된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의 자의식적 서술에 의해 한층 심화된다. 1장에서 “내가 과장했나?(10)”라고 하며 개입했던 화자는 13장 첫 머리에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80)”라고 말하며 12장까지 기껏 구축한 리얼리티를 해체한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을 “알랭 로브-그리에(Alain Robbe-Grillet)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시대에 사는”(80) 20세기 화자라고 밝히기도 하고, “소설 속의 집들 중 어느 하나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80)”고 말하기도 하며, “찰스는 변장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80)고 말함으로써, 화자 자신의 존재조차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즉, 화자는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867년과 이야기를 서술하는 1967년에 동시에 존재하여 픽션과 리얼리티의 경계를 허물어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지닌 포스트모던적 불확정성은 화자가 세 가지 결말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첫 번째 결말은 44장에서 제인 오스틴(Jane Austin)의 소설처럼 찰스와 어니스티나(Ernestina)가 ‘결혼’하는 것이다. 이 결말에서 화자는, 사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찰스와 어니스티나는 행복하지는 않지만 결혼해서 잘 살았으며 샘(Sam)과 메리(Mary)도 그 당시의 하인들처럼 그냥 그렇게 살았다고 결말짓는다. 그러나 45장에서 화자는 이전의 결말은 “전통적인 결말(266)”로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서 찰스가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결말을 부인하는데, 이는 또한 등장인물인 찰스가 거부하는 결말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다시 이어져, 55장에서 소설 속에 직접 개입한 작가는 찰스가 탄 기차에 동승한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자로 등장하여 기차에서 잠이 든 찰스를 바라보면서 소설을 어떻게 진행시킬까 고민하지만 결국 찰스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미 등장한 인물들의 자유를 인정한 작가는 찰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속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작가는 두 가지의 결말을 제시하지만 “마지막 장의 패권(the tyranny of the last chapter; 318)”으로 인해 뒤로 갈수록 더욱 타당한 결말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둘 중에 어떤 것에도 비중을 두지 않기 위해서 동전을 던져서 그 순서를 임의로 정하고 그는 기차에서 내려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작가가 사라진 후에, 화자는 이 작품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진행하여 또 다른 결말이 다가옴을 느끼는 독자에게 두 가지 결말을 제시한다. 60장의 결말은 찰스와 사라가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낭만적인 것이고, 61장의 결말은 찰스와 사라가 각각 제 갈 길로 가는 현대적인 실존주의적 결말이다. 즉, 첫 번째 결말은 단지 주인공 찰스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파기되고, 두 번째 결말은 또 다른 세 번째 결말에 자리를 내어 주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파울즈는 허구와 리얼리티와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여 결국 그의 텍스트/리얼리티가 허구적인 글쓰기임을 메타픽션적으로 드러낸다. 다시 말해 파울즈는 세 가지 결말을 제시하고 결말 선택권을 독자에게 부여하여 리얼리티가 어떻게 구성되고 해체되는가를 보여주면서 이를 통해 리얼리티의 허구성과 불확정성을 강조한다.

이렇듯 파울즈는 사라라는 불가해한 인물 창조와 화자/작가의 자의식적인 서술과 세 가지 다른 결말 제시를 통해 인식론적이고도 존재론적인 불확정성을 심미화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로서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한다. 특히, 그 배열순서의 결과야 어찌 됐든 간에, 마지막 두 가지 결말을 ‘우연성’을 강조하는 “동전 던지기”를 통해 임의로 제시한 것은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긍정하고 수용한다는 점을 현시한 것이며, 이는 더 나아가 불확정성을 수용할 때에 생성될 수 있는 유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 형상화된 포스트모던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은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핀천은 먼저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언어가 지닌 불확정적 상황을 전경화한다. 실제 텍스트 내에서 'lot'은 하나의 기표에 하나의 기의를 넘어서 중고차 판매장(15), 디스크 쟈키의 음악 송신실(15), 경매 품목(45, 183) 등의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핀천은 'lot'이라는 단어에 하나의 확정된 의미보다는 이전의 것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는 다중적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WASTE'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에디파는 ‘쓰레기’로 이해하지만 곧 코텍스(Koteks)와의 대화 중 그것이 “우리는 고요한 트리스테로 제국을 기다린다(We Await Silent Tristero's Empire)”의 두문자(acronym)임을 알게 된다(87~88). 'WASTE'는 트리스테로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겐 단순히 ‘쓰레기’이지만, 트리스테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는 고요한 트리스테로 제국을 기다린다”를 의미한다. 또 다른 두문자 CIA는 전복적으로 사용되어 “반항적 무정부주의자의 음모 단체(Conjuracíon de los Insurgentes Anarquistas; 119)”를, DEATH는 “절대로 나팔에 대항하지 마라(Don't Ever Antagonize The Horn; 121)”를 의미한다. 심지어 볼츠(Bortz) 교수를 만나기 위해 버클리 대학을 방문했을 때 발견한 "FSM's, YAF's, VDC's(103)" 등은 에디파가 해독조차 할 수 없었던 문자들이다. 핀천은 이렇듯 여러 다양한 의미 해석이 가능한 단어를 사용하여 언어와 또한 그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가 지닌 근원적인 불확정성을 두드러지게 형상화함으로써 언어의 절대적 의미는 죽고 다만 언어의 유희만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불확정성은 일순 독자를 당혹케 하지만, 곧 다양한 의미 해석이라는 지적 유희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언어의 불확정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면서 텍스트 자체의 불확정성을 상정하는 것은 트리스테로(Tristero/Trystero)이다. 실제로 핀천은 (무)의식적으로 텍스트 속에서 Tristero와 철자 'i'가 'y'로 변형된 Trystero를 혼용함으로써 기표 자체의 불확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언어가 어떤 절대적 리얼리티를 환기시킨다는 믿음은 하나의 환상이라고 말하며 모든 절대적인 것에 대해 회의한 데리다의 해체 전략과도 상통한다. 이처럼 핀천은 ‘하나’의 단어에 ‘여러’ 의미들이라는 의미의 불확정성을 넘어서 기표 자체의 임의성을 보여줌으로써 리얼리티의 다양한 그림자를 초월하여 리얼리티 자체의 불확정성을 형상화한다. 즉, 트리스테로의 철자법 혼용은 어느 것이 진짜 리얼리티인가 하는 인식론적 불확실성의 문제를 일으키며, 더 나아가 그러면 과연 트리스테로가 현존하는 것인가라는 존재론적인 불확정성을 제기한다. 이렇게 볼 때, 트리스테로로 표상된 본질적이고도 존재론적 불확정성은 리얼리티를 인식함에 있어서 임시성(provisionality)과 불확실함을 유발하며, 따라서 에디파의 트리스테로/리얼리티 추구는 결국 미결정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작품 첫 부분에서 “언덕이 서쪽을 향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보지 못했던 코넬 대학교 도서관 언덕 위의 일출”(10)은 리얼리티 인식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에디파의 탐색 작업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에디파는 인버래러티(Inverarity)의 유산을 찾아 집행하기 위해 샌나르시소(San Narciso)에 갔을 때 “모든 것이 자신 앞에 드러날 것(20)” 같은 느낌과 더불어 “초점이 맞지 않는 영화를 보는 것(20)”처럼 탐색할 대상이 모호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에디파의 탐색이 불확실한 원인은 그녀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목한 인버래러티라는 인물의 모호함에도 있다. 에디파가 인버래러티의 장거리 전화를 받았을 때, 그의 목소리는 희극적인 흑인 억양으로, 떠들썩한 파추카 방언으로, 게슈타포 장교의 목소리로, 라몬트 그랜스턴의 억양 등으로 변형되기도 하는데(11), 이것은 얽혀 있는 인버래러티의 유산만큼이나 불확정적인 그의 속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인버래러티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것이 없다. 단지 그가 돈 많은 부자로서 에디파의 옛 애인이었고 그의 남겨 놓은 유산이 미국 그 자체라는 사실 외에는.

이 작품의 불확실함과 불확정성은 에디파가 인버래러티의 유언집행인이 되었다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중도에 막연히 무슨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만으로 트리스테로 시스템으로 탐색을 옮겨가는 데에도 있다. 여기에 어떤 인과 관계나 논리적 설명을 찾을 수 없다. 하이젠베르크가 말하는 불확정성 원리 혹은 우연만이 있을 따름이다. 에디파가 편집증 환자처럼 여러 정보와 단서들을 수집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파편들로 존재할 뿐이고 그들 사이에 어떤 논리적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에디파가 남편 무초(Mucho)에게서 받은 편지 봉투에서 postmaster 대신에 철자가 바뀐 potsmaster를 발견한 것도 우연한 ‘직감’에 의한 것이고, 트리스테로의 상징인 약음기 달린 나팔을 처음 발견한 곳도 ‘우연히’ 들른 스코우프(Scope) 술집의 여자 화장실에서이며, 에디파가 요요다인(Yoyodyne) 회사를 방문하여 코텍스라는 청년을 만난 것도, 그가 약음기 달린 나팔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도 ‘우연’이다. 이처럼 에디파가 트리스테로를 탐색하게 된 동기와 과정은 “우연한 관계(93)”에 의해서 이루어지기에 불확정성만 증폭된다.

‘우연’이라는 연결 고리에 의해서 에디파는 “심부름꾼의 비극(The Courier's Tragedy)”이라는 연극을 보러 가게 되고, 그 연극 중에 트리스테로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러나 에디파가 “심부름꾼의 비극”을 보면서 느낀 점은 트리스테로에 관한 한 일종의 “의식적인 저항(ritual reluctance; 71)”이 있다는 것이다. 연출가인 드리블레트(Driblette)를 찾아가 연극 대본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그 연극은 자신이 손질한 것이며 리얼리티는 기록된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다고 말하여(79) 리얼리티의 불가해성을 지적하고, 에디파의 트리스테로/리얼리티 탐색에 대해 “인생을 허비해 버릴 수 있으며 결코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80)”이라고 말하여 에디파의 리얼리티 추구가 무위로 돌아갈 수 있음을 지적한다.

에디파는 “더 많은 정보를 모으면 모을수록 더 많은 정보가 여전히 남아 있고”(81) 모든 단서들이 트리스테로로 집중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정보의 혼란 속에서 에디파는 “맥스웰의 수호신(Maxwell's Demon; 86)”과 같이 질서를 부여하고자 노력하지만, 엔트로피 이론에 도전한 “맥스웰의 수호신”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진 것처럼 그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에서 전자(electron)의 위치를 알고자 에너지를 가하면 그 전자는 다른 궤도로 도약해 어디론가 사라지듯이, 에디파는 편집증 환자처럼 정보를 수집함에도 불구하고 트리스테로/리얼리티의 여러 흔적들만을 일견할 뿐이다. 이러한 에디파의 탐색은 마치 발작 직전의 어떤 전조는 느낄 수는 있으나 실제로 발작 중에 일어난 상황은 알지 못하는 간질병 환자의 발작과도 같다(95). 이제 에디파 자신도 “결국 수많은 실마리, 알려진 것들과 암시들만을 기억하고 참된 진실은 결코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95).

트리스테로에 관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지자 그녀는 밤거리를 방황하면서 배회한다. 차이나타운의 한약방 간판에서, 밤거리의 네온사인, 버스 의자 뒤,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르는 노래 소리와 소외된 여러 사람들 속에서 에디파는 트리스테로와 연관된 것 같은 기호들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하지만 사전에서 단어를 찾으면 그 의미를 설명하는 여러 다른 단어들로 연결되는 것처럼, 어떤 기호의 흔적은 다른 기호로, 그 기호는 또 다른 기호로 이어질 뿐이어서, 에디파는 가는 곳마다 WASTE, 약음기 달린 나팔 그림, 트리스테로의 변형된 말들과 기호들과 마주치지만 트리스테로의 실체, 리얼리티는 알지 못하게 된다. 이는 마치 측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끊임없이 도약하여 사라져 버리는 양자의 도약처럼 그 실체를 알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기호로 변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기호로 변형되어 나타날 뿐이다.

에디파는 트리스테로의 리얼리티를 탐색하는 여정으로 자프(Japf)의 헌책방을 찾아가지만, 거기서 구한 “심부름꾼의 비극”의 보급판에는 트리스테로에 관련된 부분이 변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문학과 볼츠 교수를 찾아가지만 그가 소장하고 있는 연극 대본의 각주에도 트리스테로에 관한 어구가 변형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에디파는 연극 대본에 나타난 트리스테로를 추적하지만, 이와 관련된 문헌은 모두가 변형되어 있을 뿐이고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연극 대본 원본의 변형, 왜곡, 소실 등은 모두 그 원본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며, “심부름꾼의 비극”의 원본을 끝내 구하지 못하고 단지 이본들만을 본 것은 말하자면 텍스트의 불확정성을 암시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절대적 근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트리스테로에 대한 역사적 유래 또한 분명한 사실로 드러난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우연히 발견한 것들을 끼워 맞춰 상정한 것에 불과하다. 에디파의 편집증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트리스테로의 실체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고, 다만 부분적인, 그것도 변형된 조각들만이 산발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처럼 트리스테로에 관한 단편적 묘사는 트리스테로가 현존과 부재 사이에 끼인 불확정적인 그 무엇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에디파는 트리스테로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을수록 더욱 더 혼란스러움을 느꼈고 이런 단편적인 사실들을 분류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에디파는 결국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자기 자신의 환상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면 인버래러티가 꾸며 놓은 거대한 음모인지도 판단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이 작품은 “에디파는 깊숙이 들어앉았다. 49호 품목의 경매를 기다리며(183)”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트리스테로의 존재 여부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그 존재의 현현(顯現) 직전에 열린 결말로 끝나 텍스트의 불확정성은 극치를 이룬다. 특히, 여기에 드러난 불확정성은 와일드가 말한 바 포스트모더니즘적 아이러니인 “불확정적 아이러니”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종결의 부재” 속에서 다양성, 임의성, 우연성, 그리고 부조리성을 표방하며, 낙원에 대한 추구를 버리고 모든 무질서 속에 있는 세계를 그냥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데리다가 주장한 탈중심, 절대적 진리의 부정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는 항상 끝없이 지연됨으로써 최종적 의미는 결정 불가능하고 결국 부단한 해석만이 남아 있게 된다. 독자는 이 해석의 유희를 통해 진실 추구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진실 추구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리얼리티의 불확정성 문제는 포스트모던 미니멀리스트 도널드 바슬미의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의 언어, 플롯, 배경, 성격 묘사는 극단적으로 최소화되어 있다. “백설공주”가 예증하듯이 그의 소설은 불연속적인 단편의 연쇄를 이루고 있는데, 이처럼 불연속적으로 절단된 내러티브는 초월적인 리얼리티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그 단편들만 존재할 뿐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인식론의 소산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의 소설에서 주제의 일관성이나 확정된 의미 파악을 기대할 수 없다. “백설공주”의 첫 페이지는 백설공주(Snow White)가 아닌 그녀(She)라는 3인칭 주어로 시작하여, 그녀의 몸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점(3)” 6개의 위치를 텍스트 내에 세로로 배열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흑단같이 검었으며, 그의 피부는 눈처럼 희었다(3)”라는 단편으로 끝난다.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는 3부로 나뉘어져 있으나, 이들 상호간에 유기적 관계를 거의 찾을 수 없다. 작품은 다만 “오 내가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세상에 있었으면(6)”하고 바라는 포스트모던 백설공주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의 단편적인 일화의 연속일 뿐이다. 결말도 “백설공주 하늘로 승천하다(SNOW WHITE RISES INTO THE SKY)”와 같은 몇 개의 제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시작도 끝도 없는 소설 “백설공주”는 리얼리티가 얼마나 불확정적인가를 그 형식으로서 현시하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바셀미는 다른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파편화 기법으로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단편 「풍선」의 경우를 보자. 어느 날 밤 14번 가 근방에서부터 부풀기 시작한 풍선은 어느덧 도시 전체를 뒤덮는다. 여기서 “그저 머물러 있는(53)” 풍선은 하나의 심미적 대상으로 제시될 뿐, 풍선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의견도 풍선의 절대적 의미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쪽으로 모아진다. 그곳에 그저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당황케 하는 것은 풍선의 명백한 “무목적성(purposelessness; 55)”이다. 이는 단조로운 도시 생활에 지친 자들에게 다양한 유희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풍선의 표면이 광대해서 어떤 권위자라도 풍선에 가스를 주입한 입구를 찾을 수 없다(55)”는 사실은 풍선 ‘위’ 또는 ‘아래’라는 “표면(55)” 위에서의 유희만 가능할 뿐 풍선으로 표상된 심미적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심층적 분석은 불가능하고 단순히 피상적인 언어유희만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즉, 바셀미는 ‘풍선’을 통해 심미적 대상, 혹은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인간의 행위는 단지 외적 기호만을 해독하여 “표면 위에 글(messages on the surface; 54)”을 쓰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풍선의 절대적 리얼리티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풍선에 관하여 제기되는 다양한 의견은 절대적 리얼리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어떤 시민은 풍선이 아마도 “훼손하였다(sullied; 55)”라는 단어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단어에 집착하고, 또 어떤 이는 풍선을 돈 보따리로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_______의 예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______이 현재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56)”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풍선에 대한 이런 가지각색의 담론들은 모두 개개인의 “환타지(fantasies; 56)” 구성의 결과로, 오히려 풍선이 지닌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특히 “백설공주”에서 1부가 끝난 뒤 독자에게 빈칸 채우기 문제를 제시하는 것과 비슷한 ‘빈칸’을 포함한 진술은 풍선을 둘러싼 논의의 종결 부재로 인해 유발된 불확정성을 제시한 것이며, 또한 “영적인 기쁨(56)”에서부터 “재앙(56)”에 이르기까지 서로 상반된 의견들의 스펙트럼은 불확정적인 주관적 상상력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불확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풍선은 터져 트레일러에 실려가 또 다시 부풀어오를 기회를 기다리며 웨스트버지니아에 놓여있다. 그러면 풍선이 터지게 된 원인은? 그 해답은 마지막 문단에서 화자가 돌아온 애인과 해후할 때에 제시된다. 화자에 따르면, 그 풍 은 화자의 성적 욕구 불만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이러한 화자의 설명은 언뜻 보기에 풍선의 최종적인 절대적 리얼리티를 현현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할 점은 그런 화자의 설명은 리얼리티를 바라보는 여러 “자발적인 자서전적 이야기(58)”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풍선이 물자체(thing in itself)로 그저 떠있다는 사실 자체가 여러 시민(독자)의 ‘자발적’ 참여를 부추긴 것인데, 이런 독자의 적극적 참여는 바셀미가 「조이스 이후(After Joyce)」라는 글에서 “독자란 세계에 대해 전문가가 들려주는 권위 있는 설명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하는 그 무엇이 바위이건 냉장고이건 간에 직접 부딪쳐야 한다(4)”라고 한 말과도 상통한다. 이를테면, 화자에게 있어서 풍선은 성적 욕구 불만의 상징이지만, 또 다른 사람(시민, 혹은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기에 풍선은 이를 바라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의 전유물이 된다. 풍선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유희의 상징인 것이다. 바셀미는 “예술이란 현상계의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현상계의 리얼리티에 대해 명상하는 것(Not-knowing; 23)”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여기서 내레이터가 풍선에 대해 한 해명이 “자발적인 자서전적 이야기”의 하나라는 점은, “거대 서사”가 사라진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서 개인사적인 ‘소담론들’이 지배적 위치를 점하게 된 사실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는 절대적 리얼리티가 사라진 포스트모던 영지 위에 여러 다중적인 리얼리티들의 존재 이유를 밝힌 것이다. 바셀미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 이상 절대적인 리얼리티는 존재하지 않기에 「풍선」의 화자가 한 것과 같이 개인의 주관적인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리얼리티들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또 다른 리얼리티들, 다른 가능성들(Not-knowing; 24)”을 꿈꿀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풍선」에서 제시된 불확정성의 시학이 적용된 또 다른 예로 「익사할 번한 로버트 케네디」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로버트 케네디와 연관된 모종의 역사적 사건을 다룰 것이라는 독자의 예상을 뒤엎고, 작품 내내 이니셜 K.로 표기되는 케네디(아니면 K.라는 이니셜을 지닌 다른 사람)의 일상적인 22가지 일화를 기술한다. 예를 들어, 책상에 앉은 K., 비서들의 묘사, 신문을 읽고 있는 K., 그의 일에 대한 태도 등과 같은 단편적인 일화가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일화는 그저 일화로 남을 뿐 K.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이를 유보시킨다. 더욱이 물에 빠진 K.를 구해 내는 마지막 일화 “익사할 번한 K.”는 작품 제목과도 같아서 보다 많은 진실의 현현을 기대하게 만들지만 아무런 인과 관계도 설명되지 않은 채 K.의 “고맙소(85)”라는 피상적인 인사로 끝나기까지 한다. 따라서 K.의 모습은 텍스트의 첫 문장에서 “그는 동료들에게 퉁명스럽지도 않고 지나치게 친절하지도 않다. 혹은 그는 퉁명스러우면서도 친절하다(76)”는 말처럼 불확정적인 모습―어찌 보면 인간 실존의 진정한 모습―을 지닌 인물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 K.에 대해 제공된 정보의 조각들이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K.를 결코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K.라는 인물 ‘하나’의 리얼리티도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면, K.보다 더 넓은 이 세상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화자가 메타픽션적으로 개입해서 “나는 악명 높은 서투른 관찰자(84)”라고 한 것은 불확정적 리얼리티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종국에 이 작품은 파편적인 일화들로 남을 뿐 K.에 대한 참된 절대적 진실은 현현하지 않으며, 리얼리티 재구성의 허구성, 임의성, 일시성, 불확정성에 대한 하나의 예로 남게 된다.

이렇듯, 「풍선」에서 제시되고 「익사할 번한 로버트 케네디」에서 고찰된 불확정성의 시학은 「우리 아버지의 우시는 모습」에서 한층 더 미학적으로 심화되어 있다. 이 작품도 단편적인 묘사와 서술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내러티브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두 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화자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원인을 찾아가는 탐색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회상 내지 환상(꿈)들을 서술한 것으로, 이들 내러티브는 상호 교차하는 가운데 불연속적으로 진행된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후 되돌아오면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곧 그의 아버지가 어떤 귀족의 마차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현장에서 바로 목격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처음으로 화자가 만나본 목격자인 어린 소녀는 중요한 첫 단서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귀족처럼 보였다(116)”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소녀가 귀족이라고 단정을 내리지 않고 귀족‘처럼’ 보였다고 말한 점을 중시하여 그 사람이 귀족처럼 보인 것은 단지 마차가 귀족의 마차처럼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116)고 하면서 소녀가 제공한 첫 단서가 불확실함을 지적한다.

화자가 또 다른 목격자를 찾을 때에 ‘우연히’ 나타난 한 남자는 두 사람이 포목점에서 그 사고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 두 사람을 만나 보니, 포목점 점원은 화자의 아버지의 잘못이라고 하고, 손님인 듯한 다른 이는 마부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화자의 아버지가 술에 취했었는지의 여부가 두 번째 단서가 되지만 이 단서 또한 불확실하다. 곧, 점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세 번째 단서를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마부의 제복이 청색과 녹색(118)”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청색과 녹색으로 된 제복은 흔하다(119)”고 하며 세 번째 단서에도 불확실한 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로 보면, 텍스트 속에서 정보로 제공된 여러 개의 단서들은 단지 단서로만 그칠 뿐 어떤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하여 화자의 회의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첫 번째 단서를 제공한 소녀가 다시 찾아와 또 다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다섯 크라운의 돈을 요구하고, 화자는 그 돈을 주는 대신에 네 번째 단서를 얻게 된다. 소녀에 의하면 “그 마부의 이름이 라스 뱅(Lars Bang; 120)”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라는 단서를 얻어 감에 따라,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와 독자)는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에 점차 가까이 다가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침내 화자는 문제의 마차를 몰았던 라스 뱅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는다. 하지만 곧 옆에 가만히 있던 소녀가 “뱅은 아주 새빨간 거짓말쟁이예요(126)”라고 말해 화자(독자)가 모든 정황을 알게 되었다고 자신할 순간에 모든 것을 부정해버린다. 이는 지금까지 리얼리티를 구축해왔던 텍스트 상의 모든 언어 기호들이 ‘거짓말’일 수 있음을 극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라스 뱅의 이야기는 화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능한 이야기 중 마부 ‘자신’이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맘대로 구축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 작품은 해석의 유예를 암시하는 “기타 등등(Etc.; 126)”이란 단어로 불확정적인 결말을 맺는다. 이러한 화자의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 추구의 좌절은 바셀미가 “백설공주”에서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양탄자 위의 무늬(The Figure in the Carpet)」를 패러디하여 “어디에 양탄자 무늬가 있어? 그저 양탄자뿐인 거 아니야?(129)”라고 한 말로 요약된다. 즉, 화자가 행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추적에는 “양탄자 무늬”를 추구하는 것과 같은 ‘과정’만 있을 뿐, 작품 끝까지 아버지 죽음의 ‘원인’이라는 “양탄자 무늬(절대적 리얼리티)”는 현현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기타 등등”으로 끝난 것은 또 다른 리얼리티 존재의 가능성과 아울러 이에 대한 또 다른 전복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리얼리티의 다중성, 임의성과 불확정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화자가 구축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리얼리티) 추구 과정이 ‘뒤집혀짐’과 ‘전복’을 전제로 한 “일시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내러티브, 즉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는(아니면 꿈꾸는) 장면이 반복되는 내러티브에 의해 심미화된다.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회상 내러티브는,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가운데 아버지 돌아가신 원인 추적이라는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를 아버지 죽음의 진위(眞僞) 여부라는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대시킨다.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꿈인가? 과연 화자의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일까? 아니면 그가 꿈을 꾼 것에 불과한 것일까?

화자가 회상하는 장면들은 텍스트의 중심 기호인 ‘아버지’의 ‘죽음’을 넘어선 아버지의 ‘실존’이라는 근원적 리얼리티에 불확정성을 부여한다. ‘아버지’라는 기호 자체가 지닌 불확정성은 화자가 회상하면서 “그래, 저기 침대 한가운데 앉아서 울고 있는 저 사람은 우리 아버지가 아닐 수 있다. 아마 다른 누구, 우체부 아저씨, 야채상인, 보험 판매인, 혹은 세리인지도 모른다(115~16)”고 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런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은 또 다른 토막에서도 반복되어, “침대 중앙에서 우는 사람의 모습은 우리 아버지를 무척이나 닮았다(116)”고 하면서 화자는 또 다시 아버지의 리얼리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화자는 “아마도 저기서 우는 사람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다. 아마 또 다른 아버지. 이를테면, 탐의 아버지, 필의 아버지, 패트의 아버지, 피터의 아버지, 폴의 아버지(117)”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누구의 아버지인지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테스트 좀 해보자고 하면서도 “음성 테스트 또는(117)”이라는 마침표 없는 문장으로 불완전하게 끝내 버린다. 더욱이 테스트 결과에 대한 진술도 없다. 그런 가운데 화자가 아버지라는 불확실한 리얼리티에 대해 갖는 의문은 회상 장면 속에서 간헐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화자의 불확정적인 진술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원인 탐색은 차치하더라도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 자체도 매우 모호하게 한다.

더욱이 화자의 회상 또는 상상하는 내러티브에서의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시절과 장년 시절의 모습이 섞여 있어 ‘아버지’의 존재론적 차원의 리얼리티를 더욱 불확정적이게 한다. 사냥하던 모습(116), 흰 머리카락과 비곗덩어리의 배를 가진 모습(118) 등의 ‘어른’ 모습은 털실을 공중에 던지며 노는 모습(117), 분홍빛 컵케잌을 엄지손가락으로 쑤시는 모습(117), 크레용으로 벽에 낙서를 하는 모습(120) 등과 같은 ‘아이’ 모습과 함께 어우러져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이 화자의 회상과 상상(꿈) 속에서 바뀌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것으로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한층 강화한다. 화자가 ‘사실’인 것처럼 서술한 것이 ‘픽션’일 수 있고, 화자가 ‘픽션’인 것처럼 서술한 것이 ‘사실’일 수 있다. 이를테면, 화자가 탐색하는 아버지의 죽음이 픽션일 수 있고 오히려 화자가 보는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럴진대 어느 누가 화자의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혹은 죽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이로 보면, 화자의 아버지는 현존과 부재 즉,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에서 사는 존재이다.

이렇듯 텍스트 내의 사실과 픽션의 뒤섞임은 “기타 등등”으로 끝나는 결말의 부재와 더불어 이 작품이 지닌 인식론적이고도 존재론적인 불확정성을 심미화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절대적 리얼리티의 부재로 인한 불확정성은 일순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겠지만, 이런 당혹감은 곧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바셀미가 「풍선」에서 제시한 대로, 개개의 독자만의 그럴 듯한 “주관적 결말 이야기”를 써놓을 여백이 텍스트에 많기 때문이다. 이제 텍스트 자체가 지닌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긍정하고 수용한 독자가 할 일은 “기타 등등” 전후에 아니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에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진행시키는 주관적인 상상력의 유희를 즐기는 것이다.

한편, 앞서 논의한 포스트모던 작가들 파울즈와 핀천과 바셀미 등은 모두 포스트모던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새로운 삶의 원리로 긍정하고 있으나 이들이 반드시 동일한 입장에서 이런 시각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들 가운데 영국 출신 작가인 파울즈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대부분의 현대 작가들이 거부한 전통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과 포스트모더니즘 메타픽션의 자의식적 화자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리얼리즘 경향이 강한 영국소설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키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형식은 전통의 폐기가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전용하는 데서 얻어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작품을 쓰는 다수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그를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점이다. 실제로 앞서 살펴보았듯이, 핀천이 “49호 품목의 경매”에서 그리고 바셀미가 “백설공주”를 비롯한 여러 단편 소설들에서 독자의 주관적인 상상력만큼 다양한 불확정적인 결말을 허용하는 반면, 파울즈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세 가지 다른 결말을 제시하고 그 선택권을 독자에게 부여하여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포스트모던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세 가지로 제한된 결말 선택권이라는 점, 그리고 작가가 고안한 결말을 궁극적으로는 소설 결말의 역사적 발달 순서대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적인 불안을 표출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생지라 할 수 있는 미국 출신의 작가 핀천과 바셀미가 적극적으로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반해, 파울즈에게는 모더니즘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는 셈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계승인가 아니면 그것과 단절된 새로운 사조인가라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지성사적 평가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주지하듯, 포스트모더니즘을 문학과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총체적 변화를 초래한 인식의 변화로 이해하고 그것을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반성과 회의의 성격을 띤 포스트구조주의에 의탁하여 드러내려는 노력은 모더니즘의 위상을 새롭게 검토할 것을 요청하였다. 가령, 모더니즘의 언어 혁명이나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도 재현 개념에 대한 회의, 진리의 불확정성, 인간 이성과 그에 입각한 인본주의적 주체 개념의 와해와 같은 서구 철학의 근본을 새롭게 반성하는 포스트모던적 사유의 틀 속에서는 단순히 새로운 언어와 소재의 발굴 이상의 의미를 띠기 시작함을 부인할 수 없다.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에 대한 이들 세 작가의 미묘한 시각 차이는 이처럼 모더니즘과 연관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을 새롭게 성찰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III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 바셀미의 “백설공주”와 그의 몇몇 단편 「풍선」, 「익사할 번한 케네디」, 「우리 아버지의 우시는 모습」에 나타난 공통된 시학 원리는 불확정성이다. 이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다소 기법 상의 차이는 있지만 리얼리티의 인식론적이고도 존재론적인 불확정성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 풍토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불확정성의 시학은 의식적이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1960년대 영미 포스트모던 소설에서 주요한 원리로 작용함을 볼 수 있다. 앞서 고찰한 작품 외에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 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 1967),” 보네것의 “제5도살장(Slaughterhouse-Five; 1969)” 등에서도 중요한 시학 원리로 사용되었다. 브라우티건은 “미국의 송어 낚시”에서 편지를 받고 자신의 서명이 담긴 답장을 쓰는 사람, 시체, 장소, 호텔 이름, 황금 펜촉 등과 같이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초월해 불특정한 형태로 다양하게 변형되기도 하며 “미국의 송어 낚시”라는 브라우티건의 책제목도 되기도 하는 “미국의 송어 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를 통해서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다루며, 보네것은 “제5도살장”에서 드레스덴 폭격의 후유증으로 일종의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빌리(Billy)의 의식 수준에서 일어나는 임의적, 불규칙적,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를 통해서 포스트모던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심미화한다.

더욱이 영국의 전통적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도리스 레싱의 작품에서도 불확정성의 시학은 나타난다. 도리스 레싱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 풍토에 부응이라도 하듯, 리얼리즘적으로 주인공 마사(Martha)의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다룬 일명 “폭력의 아이들(1952~69)” 5부작을 집필 중이던 1962년에 “황금빛 공책(The Golden Notebook)”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작품 속에서 여성 자아의 문제를 다루어 페미니즘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은 종국에는 “황금빛 공책”이라는 통합적인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도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에 대한 인식이 노출되어 있다. 여기서 도리스 레싱은 창작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애나(Anna)의 글쓰기를 통해 언어와 리얼리티 사이의 괴리를 메타픽션으로 다룬다. 특히 애나의 파란 공책 1954년 9월 15일자 일기는 먼저 쓴 글 위에 삭제 표시를 해서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이른바 “삭제 하의 글쓰기”라는 ‘흔적’으로서의 글쓰기를 통하여 리얼리티란 뒤늦게 구성된 허구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도리스 레싱은 애나의 여러 다양한 내러티브 형태―일기, 회고록, 단편소설, 신문 머리기사 등―의 글쓰기를 통해 리얼리티 구축의 허구성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정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와 같이 1960년대 대표적인 영미 소설 속에서 형상화된 불확정성은 1970년대의 보네것의 “챔피언의 아침 식사(Breakfast of Champions; 1973),” 수케닉의 “98.6; 1975),” 레이먼드 페더만(Raymond Federman)의 “싫으면 그만 두어라(Take it or Leave it)(1976),” 샐먼 루시디(Salmon Rushdie)의 “밤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 1981)”에도 나타난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작가들은 포착하기 힘든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깊이 인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불확정성을 소설의 주요한 시학으로 삼음으로써 리얼리티의 불확정성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 오히려 불확정성을 자유로운 상상력이 주는 지적 유희와 자유의 근원으로 만들어 버리기에 작가와 독자에게 일종의 ‘게임’이라는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이로 보면 포스트모던 소설에 나타난 불확정성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놀이’와 유희를 좋아하는 “호모 루덴스”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듯하다. 이는 1960년대 포스트모던 소설의 주요 시학이었던 불확정성이 1987년 마이클 조이스(Michael Joyce)의 “오후 이야기(Afternoon, a story)”를 선두로 하여 나온 셸리 잭슨(Shelley Jackson)의 “패치워크 걸(Patchwork Girl)”과 마크 아메리카(Mark Amerika)의 “그래마트론(Grammatron)” 등과 같은 하이퍼텍스트 소설 속에서 한층 더 미학적으로 승화되어 있으면서 독자의 지적 유희를 이끌어 낸다는 사실에서도 거듭 확인된다고 할 것이다. (국민대)

 

각주

1) Humpty-Dumpty; 험프티 덤프티(Mother Goose의 동요집에 나오는 커다란 계란 모양의 인물; 담장에서 떨어져 깨짐); 땅딸보; 한 번 넘어지면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 (편주)

2) 토마스 핀천(Thomas Ruggles Pynchon, Jr.): 1937년 5월 8일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코넬 대학에서 공학물리를 전공하다 잠시 해군에 복무한 후 인문대로 전공을 바꿨고 1959년 영어학으로 학교를 마침. 그 해, 그의 첫 단편 소설 「작은 비」가 출판되었고 이는 그 후 출판된 몇 편의 단편과 함께 「늦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단편모음으로 1984년 재출판되었다. 그는 시애틀의 보잉사에서 기술자료를 쓰는 일을 하면서 그의 첫 장편소설 「브이.」를 쓰기 시작했고 이는 1963년 출판되었다. 그는 두 번째 작품으로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1966년에 출판했고 그 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그의 대작 「중력의 무지개(1973)」를 썼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율리시즈’라는 평을 받았고 1974년 퓰리처 상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집행위원회에서 “읽기 힘들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거부되었고 그 해 퓰리처상은 수상작 없이 넘어갔다. 그의 다른 소설로는 「바인랜드(1990)」와 「메이슨과 딕슨(1997)」이 있다.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그의 성향은 아주 유명하여 그의 실제 정체와 주거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는데 음모론과 망상증이 근간을 이루는 그의 소설의 분위기가 이를 부추기는 데에 한 몫 하기도 했다. (편주)

3) 도널드 바슬미(Donald Barthelme): 193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가족이 텍사스 휴스턴으로 이사했고 성장기를 줄곧 휴스톤에서 보냈다. 대학재학중 군에 입대하여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했고, 제대 후 복학해서는 철학과 교수였던 모리스 내턴슨의 가르침과 실존주의 철학을 탐독했다. 그 후 '휴스턴 포스트'의 기자가 되었다. 1972년 뉴욕 주립대 영문과 석좌 교수로 부임했으며 1981년 고향 휴스턴 대학 영문과 문예창작 과정 종신 교수로 임명되기 전까지 10년간 뉴욕 주립대에서 소설창작을 가르쳤다. 1989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은 책으로 1964년에 발표한 첫 단편집 「돌아오시오, 캘리거리 박사」, 「백설공주」, 「죽은 아버지」, 「천국」, 「왕」 등이 있다. (편주)

4) 리처드 브라우티건(Richard Brautigan): 1935년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에서 태어나 오리건 주 유진에서 자랐다. 1957년 비트 작가들의 본거지인 샌프란시스코로 거주지를 옮겼고, 그들과 함께 미국의 반문화 운동을 주도하며 1960년대 초반까지 세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 미국인의 삶에 대한 세심한 통찰로 전미 젊은이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그는, 1967년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특이한 형태의 소설을 출간해 전 세계 문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은 이 소설에 담겨 있는 강렬한 반체제 정신, 기계주의와 물질주의 비판,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감 등에 매료되어, 마치 성서처럼 이 책을 늘 들고 다녔다고 한다. 「미국의 송어낚시」가 미국의 진보주의와 생태주의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달에 다녀온 미국의 우주인들은 자신들이 최초로 지구에 가져온 운석에 “미국의 송어낚시 쇼티”라는 이름을 붙여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관했고, 한 포크록 그룹은 “미국의 송어낚시”라고 그룹 이름을 짓는 등 브라우티건의 소설은 한 세대의 정신을 움직일 정도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워터멜론 슈가에서」는 그가 1968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앞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동화적 은유와 시적 표현들로 대중들에게 또 다른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임신중절: 역사적 로망스」, 「호킨스 괴물: 고딕 웨스턴」, 「바빌론 꿈꾸기: 탐정소설」, 「바람이 다 날려버린 건 아냐」 등을 발표한 브라우티건은 1984년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편주)

5) 존 파울즈(John Fowles): 1926년 영국 남부의 엑시스 주에서 태어났다.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종전 후 4년 동안 옥스퍼드 대학을 다니면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고, 자연스럽게 카뮈와 사르트르, 누보로망의 강한 영향에 노출되었다. 1950년에 프랑스어로 학위를 받았고, 그 후 여러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프랑스의 프랑스와 그리스 등지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다가 1950년대 중반에 귀국한 뒤 대학 강단에 서는 한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63년 발표한 처녀작 「콜렉터」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존 파울즈의 모든 소설들 가운데 가장 큰 찬사를 받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전후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불리며, 1969년 실버펜상과 1970년 W. H. 스미스 문학상을 수상하고, 2005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로 선정되었다. 2005년에 생을 마쳤다. 주요 작품들로는 「아리스토스(1964)」, 「마법사(1966)」, 「프랑스 중위의 여자(1969)」, 「에보니 타워(1974)」, 「난파선(1975)」, 「다니엘 마틴(1977)」, 「섬(1978)」, 「나무(1979」), 「만티사(1982)」, 「구더기(1985)」, 「벌레 구멍(1998)」이 있다. 오랫동안 공개가 예고되었던 「일기」도 2003년에 출간되었다. (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