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근옥,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서울 ; 시문학사, 2001), -韓哲昊, 「親美開化派硏究」(서울 : 國學資料院, 1998), pp. 237241. “특히 1898년에 접어들어 러시아가 노골적으로 조선의 시정에 간섭하고 이권을 획득해 가자 독립협회는 본격적으로 반러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中略)이와 같이 조야에 반러 감정이 팽배해짐에 따라 러시아 공사 슈뻬이에르는 電信으로 본국에 한국 내의 상황을 보고협의하였다. 그리하여 37일 그는 한국황제의 요청에 따라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하였지만 한국황제와 정부가 이를 필요 없다고 여기면 러시아 정부는 곧 철수할 용의가 있으므로 24시간 이내에 그 여부를 회신해 달라는 조회를 외부에 보냈다. 이 조회를 접수한 고종은 대신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한편 회신 시한을 3일간 연기해 줄 것을 러시아 공사관측에 요청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독립협회 회장 이완용은 서재필과 상의하여 러시아의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 등을 철수시키기 위해 정부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民衆集會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310일 종로에서 마침내 제1萬民共同會가 열리게 되었다. 이완용, 윤치호 등 독립협회 간부들은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주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市廛商人 현덕호를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와 동시에 李承晩(18751965)등 배재학당 및 경성학당의 학생들로 하여금 러시아의 내정간섭 행위를 규탄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 결의안을 채택하여 정부에 제출하도록 유의하였다.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1만 여명의 시민은 정부측과 주한외교계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가운데 자주의식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던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승만의 고목가에는 반로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목가발표일 1898. 3. 5., 협성회보

만민공동회 개최일 1898. 3. 10. 참조

 

2. 주근옥,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서울 ; 시문학사, 2001), -“고목가의 작가 이승만의 경우, 1894(고종 31) 배재학당에 입학, 미국인에게 우리말을 가르쳐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그 이듬해 졸업하고, 배재학당의 학생기구인 협성회(1898. 1. 1. 설립)의 기관지 협성회회보의 주필이 되어 정부 공격의 앞장에 서기도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미 미국인과의 접촉으로 상당한 영어 구사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90년대에 찬송가의 수용과 함께 이미 영어교육과정이 수용되어 활발하게 전개되고 또 성장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참조

 

3. 주근옥,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서울 ; 시문학사, 2001),

이승만 전직 대통령(19481960. 13)”-출생지 황해 평산, 생년월일 1875418

학력사항-1895 배재학당/1905 미 워싱턴 대학교 세인트루이스교 정치학 학사/1906 미 허버드 대학교 대학원 석사/1910 미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 정치학 박사

경력사항-배재학당 교사/1896 협성회보 기자/1898 독립협회 사건으로 7년간 옥고/1904 석방, 도미/1912 세계 감리교대회 한국대표/1914 하와이에서 태평양주보 창간/1917 호놀룰루에 기독교 학원 독립군하교 설립/1919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1919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1921 상해 임시정부 배척으로 사임. 미국서 독립운동/1945 귀국. 독촉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1948 제헌국회의장/1951 자유당 창당 총재/1952 2대 대통령/1956 3대 대통령/1960 대통령 선거 당선 /1960 4.19의거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1965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