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와 시인

 

(한맥문학 통권 304호, 2016년 1월호: 2015. 12. 25)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주근옥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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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쓰기’가 아니고, 시는 “쓰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흥취가 솟아나는 대로 다만 노래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혼을 기록하는 것에 머문다.」-

구시대의 시인 대부분은, 이러한 시관(詩觀) 하에 때때로 널리 알려진 변덕스러움으로, 유장(悠長)한 혹은 무잡(蕪雜)한 혹은 멋(色氣)을 부리는 말을 토하는 것에 유혹되었다. 이것이 소위 서정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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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일정한 형태를 갖고 있는 시대, 즉 “신타이시(新體詩) 시대”는 이것으로 족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시인은 그 일정한 주형(鑄型) 가운데에 혼을 교묘하게 흘려서 집어넣으면 족했던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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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정형시는 “자유시운동”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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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가 정형시를 파괴해서, 시를 광야(廣野)에 개방했던 것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었지만, 자유시운동에 관계했던 시인들은 파괴하는 것의 내용만 알고 건설을 잊어버렸다. 아니, 건설을 잊어버렸다기보다는 진짜의 자유시를 건설할 때까지, 그 능력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하는 쪽이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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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파괴 후에 쉽게 안주하고 있다. 농담처럼 말을 늘어놓으면, 호흡이 멈출 때까지 참아서, 담배연기를 한번 멈췄다가 뿜어내는 것은, 시의 연을 잘라 만드는 것과 같다. 엉터리 말 같지만. 그래서 호흡을 참아서 멈추는 것은, 시의 연을 가르는 것은, 그들이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던 정형시의 형해(形骸)를 등에 짊어졌다고 하는 그 정형시가 살가죽과 같다고 하는 사실과 마음이 교접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하기는 하지만, 안주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은 역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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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시의 형해(形骸)를 등에 짊어진 채로, 자유시는 타락해갔다. 그래서 드디어 “민중시(民衆詩)”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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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은 끝이 났다. 각성(覺醒)이 외쳐지지 않을 리 없다. “단시운동(短詩運動)”의 창(槍)이 던져졌던 것이다. 이것은 민중시의 장황(冗漫)과 무잡(蕪雜)을 공격해서, 시의 순화와 긴밀화를 외쳤다. 그래서 거듭 민중시를 격퇴해서 시단을 숙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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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시운동은, 다가오고야 말 “새로운 산문시운동”의 시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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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은 거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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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시인은, 이제 단적으로 말해서 혼의 기록은 아니다. 또 감정을 유로(流露)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첨예한 두뇌로서, 산재케 하는 무수한 말을 주도면밀하게 선택해서, 정리하고 한 개의 우수한 구성물(構成物)을 구축할 때의 기사(技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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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말, 구(句)와 구(句), 행과 행, 이것들이 빈틈없이 결합된다. 지붕의 개와처럼, 시멘트가 강하게 그 성질을 잘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계획은 몇 번이고 변경되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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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의 구성법이 엄격하게 추구되면 추구될수록 터무니없이 참고 행해서, 시의 연을 가르는 일의 필연성이 상실된다. 그래서 외관(外觀)은 산문과 거의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여기에 진짜 자유시의 길로 들어가는 열쇠가 들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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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유시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산문시로의 길”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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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확실한 의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새로운 산문시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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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산문시운동을 “시의 산문화”라고 힐난하는 시인이 이미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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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로운 산문시운동”을 “시의 산문화”로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치게 말의 ‘음악’을 존중하기만 했던 과거 시인의 시점에서 보는 사고방식이다. 운문문학으로부터 해를 받았던 구 심볼리즘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일본의 시에 ‘음악’을 요구한 것은 의의가 없었다. 일본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어처럼 음악적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는 빨리 말의 음악을 단념하고, 말의 결합으로 태어나는 ‘메커니즘’의 힘에, 그 본연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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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는 그 “새로운 산문시운동”으로 인해서 큰 전환을 행하는 것을 만난다. 프롤레타리아 시처럼 한 가지 소재에 관련되는 문제가 아니다. 토대(土臺)부터 두드려서라도 고쳐야 하는 것으로서 중대한 근본적인 사항이다. 왜냐하면, 오랜만에 시와 시인의 유일한 레텔을 거의 완전히 잡아 벗기는 것이니까. 종래의 자유시의 형식에 대한 변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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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로운 산문시운동”의 입장에 서서 확실하게 했던 걸음을 걷고 있는 시인, 걸을 수 있는 시인으로서,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1898~1965, 시인), 미요시 타츠지(三好達治, 1900~1964, 시인), 오가타 카메노스케(尾形龜之助, 1900~1942, 시인), 센다 히카루(千田光), 와타나베 슈우조우(渡邊修三), 타키구치 타케오(瀧口武士), 타가 키이자부로우(多賀圭三郞), 모리 타케오(森竹夫), 우에다 토시오(上田敏雄), 타키구치 슈우죠우(瀧口修造), 사카모토 에츠로우(阪本越郞, 1906~1969, 독문학자), 이토우 히토시(伊藤整, 1905~1969, 소설가), 키타죠노 카츠에(北園克衛, 1902~1978, 시인), 사카모토 하루카(阪本遼), 이이지마 타다시(飯島正), 사토우 하치로우(佐藤八郞), 후쿠토미 세이지(福富菁兒),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 1902~, 시인, 평론가),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1900~, 시인) 등을 열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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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산문시로의 길!” “새로운 산문시로의 길!” “새로운 산문시”의 길을 걷는 것의 내용이 ‘신인(新人)’의 이름에 가치를 붙일만하다!

시단의 신인(新人)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산문시운동”을 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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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은 바로, 자유시의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이다!

 

           (“詩와 詩論” 쇼우와(昭和) 4=1929, 3.)


北川冬彦: 1900(明治33)~ 1990(平成2)。滋賀県大津出身。本名は田畔忠彦。父親が満州鉄道に勤めていた関係で満州で育つ。旅順中学・三高を経て、帝大仏法科を卒業。詩集「検温器と花」によって詩人として注目され、新散文詩運動を精力的に展開し、詩壇に刺激を与えた。「三半規管喪失」を刊行して、横光利一(4-1-39-16)の賞賛と激励をうける。詩集「戦争」は、昭和詩史を飾る作品といわれる。戦後も盛んに詩を発表、ネオリアリズムを標榜し、日本の代表的詩人として国際的にも高く評価されている。詩論集・随筆集・翻訳など多い。立川市に住をかまえたのは昭和38年。以後、立川で詩人生活を遂げる。ハスの葉を好み自家栽培をしていた。

 

*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는 자유시와 산문시를 식별하지 못하고 있다. 두산 백과사전 "자유시" 명목을 쓴 분도 기타가와 후유히코와 동일한 시각에서 쓰고 있다. 아래를 참고하라.

보들레르의 산문시짐 "파리의 우룰" 서문 "아르젠느 우세에게"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서문 "아르젠느 우세에게"

 T. S. 엘리엇의 "자유시 고찰"과 서구시의 기본운율

두산 백과사전의 "자유시" 명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