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위에서(주근옥)

심상 게재
통권 제313호, 1999. 10월호

다리 위에서

다리 위에

가로등이 비친다

사내 1

가로등에 기대어 섰다

사내 2

횡설수설 지껄이며 걸어와

철푸덕 주저앉는다

혼잣말로

되게 덥군

겉저고리를 벗으며

비가 오시려나

오렴 펑펑 쏟아지거라

담배를 하나 뽑아 들고

사내 1에게

불 좀 빌릴까요?

사내 1은 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고 있던

손을 빼어 찰칵 불을 붙여 준다

선생은 집이 어딥니까?

요즘 불심 검문이 심합디다

수상하면 즉시 잡아가요

저도 어제 걸렸었죠

재수 없게, 그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행동에 규제를 받는다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요

아마 그 끔직한 사건 때문에

더 그런가 봅디다

끔찍한 사건이라니?

아니 여태 그 사건도 모르슈?

난 오늘 이곳에 왔소

고개를 끄덕이며

아 네에

그렇다면 들어보라는 듯이

아 글쎄 사람의 목을

댕강 잘라 갔다지 뭐요

손가락도 없어졌대요

신분증도 없고 목격자도 없어

사건이 오리무중이래요

슬그머니 가로등에 기댄다

사내 1과 등을 맞댄 셈이다.

웃으며

여자랍니다.

유방이며 엉덩이며

피부가 팽팽하더라는 데

처년가 보죠?

처녀와 부인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하하하 선생도 참 재밌군

참, 담배 피우겠소?

담뱃갑을 내민다

뽑아 물고 불을 붙인다

선생은 집에 안 가슈?

이대로 밤을 새우렵니다

고민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결혼은 하셨수?

맘대로 생각하슈

애들은 있구?

그것도 맘대로

허어, 성가신 모양이군

사내1, 머리를 돌린다

고향은 어딥니까?

하기야 고향이 대순가?

반드시 그렇지 않지

그럼 아니란 말이오?

사바세계요

하, 그런 애매한 대답이 어딨소?

말씨를 보니 경상도는 아니고

전라도도 아니고

어디 친척은 있소?

내 몸뚱이 하나요

들고 있던 가방을 불쑥 내밀며

있다면 이 가방뿐이오

오갈 데도 없는 사람이군

여기서 그냥 자겠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좋소

먹구름이 저렇게 몰리는데

걱정은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나 하슈

하하, 마누라 엉덩이나

두드려라 이 말씀이군

두드리든지 문지르든지 맘대로

농도 잘 하시는군

사내 1의 주위를 슬슬 맴돌며

내겐 귀신 곡할 만큼 정확한

육감이라는 게 있는데

선생을 보니 어쩐지

긴장하며

어떻단 말이오?

여전히 맴돌며

그 불안이 깃들인 눈

번민의 몸짓

초조함

사내 1이 사내 2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그래서?

선생, 우리 그러지 말고

심중을 톡 까놓고 얘기합시다

아 아니 뭘 까놓잔 말야?

단호히

선생은 지금 자살하려고 그러죠?

잡았던 목덜미를 밀치며

재수 없군

선생, 고귀한 목숨을

죽음과 맞바꿀 수는 없잖소?

고귀할 것도 없소

썩은 생선이오

푹푹 썩었단 말이오

도저히 냄새를 못 맡을 지경이오

가방을 눈앞에 내밀며 흔든다

피하며

허어, 우리 이러지 맙시다

몇 시죠?

대답이 없다

막차도 지나갔는데

여편네가 친정에 가더니

마음이 변했나

사내 1

난간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사내 2, 그의 행동을 주시한다

저 친구 자살하려는 것이 틀림없어

전에 그 애송이도 저랬거든

그땐 목덜미를 꽉 쥐고

잡아왔으니까 아무 일없었는데

저건 그렇게도 안 되겠고

젠장, 살기도 어렵지만

죽기도 어려운 건데

사내 1, 허리를 굽혀 내려다본다

사내 2, 황급히 쫓아가며

여보슈, 거 위험한 짓 작작하슈

사내 1, 그냥 굽히고 있다

귀가 멀었나

등이 다 오싹오싹하는구만

선생, 지금 제 정신이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저렇게 까마득한데

허어 혹시

손가락으로 머리 위에 원을 그리며

정말 이런 것 아냐?

꿈쩍도 안 하니까 돌아서며

별 놈 다 있군

다시 사내 1을 향해

물귀신이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만

이 눈은 능청스레 보고 있질 못 한단 말이오

내 말이 해로운 건 아니니까

제발 참으시오

손가락질하며

고집불통이군

돌아서며

까짓, 내버려둬

사내 2, 앞으로 나온다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본다

초조한 듯 왔다갔다한다

사내 1, 앞으로 나와

사내 2의 어깨를 툭 친다

사내 2, 깜짝 놀란다

여 여보슈, 제발

맘을 진정하슈

담뱃갑을 내민다

한 개비를 뽑으며

인정 많아 좋군

알아주니 고맙군

서로 히죽 웃는다

사내 1, 가방을 들어 보이며

이 가방에 내 생애가 들어 있거든

이것을 버림으로써

기구한 내 과거도 끝나는 거야

사내 2, 알쏭달쏭 하여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이제 알았다는 듯이

하하, 가방이 다 낡은 모양이군

까짓 거 버리슈

그리고 아주 멋진 최고급으로

또 하나 장만하슈

고맙소

괜찮소

도대체 집이 어딘데 이렇게 늦었소?

사내 2,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역에서 좌측으로 한 오 분 걸어가면

굴다리 건너 식육점이 있소

그 천가 돈 많이 벌었지

그 집 바로 뒤가 내 집이오

셋방이지, 그래도 극락이오

마누란 지금 집에 없소

사내 1, 하품을 한다

아낸 난관 수술을 했지

애가 무슨 소용 있소

돈이 많아야지

우린 행복하오

금실이 좋다구

사내 1, 가로등에 가서 기댄다

사내 2, 그를 따라가며

눈은 동그랗지

항상 촉촉하고

유방은 팽팽하지

그럴 수밖에

젖을 물려 본 적이 없으니까

대신 내가 빨지

사내 1이 듣지 않고 있음을 알고

내 얘기 재미없소?

아 아니오

퍽 재밌게 듣고 있소

계속하슈

듣지도 않으면서

나 혼자 지껄이란 말이오?

내 귀는 열려 있소

다시 활기를 띠며

하하하, 뚝뚝하군

하지만 세상은 말씀야

그게 안 통한다 이거지

좀 싹싹해 보슈

좀 비겁해 보슈

선생은 직업이 뭐유

직업이라는 게 별 거요?

어깨를 툭 치며

암 그렇고 말고

직업에 귀천이 있나

긍지가 문제지

난 면서기지 호적서기요

호적부를 뒤적이다 보면

별 일 다 있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소

호적초본을 떼러 여자가 온 거요

스물 댓 먹어 보이는

밉상은 아니더군

눈 밑에 점이 하나 있었소

보조개도 살짝 패이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 난 항상 솔직해

안는 시늉을 하며

한 번 껴안고 싶더군

정말이오

그렇듯 충동적인 음흉한

아 아니지, 음흉하진 안소

하여간 호적을 보니

그 여잔 출가했더군

하아, 이런 멍청한 사람

그럼 시가에 가서 떼어야지

그랬더니

여잔 펄쩍 뛰는 거요

자기는 미혼이라는 거요

처녀 처녀를 앞세우더군

서류 상엔 부인이고

실제로는 처녀구

사람의 운명은 펜 끝에서도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아슈?

그럴 수도 있지

선생도 그렇게 생각하슈?

그렇소, 그렇다 해두고

어서 집에나 가보슈

마누라가 기다릴 테니

마누라?

친정으로 쫓아 보냈소

요즘 여편네들이란 글러먹었소

걸핏하면 친정이 어떻다

뭐가 어떻다

그래서 꼭 밖으로 빠져나가려고만 한단 말야

홧김에 쫓아 버렸더니

오늘 막차로 온다는 기별이 왔소

막차는 지나갔잖소?

그러니 오늘 안 올 모양이오

같이 집으로 갑시다

갈 곳도 없는 듯하니

고맙소, 허지만 혼자 있고 싶소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것이

내 성미거든

그러지 마슈

딴 뜻은 없소

순전히 선생에 대한 호의요

호의를 무시한다는 것은

무례한 짓이오

이것은 진실이오

안 그렇소?

큰 소리로

당신이나 진실을 삶아 먹으슈

사내 2, 깜짝 놀란다

사내 1, 하늘을 본다

저어, 그 여자 있잖소?

쪼르르 다가서며

실제론 처년데

서류 상으론 부인인 그 여자?

그 여자 혹시

의아해 하며

아는 사람이슈

대답이 없으니까

선생, 혹시

혹시?

아 아니오

고개를 한번 갸우뚱한다

사내 1, 화제를 바꾸어

결혼했댔죠?

내내 결혼했다니까?

여자라는 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남의 여자도 끼고 누우면

내 것이지

하하하, 그 말이 진실이오

이제 진실을 말 할 자격 있소

당신이라면 나를 고백해도 되겠소

우리 아버진 개백정이었지

뒷마당은 개들의 사형장이었지

개의 모가지를 옭아 잡아당기면

생똥이 삐질삐질 나오고

용을 쓰다가 축 늘어지지

그 악에 비친 눈

빼어 문 혓바닥

습관으로 난 보았소

개백정이라고

아이들이 놀렸지

학교도 겨우 중학 중퇴지

난 집을 뛰쳐나왔으니까

소매치기를 했지

돈이 생기면 계집을 끼고 잤소

훌쩍훌쩍 울기도 잘 하는 계집

애비가 계모를 얻었는데

구박이 심해서 나왔다는

그래서 벌어다가 몽땅 바쳤지

사실 난 여잘 몰랐거든

동정을 바친 거지

내 더러워, 그 계집이

불쌍해지고 울고 싶구

하루라도 못 보면

내 모든 것을 잃은 것 같구

헌데, 그 다음이 문제야

재수 없게 걸려서

빵간에 가지 않았겠소

그야 뭐 예삿일이지만

나와 보니 그 계집이

감쪽같이 사라졌단 말이오

날 버린 거야

갑자기 머리를 돌리며

내가 누군 줄 아슈?

개백정

십년이 넘는 세월을

몇 마디 말로 쏟아 놓다니

선생의 맘속을 내가 열어 보다니

그 계집 잊으슈

다시 얻으면 되지

내 말하지 않았소

끼고 자면 내 것이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서류 상으론 부인이고

실제론 처녀인

그 계집을 끼고 잤소

그게 내 마누라요

깜짝 놀라며

뭐 당신이?

한번 자고 두 번 자고

그러다가 정이 들었지

정이라는 것 정말 무서운 거요

사내 1, 광적으로 웃는다

당신과 나의 계집

반갑군

사내 2, 놀란 듯

선생과 나의 계집?

왜 믿어지지 않소?

당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틀림없소

아니기를 바라는 듯

정말 틀림없소?

걱정은 마슈

서류상의 남편은 아니니까

간통으로 고소도 안 할 테니까

그 계집은 나와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했었소

헌데 바람이 나서 도망쳐 나와

나와 살고 내가 없는 사이

당신과 살고

그럴 리 없소

마누란 날 속여 본 적이 없소

당신 마누라가 아니오

내 마누라요

내 마누라요

아니오

아니오

내놓으시오

그렇다면 법으로 해결하자구

당신은 합법적으로 차지했소?

그래도 내 마누라요

좋소

그럼 그 계집한테 물어봅시다

좋소

둘이 서로 노려보다가

딴 길로 안 갔을까?

뭐? 그럼 우린?

그랬는지도 몰라

아냐, 그럴 리 없어

선생이 날 속이고 있소

그런 음흉한 수작에 속을 내가 아니오

계집이 오긴 오는 거요?

계집 계집 하지 마슈

막차는 갔고, 첫차로 올 거요

첫차로도 안 오면?

다음 차요

그 차도 안 오면?

그 다음 차요

에끼 여보슈

그런 대답이 어딨소?

다음다음 끝까지 기다리는 거요

그렇다면 난 관두겠소

결과는 뻔하잖소?

포기하는 거요?

아니오, 난 바쁜 몸이요

이렇게 헛된 시간을 보낼 순 없소

며칠 후에 계집이 오면 다시 만나서

판결을 보면 어떻겠소?

선생 말도 옳소

나도 바쁜 몸이오

그게 좋겠소

나도 좋소

다음 일요일이 어떻겠소?

바로 이 자리서 이 시간에

이승과 저승 중간에서

그럽시다

둘은 동시에 돌아선다

사내 1, 다시 돌아서며

미안하지만 이 가방이나 맡깁시다

왜 버리지 않고?

버리긴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선생의 전 생애를 어떻게 내가

맡아 보관할 수 있겠소?

미안하오, 그럼

가방을 넘겨준다

머뭇거리다가 받는다

사내 1, 급히 사라진다

그 뒤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사내 2, 그를 향해 소리친다

야, 이 미친놈아

내 마누라를 네 것이라니

날강도 같은 놈아

그는 가로등 아래로 온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가방을 조심스레 연다, 순간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사색이 다 되어

나 날 더러 어떻게 하라고

사람의 머릴, 사람의 머릴

두 손으로 가방을 든 채

가로등 밑을 왔다갔다 한다

제 정신이 아니다

강물에 가방을 던져버리고

뒷걸음치다가 급히 도망친다

가로등만 혼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