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근옥 시집 「번개와 장미꽃」

박 명 용(전대전대 문창과교수, 문학박사, 시인)

주근옥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번개와 장미꽃」(새미, 1998)을 상재했다. 이 시집의 첫 번째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3행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표지에 ‘素節集’이라고 표기한 것은 바로 이 3행시를 이르는 말이다. 소절은 기본적으로 ① 단2음보/장2음보/장2음보, ② 장2음보/장2음보/장2음보, ③ 장2음보/장2음보/단2음보의 세 가지 외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3행 서정 단시인 것이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시조도 3행시로서 단순성의 미학과 완결성의 미학이 어우러진 시의 유형이지만, 소절은 분량이 시조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그냥 짧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음까지를 의미한다. 즉 시조는 짧은 형식 안에서도 발단, 전개, 결론의 논리적 구성을 전개할 수 있다면 소절은 논리적 인과나 과정을 전개하는 것은 무리일 일이니까 짤막한 줄 속에 느낌과 생각을 요약해 직관적일 수밖에 없게 되며, 이 점에서 소절은 시조보다는 하이쿠와 닮아 있다.

사람의 사상과 감정은 복잡하고도 다양해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는 시의 생명인 함축과 암시, 생략에 충실함으로써 무한한 상상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저수지가 터져

휩쓴 마을 염소도

보리도 배동 서네

             ―“배동” 전문

저수지가 터져 황폐한 마을과 배동선 염소와 보리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이 시는 모든 폐허 위에 찾아오는 창조적 생산의 풍만함과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배동’이라는 울림도가 큰 음소로 이루어진 이 아름다운 고유어는 배가 불룩해진 염소나 배 불룩해진 보릿대를 울림으로 전해준다. 이 시가 3행이지만 두 개의 대조적인 장면을 제시했다면 다음 시는 행과 행의 단절이 오히려 의미의 점층적 심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늘은 눈보라

이불을 둘러쓰고

품속에 밥을 앙궈

            ―“밥을 앙구며” 전문

‘앙구다’는, 음식을 식지 않도록 불에 놓거나 따뜻하게 묻어두는 것을 이르는 낱말이다. 1행은 눈보라치는 하늘을 제시함으로써 자연과 계절의 추위를 알리고 2행은 그 추위에 대조적으로 따뜻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를 제시한다. ‘이불’과 ‘둘러쓰고’는 엄동설한임을 느끼게 하는 가장 경제적인 언어이다. 그리고 3행에서는 따뜻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가 추위를 견디는 인간 사이의 온정으로 전환된다. 불과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놓은 밥 주발을 보며 ‘식구’라는 말을 실감하고, 가족간의 사랑과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랫목에 묻어 놓은 것에서 더 나아가 “품속에 밥을 앙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끼고 나눌 수 있는 온정을 효과적으로 사물화?행위화 시키고 있다.

이 시집의 두 번째 특징은 인용한 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순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시인이란 모국어를 아름답게 갈고 닦는 사람임을 상기한다면 이 작업의 소중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찌러기,’ ‘부루기,’ ‘옥화란,’ ‘도꼬마리,’ ‘소댕,’ ‘고샅,’ 등의 거의 잊혀진 명사를 우리의 생활 속에 살려낸 것도 돋보이지만 “배동 서다,” ‘투그리다,’ ‘앙구다,’ ‘비릇다,’ 등의 고유어 동사를 적확하게 사용하여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새로운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이 시집이 지닌 아름다움 중의 하나이다. 말라르메의 말처럼 시는 사상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낱말로 이루어져 있다. 낱말 하나 하나가 가진 고유한 리듬과 울림, 독특한 분위기와 연상, 소리와 상징 등이 미적으로 어울려져 있을 때에만 시가 되는 것이다.

검정찌러기가

길을 막고 투그리자

등에 쌓이는 살구꽃

            ―“찌러기” 전문

1행은 단음보라서 독자의 주의를 모으는데 효과적이다. ‘찌러기’는 황소를 성질 사나움으로 특징지어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안 그래도 검정이라는 색깔 자체가 불퉁거리며 사납다는 느낌을 환기시키는 데다가 황소를 찌러기라고 부르니 그 등등한 사나움이 가득하다. 2행에 오면 길을 막는 행위와 짐승들이 서로 싸우려고 소리지르며 잔뜩 벼른다는 의미의 고유어 동사 ‘투그리다’가 결합해 이제 선혈이 낭자하게 벌어질 듯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런 분위기의 고조에 ‘검정찌러기’와 ‘투그리자’의 음가가 한 몫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3행은 이제까지 전개된 사나움과 싸움, 공격성을 감싸 안는 포근하고 화사한 이미지가 펼쳐져 사상의 전환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이 시의 효과는 적확한 우리말 사용능력에서 비롯된다.

3행시라는 형식적 조건 자체가 이미지들을 조화롭게 구축한다기보다는 시적 암시성을 위해 긴장과 함축을 지향해 단편적이기 쉬운데다 시집 전체가 동일한 형식으로 되어있어 메마르거나 단조로워지기 쉬운데도 불구하고 편편마다 일정한 시적 수준을 보여준 점은 이 시인의 역량으로 평가할 만하다. 단시는 형식적 조건을 감안한다고 해도 시적 암시와 긴장감이 조화를 이룰 때 그 효능이 더욱 확충된다. (시문학 통권 제325호, 1998. 08. 01).